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한 문 앞에는 세르단이 없었다.
르네아는 종이 가게의 처마 아래에서 맞은편을 봤다. 아까 헤어졌던 기름 유리등 가게가 있었다. 문에는 열린다는 나무패가 그대로 걸려 있었고, 등잔을 들여다보는 두 사람 가운데 남자는 없었다. 그녀는 팔 아래의 종이 묶음을 고쳐 안았다.
아침에는 단순한 외출이었다. 자와 연필을 새 갈색 주머니에 넣고, 남은 도면을 덮을 종이를 사러 간다고 했다. 세르단은 자기 책상에 쓸 등잔 심지도 보고 싶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둘은 집 앞에서 같은 길로 나왔다.
어제 그가 준 주머니는 걸을 때마다 자 끝이 위로 올라왔다. 르네아는 끈을 조금 고쳐 묶었다. 남자가 불편하냐고 물었고, 그녀는 손에 들고 있을 때와 달라지는 중이라고 답했다. 세르단은 제 선물이 처음으로 외출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평가하는 사람도 아직 길을 못 건넜어요.”
그녀가 말했다. 짐수레가 지나갈 때까지 둘은 기다렸다. 남자는 오른쪽 벽이 가까운 쪽을 골랐고, 르네아는 그 옆에서 수레에 실린 통이 흔들리는 것을 봤다. 빈 통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묵직한 짐의 소리보다 컸다.
종이 가게와 등잔 가게는 같은 길을 사이에 뒀다. 르네아는 먼저 자기 것을 보겠다고 했다. 세르단은 자기도 건너편에 다녀오겠다며, 다 보면 문 앞에서 만나자고 답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밀었다.
그 문 앞이 어느 쪽인지는 묻지 않았다.
가게 안에서는 종이를 펼칠 탁자가 좁았다. 르네아는 긴 자가 필요해 주머니를 열었다. 끝이 나온 덕에 손가락으로 찾기는 쉬웠다. 다만 안의 연필까지 같이 기울어져, 그녀는 급히 다른 손으로 받았다.
상인은 더 큰 주머니를 사라고 권하지 않았다. 자기 탁자 위의 작은 잔에 연필을 넣어도 좋다고 했다. 르네아는 고맙다고 하고 종이의 결을 따라 자를 댔다. 집의 모형을 감쌀 만큼 크고 접었다 펴도 쉽게 찢어지지 않을 종이가 필요했다.
그녀는 가장 매끈한 장을 뒤집었다. 뒷면에 눌린 자국이 길었다. 도면에 쓰지 않고 덮개로 쓸 것이라면 그 자국이 문제가 될지는 달랐다. 상인은 다른 묶음도 꺼냈고 르네아는 손끝으로 두 장의 모서리를 비교했다.
가게 창으로 바깥의 색이 조금 바뀌었다. 구름이 지나가는 줄 알고 그녀는 종이를 더 가까이 봤다. 결국 첫 장보다 표면이 거친 것을 골랐다. 값과 두께를 확인하고 묶어 받으니 생각보다 팔이 찼다.
문을 열자 빗방울이 돌바닥에서 튀었다.
쏟아지는 비는 아니었다. 그러나 종이는 그 정도에도 젖을 수 있었다. 르네아는 처마 안으로 되돌아와 묶음을 가슴 쪽으로 당겼다. 상인이 씌워 준 바깥 종이의 한 귀퉁이가 벌써 어두워졌다.
맞은편에 세르단이 없다는 것을 그때 봤다. 르네아는 창문 가까이 몸을 옮겼다. 문 안쪽까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심지를 고르느라 늦는 것일 수도 있었고, 다른 쪽에 잠깐 앉았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건너갈까 하다가 종이를 봤다. 서둘러 걷다 물을 맞히면 자기가 아까 고른 장부터 망칠 것이었다. 사람을 찾는 일이 곧바로 물건을 버리는 시험이 되는 것은 싫었다. 그녀는 처마 끝에서 한 발 물러났다.
그 사이 상인은 안쪽 손님에게 종이를 펴 주었다. 문이 닫히면서 그녀는 혼자 바깥에 남았다. 조금 전까지 자기가 들어 있던 방이 유리 너머가 됐다. 르네아는 팔 아래를 누르는 자 끝을 만졌다.
