유탁은 신발 가방 대신 작은 천 주머니를 들고 왔다.
일요일 낮, 버스 정류장 옆 쉼터였다. 도하는 주머니의 모양을 보고 물었다. 유탁은 그 안에서 낡은 말판과 나무말을 꺼냈다. 장비를 줄여 왔다는 농담을 하려던 도하는 말을 삼켰다. 오늘은 셋 다 훈련화를 가져오지 않기로 했다.
“영상도 안 봐요.”
유탁이 주머니 끈을 당기며 말했다. 도하는 알겠다고 했다. 세빈은 앉을 자리가 넓은 공원 안쪽 탁자를 골랐다. 버스에서 멀지 않고 평지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곳까지 걸으며 오늘 무릎 상태도 자기 입으로 말했다. 오래 돌아다니지 않고 앉아서 놀다 갈 수 있다고 했다.
도하는 경기 원본 주소를 휴대폰 첫 화면에서 뒤로 옮겨 뒀다. 지우지는 않았다. 필요한 때 셋이 보면 됐다. 손이 가는 곳에 계속 놓아 두고 안 보겠다고 참는 것보다 쉬웠다.
일요일 낮에 모이면 대개 경기장부터 갔었다. 오늘은 선수 확인도 점수표도 없었다. 유탁이 간식을 사자고 하자 도하는 몇 시에 먹을 건지부터 물었다. 세빈이 지금 먹고 싶으면 지금 사자고 답했다.
“빈 시간 맞추는 버릇이 남았네요.”
그가 말했다. 유탁은 자기 저녁 근무가 없으니 오후 두 시를 이겨야 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도하는 편의점 유리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봤다. 어느 시간에 더 효율적으로 쉬어야 하는지 따지느라 아직 쉬기 시작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각자 먹고 싶은 것을 골랐다. 도하는 세 사람 것을 한 봉투에 맞춰 넣다가 유탁이 고른 과자를 뺐다. 너무 부풀어서 공간을 차지한다는 이유였다. 유탁이 바로 자기 손에 가져갔다.
“먹을 걸 고르는 건데 적재해요?”
도하는 봉투를 내려다보다 웃었다. 유탁의 과자는 부서지면 안 되는 얇은 조각이었다. 그는 자기 고른 단단한 빵부터 맨 아래에 놓았다. 유탁은 과자를 따로 들겠다고 했다. 하나에 다 넣어야 운반이 끝나는 규칙은 없었다.
세빈은 음료를 자기 가방에 넣었다. 도하가 들어 주겠다고 하자 지금 이 정도는 괜찮다고 답했다. 그는 그 말을 받고 자기 봉투만 들었다. 셋은 계산을 나눠 마쳤다. 오늘도 누가 대회에서 돈을 받아 와서 사는 간식은 아니었다.
탁자에 도착하니 유탁이 먼저 그늘 쪽을 골랐다. 세빈이 다리를 편하게 둘 수 있는 끝자리였다. 도하는 맞은편에 앉고 남은 의자에 봉투를 올렸다. 나무판을 가운데 펴자 작은 색깔 말들이 굴러 나왔다.
“이거 경기 설명부터 오래 해요?”
세빈이 물었다. 유탁은 한 번 하면 안다고 답했다. 도하는 그 말에 웃었다. 그 말을 믿고 처음 코트에 들어갔으면 어떻게 됐을지 떠올랐다가, 생각을 거기서 멈췄다. 오늘은 코트 얘기를 하지 않기로 했었다.
말판에는 좁은 길과 넓은 빈칸이 그려져 있었다.
각자 나무말을 셋씩 골라 자기 쪽 출발선에 놓았다. 차례가 오면 말 하나를 한 칸 옮길 수 있었다. 남의 말을 뛰어넘을 수 없고, 가운데 다리를 지나 반대편 자기 칸에 먼저 모두 넣으면 이겼다. 갈 곳을 막아 놓으면 자기도 돌아가야 하는 오래된 놀이였다.
유탁은 익숙한 듯 빨간 말을 벌려 놓았다. 도하는 파란 말을 한 줄로 모았다. 세빈은 첫 말을 가운데 가까이 보냈다. 도하는 자기 차례가 오자 앞말을 더 멀리 내보내고 싶었다. 한 칸만 갈 수 있어서 손끝이 심심했다.
“먼저 가 있으면 막히겠는데요.”
세빈이 말했다가 입을 닫았다. 유탁이 그녀를 봤다. 세빈은 자기 차례가 아닌데 말을 붙였다며 웃었다. 도하는 괜찮다고 하려다가 자기가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대신 정해 줄 수 없는 칸이었다.
