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빈이 먼저 출발했는데 도하가 먼저 도착했다.
수요일 저녁, 잔돌 코트 끝의 빈 받침 앞이었다. 유탁은 아직 정비소에 있었다. 도하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어제 적은 질문을 꺼냈고, 세빈은 그럼 걸어 보자고 했다. 짐 없는 통로를 한 번 왕복하는 데에는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다.
도하는 두 걸음을 줄여 그녀를 지나쳤다. 끝에서 돌아보니 세빈이 오른발을 바닥에 내려놓는 중이었다. 도하가 짐을 잡고 왔다고 해도 그보다 늦을 것 같지 않았다.
“여기는 제가 먼저 가는 게 빠르겠네요.”
그가 말했다. 세빈은 숨을 고르고 받침을 제자리에 뒀다.
“지금은요.”
“일요일에도 이 길이는 같잖아요.”
“같은 건 길이죠.”
대답이 문답 시험 같아서 도하는 조금 피곤해졌다. 하루 종일 센터에서 분류 벨트를 따라 걸었다. 훈련에서는 모르면 설명을 듣고 싶었다. 그는 초시계를 흔들었다.
“제가 받아야 칠 초쯤 벌어요.”
“그 칠 초 전에 뭘 했는데요?”
도하는 말을 멈췄다. 지금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경기에서는 첫 경사로를 넘고 연결을 풀고, 무거워진 끈을 잡았을 것이다. 아는 말이었지만 세빈의 보폭을 보고 있으면 숫자 하나가 자꾸 앞에 섰다.
그는 바닥의 테이프를 눌렀다. 유탁이 색을 바꾸기로 했던 자리였다. 한쪽 끝이 들떠서 먼저 붙이고 싶었다. 손으로 문지르다 보니 세빈이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바로 한 번 해 보면 안 됩니까?”
“오늘 끝날 때 손 상태까지 보고 정해요.”
세빈은 먼저 빈 받침을 밀었다. 도하는 반대편에서 끈을 받았다. 첫 순서는 쉽게 끝났다. 그는 끈을 내려놓으며 그래서 자기 말이 맞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출입문이 열렸다.
유탁은 작업복 바지 그대로였다. 손을 씻고 왔다는데 손톱 옆에 검은 선이 남아 있었다. 그는 코트에 앉아 정비화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신발 끈을 묶던 손이 잠깐 멈췄다.
“오늘 손목 많이 썼어?” 세빈이 물었다.
“평소만큼요. 마지막 차 바퀴 빼는 게 좀 안 돼서.”
“그게 평소보다 많다는 말이야?”
유탁이 웃으려다 말았다.
“조금요.”
도하는 물병을 옆으로 밀어 줬다. 자기 손만 쉬어야 하는 게 아니었다. 유탁은 물을 마시고 손목을 천천히 돌렸다. 통증이나 저림은 없다고 답했다. 세빈은 오늘 그의 최대 중량 시연을 하지 않고, 힘을 쓰는 훈련도 짧게 한 구간만 확인하자고 했다.
셋은 먼저 실제 짐을 능력 없이 평지에서 밀었다. 도하는 덧댄 새 고무가 바닥에 잘 붙는지 느꼈다. 첫 받침을 밀고 모서리를 돌아 도착선에 세우는 동안 발이 밀리지 않았다. 서둘러 돌아서려는 순간에는 세빈이 끈을 놓기 전에 발부터 돌리지 말라고 했다.
유탁이 다음 구간 입구로 먼저 갔다. 도하는 짐을 밀고 그를 따라갔다. 시작할 때는 둘 다 빨랐다. 끝에 닿자 도하의 숨이 먼저 거칠어졌다. 퇴근 뒤라는 사실이 매트 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십 킬로그램 훈련 짐과 별도의 이십 킬로그램 받침 블록을 하나씩 들고 기억했다. 이번에는 첫 구간 한 번에만 능력을 쓰기로 했다. 둘의 표면 간격은 가장 멀어질 때에도 이 미터 칠십이었다. 유탁이 실제 블록을 내려놓고 손을 뗀 뒤 도하가 연결했다. 짧은 경사로를 넘어 멈춤선에 짐을 세우고, 다섯 초 안쪽에서 풀었다.
그 뒤 통로였다.
도하는 먼저 끝까지 달려 제동 끈을 받겠다고 했다. 유탁이 첫 짐을 옆 통로로 밀었다. 도하는 짐 없는 길로 빠르게 걸었다. 도착은 빨랐다. 끈을 받는 손이 뜨거웠다. 그는 두 손으로 제동하고 짐을 세웠다.