그가 정말 그 가게에 있는지 확인하려면 건너가면 됐다. 그런데 기다리겠다고 한 사람이 먼저 자리를 바꾸면 어떡하나. 그녀는 그 말이 누구의 약속이었는지 다시 떠올렸다. 다 보면 문 앞이었다. 자기 문 앞이라는 말은 없었다.
조금 우스웠다. 공연에서는 사람의 입구와 출구를 수없이 그리는 사람이었다. 오늘 같이 물건을 사러 나온 두 사람의 길은 서로 다른 문에서 끊겨 있었다. 그렇다고 이 일을 자기 새 장면의 좋은 재료라고 생각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비가 처마의 오른쪽에서 더 들어왔다. 르네아는 종이 묶음을 반대쪽 팔에 옮겼다. 그때 모서리가 자 주머니에 걸렸다. 그녀가 천을 조금 빼자 긴 자가 비스듬히 솟았다. 끈이 느슨해졌지만 자가 빠지지는 않았다.
“이것까지 지금 시험하네요.”
그녀가 혼자 말했다. 선물을 안 쓰고 선반에 뒀다면 불편도 몰랐을 것이었다. 르네아는 끈을 다시 둘러 종이의 바깥을 함께 감았다. 원래 용도는 아니었으나 잠깐 두 손 중 하나가 비었다.
그때 등잔 가게 옆의 낮은 통로에서 세르단이 나왔다. 그는 그녀를 보고 한 손을 들었다. 뛰지는 않았다. 벽 가까이 걸어 모퉁이를 지나온 뒤 젖지 않은 처마를 따라 섰다. 르네아는 먼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조금 화가 났다.
“저는 여기서 기다렸어요.”
세르단은 자기도 그랬다고 했다. 등잔 가게 안쪽 문에는 앉을 수 있는 작은 복도가 있었다. 그는 물건을 산 뒤 그쪽에 서 있다가 잠깐 앉았다고 했다. 종이 가게로 돌아오라는 말로 알아들었다고 르네아가 답했다.
남자는 뒤를 돌아 자기 있던 쪽을 봤다. 거기서는 종이 가게의 창은 보였지만 문은 기둥에 가렸다. 그녀가 나오면 알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말하고 미안하다고 했다.
르네아는 그가 자기 잘못을 먼저 전부 가져가는 것이 싫어졌다. 그렇다고 방금 화난 것을 없었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어디 문인지 묻지 않았다고 답했다. 잠깐 지나가는 수레의 바퀴가 둘 사이의 말을 가렸다.
“제가 안 보이면 먼저 와 줄 줄 알았어요.”
그 말이 자기 입에서 나오자 그녀도 놀랐다. 세르단은 심지를 든 손을 내렸다. 르네아는 말하고 보니 자기도 상대가 없는데 계속 자기 문 앞에만 있었다고 덧붙였다. 둘 다 기다리는 일을 같은 방향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빗소리를 조금 들었다가, 자기는 그녀가 오래 고를 줄 알았다고 했다. 혼자 고르고 싶어 들어간 가게에 빨리 따라가면 재촉하는 것처럼 보일까 싶었다고 했다. 르네아는 그 배려를 미리 알 수는 없었다고 답했다.
“맞아요. 말했어야 했네요.”
그가 말했다. 그녀는 자기도 기다리면서 자기 마음대로 그의 생각을 만들었다고 했다. 늦는 사람이 자기를 잊었다고 느낀 짧은 순간이 있었다. 실제 남자는 반대편에서 종이 고를 시간을 지켜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차이가 아름다운 오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래 서 있기 어려운 사람이 서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상자를 들고 버틴 것이라면 더 곤란했을 것이었다. 오늘은 둘 다 큰일 없이 만났지만, 르네아는 입 안에서 말을 충분히 고른 다음 꺼냈다.
“집에 바로 가고 싶은가요?”
세르단은 조금 쉬고 싶다고 했다. 등잔 가게의 의자는 빌려 앉은 것이었고 오래 있을 자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도 이 종이를 계속 들고 있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두 사람이 같은 쪽을 원하는 것은 그제야 말로 확인됐다.