두 번째 바퀴에서 도하의 앞말은 가운데 다리를 막았다. 뒤의 말은 같은 줄로 붙어 있었다. 유탁이 옆길로 돌아왔고 세빈은 빈칸 하나를 남겨 뒀다. 도하는 자기 앞말을 빼려다가 뒤말을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유탁이 웃었다. 도하는 그가 자기를 가르치려는 줄 알고 먼저 자기 실수를 설명했다. 한 줄로 모아 두면 손이 덜 갈 줄 알았다고 했다. 유탁은 아니, 파란색을 너무 심각하게 보고 있어서 웃었다고 답했다.
“그 나무말 오늘 출근해요?”
도하는 손에 쥔 말을 봤다. 조그만 파란 원통의 밑면이 벗겨져 있었다. 자기 월요일보다 결의가 있어 보이기는 했다. 그는 웃으면서 앞말을 옆으로 비켰다. 한 칸 비키자 뒤의 두 말이 움직일 길이 났다.
첫 판은 유탁이 이겼다. 끝나기 직전 도하는 세빈의 노란 말 하나가 여전히 출발선 근처에 있는 것을 봤다. 그녀는 다른 두 말이 갈 길만 미리 열어 두다가 자기 것을 잊었다고 했다. 유탁이 그건 이기는 규칙이 아니라고 말하자 셋이 같이 웃었다.
도하는 점수라도 적어 둘까 물었다. 유탁이 자기 음료 뚜껑을 닫으며 안 적어도 오늘 자기가 이긴 건 안다고 했다. 세빈은 두 번째 판에는 알려 주지 말라고 했다. 도하는 자기 패배가 저장되지 않는 작은 판이 이상하게 편했다.
두 번째에는 말을 흩어 놓았다. 이번에는 너무 흩어 놓아서 자기가 지키고 싶은 길이 세 개가 됐다. 하나를 택하면 다른 두 개를 내줘야 했다. 도하는 나무말 위에 손을 올리고 오래 있었다.
“여덟 초 넘었어요.”
유탁이 말했다. 도하가 웃다가 그 말을 바로 들이밀지 말자고 했다. 유탁은 미안하다며 이번엔 그냥 자기 과자 식는다고 했다. 세빈이 과자가 어떻게 식느냐고 물었다. 유탁은 뜨거운 마음으로 샀다고 답했다.
도하는 결국 하나를 옮겼다. 두 번째 판은 세빈이 이겼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알려 주지 않은 덕이라고 주장했다. 유탁은 자기 말을 밀어 넣을 빈칸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빈은 둘 다 맞을 수도 있다며 노란 말을 주머니 쪽으로 모았다.
간식 봉투는 나무말보다 먼저 비었다.
도하가 바닥으로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손으로 모았다. 바람이 탁자 끝을 쓸고 가자 유탁이 빈 포장지를 붙잡았다. 셋이 거의 동시에 물건을 잡아서 한번 더 웃었다. 코트가 없어도 굴러가거나 날아가는 것은 보였다.
도하는 방금 판에서 뒷말을 비운 장면이 경기에도 쓸모가 있을 것 같다고 입을 열었다. 세빈이 그를 봤다. 그는 문장을 끝내지 않고 물을 마셨다. 오늘만큼은 새로 얻은 것을 훈련 목록에 옮기지 않기로 한 약속이었다.
“생각은 할 수 있죠.”
유탁이 말했다.
“나한테 지금 해 보자고만 안 하면.”
도하는 알겠다고 했다. 머릿속에서 길을 그리는 버릇까지 바로 끌 수는 없었다. 대신 떠오른 생각을 다른 사람의 오후에 펼쳐 놓을지는 고를 수 있었다. 그는 종이를 꺼내려던 손을 빈 봉투에 넣었다. 쓰레기를 모으는 데는 그 손이 필요했다.
세빈도 자꾸 어느 칸이 열려 있는지 말하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러다가 자기 나무말을 잊었다며 웃었다. 도하는 그녀가 늘 선수들의 발을 보느라 자기 다리가 아픈 걸 늦게 말했다는 설명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그 설명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지금은 함께 웃으며 놀이 얘기를 하고 있었다.
유탁은 정비소에서도 공구를 가까운 순서대로 놓는다고 했다. 도하는 그럼 뭐가 제일 앞이냐고 물었다. 유탁은 매번 다르다고 답했다. 먼저 풀 나사와 다음에 볼 것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었다. 제일 무거운 공구부터 놓는 사람은 없다고 덧붙였다.