세빈이 시간을 적었다. 도하는 승인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초시계보다 도하가 쥔 끈부터 봤다.
“손 펴 봐요.”
떨림은 없었다. 손가락을 펼 때 안쪽이 당겼다. 아픈 곳까지는 아니었다. 도하는 괜찮다고 말했다. 세빈은 그 말을 적지 않고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떤지 물었다.
도하는 검지 아래를 가리켰다. 유탁이 끈을 말려다 멈췄다. 셋의 시선이 자기 손에 모이자 그는 괜히 웃었다.
“뭘 잘못한 사람 같네요.”
“확인하는 사람이죠.”
세빈은 의자를 당겨 줬다. 도하는 앉았다. 몇 분 전에는 그녀가 늦어서 칠 초를 잃는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자기가 앉아 있는 시간이 그보다 훨씬 길었다. 그렇다고 이걸 전부 더해서 세빈이 빠르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사람을 초시계 속에 넣으면 이상한 셈이 됐다.
충분히 쉬고 손가락이 편해진 뒤 같은 동선을 능력 없이 걸었다. 이번에는 세빈이 지름길로 먼저 갔다. 도하가 첫 짐을 선 안에 세우고 뒤따라가기 전에 그녀는 이미 다음 제동선에 서 있었다. 유탁이 밀어 온 짐이 닿자 세빈이 끈을 받았다. 달리지 않고 보폭을 작게 뒤로 옮겼다.
도하는 뒤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아무것도 당기지 않는 손이 허벅지 옆에서 흔들렸다. 멈춤선에 닿았을 때 숨이 덜 찼다. 유탁도 짐에서 손을 떼고 팔을 내렸다.
느렸다. 다만 아까와 달리 다음 동작을 바로 말할 수 있었다.
“이러면 제 회복 시간을 세빈 씨가 대신 벌어 주는 거네요.”
도하가 말했다. 칭찬으로 한 말이었다. 세빈의 얼굴이 굳었다.
“대신요?”
“제 손은 쉬고, 세빈 씨는 어차피 천천히 오니까 그동안.”
끝까지 말하기 전에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떤 말부터 고쳐야 하는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유탁은 제동 끈을 바닥에 놓았다. 코트 바깥에서 줄넘기 학생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세빈은 잠시 무릎 보호대 윗부분을 당겼다.
“제가 느린 건 사실이에요. 그걸 빼고 계산하자는 말도 아니고.”
“그런 뜻은.”
“듣고 말해요.”
도하는 입을 다물었다.
“저도 제동하고 짐을 옮겨요. 도하 씨가 다시 힘 쓸 때까지 시간 때우려고 여기 있는 건 아니에요.”
세빈의 목소리가 높아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도하는 변명할 틈을 찾지 못했다. 아까 그녀를 지나쳐 도착한 자기 발이 떠올랐다. 자기가 빨리 가면 저 사람은 무엇을 하느냐고 생각했었다. 그녀가 지금 한 일도 결국 자기를 위해 몇 초를 만들어 준다는 말로 바꿨다.
유탁이 느리게 손을 들었다.
“누나가 받아 주니까 저도 다음 블록 잡기 전에 손 놓고 가요. 형만 쉬는 건 아니에요.”
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손이 좋으면 팀이 좋다고 생각했던 말이, 자기 손만 중요하다는 말로 쉽게 변했다. 어떤 수치가 더 큰지 겨루던 버릇과 다를 게 없었다.
“말을 잘못했어요.”
그는 제동 끈을 가리켰다.
“제가 안 해도 되는 일을 세빈 씨가 하는 것처럼 말했네요. 제가 못 받는 때에 받아 주시는 건데.”
세빈은 바로 웃지 않았다. 도하는 사과가 끝났다고 훈련을 시작하자고 하지 않았다. 먼저 끈을 걷었다. 상대가 괜찮다고 말해 줘야 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순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음부터 역할부터 말할게요. 누구 값이 얼마라고 말하지 않고.”
“계산은 해야 돼요.” 세빈이 말했다. “그런데 저도 제 발로 고를게요.”
그제야 도하는 고개를 들었다. 세빈이 원하는 게 자기를 선수에서 지워 달라는 뜻도, 느린 걸 칭찬해 달라는 뜻도 아니었다. 가능한 구간을 스스로 말할 자리였다.