가까운 밤빵 노점에는 아직 뜨거운 빵이 나오지 않았다. 주인은 이른 시간이라고 했다. 대신 처마 안의 빈 의자에 잠깐 앉아도 된다고 했다. 둘은 길을 막지 않게 의자를 나란히 두고 종이 묶음을 마른 턱에 세웠다.
세르단이 주머니를 봤다. 끈이 종이를 둘러싼 모양이 자기가 만든 것과 달랐을 것이었다. 르네아는 걸을 때 자 끝이 조금 올라오고, 묶음을 같이 안으면 연필을 꺼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남자는 오늘 돌아가 고치겠다고 했다.
“오늘 바로 안 고쳐도 돼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더 작은 덮개를 달면 자가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바느질을 대신 맡아 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남자가 자기도 먼저 어디가 움직였는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새 심지를 꺼내 보였다. 끝을 조금 잘라 쓸 것이라고 했다. 르네아는 책상이 전보다 밝아지느냐고 물었다. 세르단은 실제로 태워 봐야겠지만 지금 것처럼 자꾸 기울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 정도로 작은 외출의 목적이 다시 돌아왔다.
주인이 남은 마른 빵이 있다고 말했다. 둘은 먹을지 잠깐 눈을 맞췄다. 르네아는 배가 조금 고프다고 했다. 세르단도 같다고 답했다. 반으로 가른 빵의 겉은 딱딱했고 속은 씹을수록 부드러웠다.
그녀는 그에게 큰 쪽을 밀어 주다가 자기 쪽으로 다시 조금 당겼다. 남자가 보더니 이제는 나눌 때도 도면이 필요하냐고 물었다. 르네아는 오늘 자기 판단을 전부 믿지는 않겠다고 했다. 세르단이 웃었고 그녀도 웃었다.
비는 곧 가늘어졌다. 노점의 천 끝에서 물방울이 천천히 떨어졌다. 르네아는 길의 같은 돌이 젖은 쪽과 마른 쪽으로 나뉜 것을 봤다. 자기가 보고 싶은 풍경은 기다리는 동안에도 앞에 있었지만 그때는 전혀 안 보였다.
그 생각을 남자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아까 좀 서운했다고 다시 말했다. 그가 늦어서만은 아니었다. 함께 나왔다고 생각한 외출이 어느 순간 혼자 짐을 들고 서 있는 시간이 됐기 때문이었다.
세르단은 그럴 줄 몰랐다고 했다. 자기는 둘이 각자 가게에 다녀온 뒤 같이 돌아가는 것이 좋아서 나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르네아는 그 말이 좋았지만 처음의 서운함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웃어 버리지는 않았다.
“저도 따로 고르는 건 좋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따로 가게에 들어간 일을 취소할 필요는 없었다. 다시 만나는 자리만 같은 곳에 두면 됐다. 세르단은 다음에는 어느 문 앞인지 자기 입으로 한 번 더 말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은 손은 종이를 들 손 하나가 줄어드는 손이었다. 둘은 곧 웃으며 놓았다. 짐을 각자 나눠 들고 집으로 가야 했다. 그가 종이를 들어도 괜찮다고 해서 르네아는 절반을 건넸다.
돌아가는 길에는 누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자꾸 묻지 않았다. 모퉁이에 이르면 먼저 간 사람이 잠깐 서서 다른 사람의 얼굴을 봤다. 르네아는 남자의 걸음에 맞춘 자기 걸음도 자기 선택이라는 것을 발바닥으로 느꼈다.
집에 들어와 종이를 펼쳤을 때 젖은 것은 바깥의 한 귀퉁이뿐이었다. 안의 큰 장은 말랐다. 르네아는 덮개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를 따로 놓았다. 세르단은 자기 책상으로 심지를 가져갔다.
그녀는 갈색 주머니를 뒤집지 않고 오늘 걸을 때 끈이 움직인 곳을 손으로 짚어 봤다. 조금 전까지 서운했던 사람의 바느질이 그 안에 있었다. 둘 중 하나를 지워야 선물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문 너머에서 남자가 저녁에 주머니를 함께 봐도 되느냐고 물었다. 르네아는 좋다고 했다. 이어 오늘은 자기 문 앞이 아니라 식탁에서 만나자고 덧붙였다. 그가 웃는 소리가 벽 하나를 돌아왔다. 그녀는 처음으로 젖은 모서리를 펴면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