“저는 여기 와서 맨날 제일 센 것부터 해 보려고 했네요.”
유탁이 자기 손을 보며 말했다. 도하는 곧바로 그렇다고 받지 않았다. 유탁이 밥 먹고 일하는 동안 이미 알고 쓰던 선택이 코트에선 다른 얼굴이 됐을 수 있었다. 자기 역시 준비됐다는 대답을 센터에서 듣고도 경기에서는 건너뛰었다.
세빈은 세 번째 판을 하자고 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잘 써 보라는 숙제를 주지는 않았다. 유탁이 말을 다시 꺼냈고 도하는 이번에는 노란색을 골랐다. 파란색을 오래 본 눈이 조금 피곤했다.
색을 바꾸고도 그는 앞말 하나를 먼저 멀리 내보냈다. 유탁이 알아보겠다는 듯 웃었다. 도하는 됐어, 하고 웃으며 자기 차례를 넘겼다. 새로 알았다는 말이 습관을 바로 고쳐 주지는 않았다.
세 번째 판은 끝까지 접전이었다. 도하는 마지막 한 칸을 넣기 전에 세빈의 길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면 유탁의 빨간 말이 먼저 들어올 것이었다. 그는 남을 막는 데 쓰는 한 번과 자기 것을 넣는 한 번을 오래 비교하다 자기 말을 옮겼다.
한 차례 뒤 유탁이 끝냈다. 도하는 졌다고 말했다. 유탁은 두 번 이겼으니 다음 간식은 자기가 고르겠다고 했다. 세빈이 그건 원래 각자 고르는 거라고 답했다. 그 말이 제일 정확해서 모두 한 번 더 웃었다.
세빈이 이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도하는 막 한 판 더 하자는 말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그는 남은 나무말을 주머니에 담았다. 유탁이 개수를 세는 동안 도하는 탁자 아래를 확인했다. 한 개가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능력으로 당겨 올릴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고, 그럴 생각을 할 만큼 무겁지도 않았다.
그는 몸을 숙여 집었다. 밑바닥에 검은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유탁은 오래전에 잃어버릴 뻔한 것이라고 했다. 도하는 주머니에 넣고 끈을 묶었다. 말판이 다 접히니 탁자는 다시 공원 탁자가 됐다.
휴대폰이 울렸다. 송주가 남은 수업 처리 상황을 알려 온 것이었다. 도하는 화면을 한 번 보고 오늘 저녁에 확인하겠다고 답했다. 급히 같이 읽어야 할 항목은 아니었다. 유탁은 새 장소 소식이냐고 물었다. 도하는 아직 아니라고 했다.
셋은 공원 입구까지 걸었다. 세빈은 앉아 있었어도 이제 쉬고 싶다고 말했다. 도하는 즐겁게 놀았으면 몸도 덜 힘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가 버렸다. 재미있던 시간과 피곤한 몸은 함께 올 수 있었다.
정류장 앞에는 작은 장터가 열려 있었다. 유탁이 손바닥만 한 화분을 봤다. 도하는 집에서 키우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전에 금방 말려 버렸다고 했다. 물을 많이 줘도 안 됐다는 말에 세빈이 그럼 이번에도 보기만 하자고 했다.
유탁은 진열대의 화분을 손대지 않고 한 바퀴 봤다. 도하는 그 모습을 기다렸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어떤 실수를 수정하기 위한 벌은 아니었다. 동료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동안 자기 발도 잠깐 멈추면 됐다.
세빈의 버스가 먼저 왔다. 그녀는 오늘 영상 한 번도 안 봤다고 말했다. 유탁이 나무판도 실물이라 그런 거라고 답했다. 도하는 다음번에는 그 판에서도 이겨 보겠다고 했다. 세빈이 다음번 날짜는 몸 상태를 보고 정하자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탁과 다른 쪽 정류장까지 걸을 때 도하는 주머니가 가벼운 것을 느꼈다. 메모한 전술도 없고 새 기록도 없었다. 대신 유탁이 어떤 과자를 고르는지, 세빈이 놀이에서 자기 말을 놓치는지 알게 됐다. 그런 것은 선수 소개 화면에 넣을 항목이 아니었다.
“오늘 괜찮았네요.”
유탁이 말했다. 도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가 덧붙일 말을 기다렸지만 더 말이 오지 않았다. 괜찮다는 한마디를 다음 경기의 우승 약속으로 키울 필요도 없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도하는 나무말이 돌아가던 길을 떠올렸다. 자꾸 앞을 막던 노란 말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그는 경기에 옮겨 그리려던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봤다. 오늘은 이긴 장면이 없어도 남겨 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