그녀는 바닥에 테이프 조각을 두 개 놓았다. 첫 구간 도착점과 다음 받는 자리였다.
“여기까진 제가 먼저 가요. 마지막 문 뒤 짐은 일요일 코스 보고 다시 정하고. 통증이 생기면 그건 말할게요.”
도하는 알겠다고 답했다. 자기도 연결이 끝난 뒤 손 상태를 말하겠다고 했다. 세빈은 그제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풀렸다고 다툼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음에 할 말은 남았다.
이날 능력 훈련은 더 하지 않았다. 유탁이 공구함을 열고 늘어진 끈의 길이를 맞췄다. 도하는 세빈과 빈손으로 통로를 한 번 더 걸었다. 먼저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바뀌니 같은 길이 덜 억울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도하가 먼저 받는 자리에 섰다. 세빈이 출발 쪽에 남으면 늦게 도착하는 대신 다음 짐을 살필 사람이 없었다. 도하는 그제야 앞서 가는 발만으로는 구간이 끝나지 않는 걸 봤다. 둘은 순서를 바꾸고 유탁에게 어느 쪽이 편한지 물었다.
“저는 누가 받든 신호를 빨리 줬으면 좋겠어요. 다 와서 멈추라고 하면 팔로 잡아야 돼서.”
유탁은 아까 붙인 선보다 한 발 앞에 손가락을 댔다. 도하는 그 자리부터 신호를 주기로 했다. 세빈도 같은 위치를 확인했다. 누구의 제동이 더 좋은지 고르는 대신 둘 다 받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 도하는 초시계를 주머니에 넣고 먼저 손바닥을 아래로 내리는 동작을 해 봤다. 유탁이 멀리서 보인다고 답했다.
송주가 수업을 마치고 바닥의 테이프를 봤다. 누구 자리냐고 물었다. 도하는 세빈 자리라고 답했다. 자기 회복 시간이라는 말은 붙이지 않았다.
“표시는 발밑 말고 앞에도 해 둬. 바닥만 보다가 사람 부딪힌다.”
송주가 작은 표지판을 가져왔다. 도하는 유탁과 함께 코트 옆에 세웠다. 사람 키보다 낮아서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 삼 미터를 재는 줄자와 달리, 이 표시는 누구를 기다리는지 보이게 했다.
훈련을 마치고 정류장에서 세빈과 같은 버스를 기다렸다.
유탁은 정비소에 놓고 온 도시락통을 가지러 먼저 갔다. 도하는 말없이 벤치 한쪽을 비웠다. 세빈이 앉았고 그도 옆에 앉았다. 잠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사과를 다시 하면 오히려 대답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세빈이 먼저 물었다.
“내일 잔업이죠?”
“네. 훈련은 안 갑니다.”
“퇴근하고 손 괜찮은지만 알려 줘요. 답장은 늦어도 되고.”
도하는 알겠다고 했다. 수면 시간을 줄여 금요일에 메우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세빈도 그걸 요구하지 않았다. 버스 도착 화면의 숫자가 줄어드는 동안 둘은 길 건너 빵집에서 나온 사람을 봤다. 종이봉투가 꽤 컸다.
“저만 한 빵도 있네요.”
“한 덩이가 아니라 여러 개겠죠.”
“그렇죠. 제가 자꾸 하나로 보네요.”
세빈이 그를 돌아봤다. 도하는 웃어도 되는 말인지 망설였다. 그녀가 먼저 웃었다. 작았지만 아까와 달리 웃음이 길었다.
도하는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마셨다. 오늘은 능력보다 말을 더 함부로 쓴 날이었다. 팀원에게 미안하다는 말까지 잘하면 점수가 생길 리 없었다. 앞으로 코트에서 역할을 넘길 때 무엇을 먼저 말하는지 달라져야 했다.
버스가 왔다. 세빈이 먼저 탔고 도하는 뒤따랐다. 안쪽 빈자리까지 가는 그녀의 걸음은 여전히 느렸다. 도하는 서두르지 않고 뒤에서 기다렸다. 기다린 시간을 누구에게 빌려 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휴대폰에 한결의 새 공개 영상 알림이 떴다. 그는 문 앞에서 큰 짐을 가볍게 한 뒤 손을 놓았다. 곧바로 다음 손잡이를 잡는 줄 알았는데, 한결의 오른손이 허공을 한 번 돌아 다른 쪽으로 갔다.
도하는 화면을 되감았다.
짐은 빨리 갔고, 손은 그보다 늦게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