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너머에서 같은 문장이 세 번째 돌아왔다.
르네아는 도면의 창을 그리다 연필을 멈췄다. ‘기다린 것은 네가 아니었어.’ 남자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낮았다. 다시 의자가 움직였고 한동안 조용했다가, 이번에는 조금 빠르게 그 문장이 나왔다.
비가 아침부터 이어졌다. 바깥에 나가려던 계획은 없었지만 창을 열지 못하자 방이 작아진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 종이 위의 큰 창에 기대어 앉았다. 그림 속 방의 주인은 비를 피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세르단은 옆방에서 자기 글을 소리 내어 읽는 중이었다. 어젯밤 두 장의 낭독 뒤에 문장을 고치고 싶다고 했었다. 그녀는 오늘 각자 일할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모든 말이 들릴 것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무슨 장면인지 궁금했다. 세 번째에는 자기도 모르게 대답을 속으로 만들었다. 네 번째에는 그 문장이 아니라 자기 그림을 생각하고 싶어졌다. 르네아는 문을 보고도 바로 나가지 않았다.
함께 사는 첫날들에는 상대의 소리가 있는 것이 좋았다. 이제 시끄럽다고 말하면 그때의 기쁨이 거짓말이 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연필을 더 세게 쥐었다. 종이가 뾰족하게 눌렸다.
곧 옆방의 문이 열렸다. 세르단이 찻물을 데우려 나왔다. 르네아는 자기도 한 잔 부탁할까 하다가, 차가 필요한 것과 말을 해야 하는 것이 달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사를 읽는 소리가 잘 들려요.”
남자는 그녀를 봤다. 좋다는 말인지 확인하려는 얼굴이었다. 르네아는 오늘은 자기 그림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그가 들고 있던 빈 잔이 식탁에 내려왔다.
“제가 너무 크게 읽었군요.”
“크다기보다 벽이 얇아요. 저도 어제 몰랐어요.”
세르단은 그러면 낮게 읽겠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멈췄다. 낮은 목소리로 읽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면 자꾸 따라가게 될 것 같았다. 그에게 무조건 입을 다물라고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르네아는 자기가 어느 시간에 조용하기를 바라는지 아직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자는 자기도 실제 소리를 들어야 문장을 알 수 있다고 답했다. 두 사람은 빵을 나누던 식탁 앞에 서서 처음으로 방의 벽 두께를 의논했다.
그녀는 그의 낭독이 끝날 때까지 자기 일을 미루면 된다고 말했다. 세르단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고 했다. 오늘 고치고 싶은 줄이 여럿이고, 그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르네아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어떤 문제든 자기가 조금 더 견디면 깔끔해진다는 버릇이 작은 집에서도 모습을 바꿔 나타났다. 무대에서 하중을 떠받치던 것처럼 이번에는 자기 조용한 시간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창의 비를 보며 오전의 남은 한동안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세르단은 그 뒤 점심 전 짧은 낭독을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때 부엌에서 자기 재료를 정리할 수 있겠다고 답했다.
그것으로 하루의 모든 소리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오후에도 일이 남을 수 있었고 비가 그치면 다른 길을 고를 수도 있었다. 다만 지금은 서로 기다리는 시간을 몰래 늘리지 않게 됐다.
세르단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까 대사가 무슨 말인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르네아는 궁금하지만 나중에 묻고 싶다고 했다. 남자가 웃었다. 관객 한 사람도 매 순간 객석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이 닫혔다. 옆방에서는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그 소리까지 없앨 수는 없었고, 없앨 필요도 없었다. 르네아는 연필의 깨진 끝을 깎아 다시 선을 그었다.
그녀는 큰 방의 입구를 조금 옮겼다. 늦게 온 사람이 앞의 관객을 전부 가로질러야 들어오는 길이었다. 지금까지는 환영의 모양부터 그리느라 사람의 발이 들어갈 자리를 아주 가늘게 남겨 두었다.
입구를 옮기자 가장 보고 싶던 창이 가려졌다. 르네아는 종이를 멀리 밀었다. 예쁜 그림에서 길을 빼앗으면 그냥 벽이었다. 어제 소멜의 안감처럼 바깥의 모양을 살리려다 안의 몸을 조일 수 있었다.
그녀는 창을 버리지는 않았다. 의자의 방향을 바꾸고 빈 면을 남겼다. 연필로 그린 사람 하나가 돌아서지 않고도 들어와 앉았다. 현실에서는 훨씬 많은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종이에서는 첫 번째 질문이 바뀌었다.
정한 때가 되자 그녀가 먼저 문을 열었다. 세르단은 책상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르네아는 자기가 부엌으로 갈 참이라고 말했다. 그가 고맙다고 했다. 미안해하는 얼굴로 다시 원래 일을 허락받으려 하지 않았다.
부엌에서 그녀는 모서리가 접힌 도면들을 꺼냈다. 낡은 것과 지금도 필요한 것이 섞여 있었다. 한 장에는 첫 은빛 새의 날개가 있었다. 그녀는 그 종이를 펴다가 작은 얼룩을 발견했다.
언제 묻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눈에 거슬렸지만 그때의 실패를 기억하려 일부러 남긴 자국도 아니었다. 그녀는 종이를 털어 다른 묶음에 넣었다. 과거의 모든 물건이 의미 있는 유물이 될 필요는 없었다.
옆방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제 그녀는 그 문장이 나오기 전에 알고 있었다. 작업 중이라는 사실만으로 덜 끌려갔다. 약속한 소리에는 끝이 있었고, 자기 손에도 다른 일이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르네아는 문밖의 성인 심부름꾼에게 받을 물건을 확인했다. 낮은종을 통해 그녀에게 전해 달라는 봉투였다. 답을 기다리는 급한 심부름은 아니라고 했다.
봉투의 겉에는 그녀의 이름이 크게 적혔다. 세르단이 낭독을 멈추고 나왔다. 그녀는 누가 보냈는지 아직 모른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심부름꾼을 보내고 식탁 위에 봉투를 놓았다.
이브론이 짧은 말을 덧붙인 제작 제안이었다. 새로운 작은 공연을 검토하는 사람이 두 사람의 이름을 함께 쓰고 싶어 했다. 실제 날짜나 대가가 합의된 종이는 아니었다. 희망하는 구성을 묻는 첫 글이었다.
르네아는 자기 이름 다음에 세르단의 예전 무대 이름이 붙은 것을 읽었다. 손가락이 그 줄에서 멈췄다. 본문에는 ‘돌아온 두 사람의 춤’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녀는 즉시 거절하고 싶어졌다. 남자의 회전은 돌아오지 않았고, 두 사람은 무대 위에 세워 놓으면 모든 관객의 기대를 채우는 한 몸이 아니었다. 종이를 접으려던 손이 조금 빨라졌다.
“왜 저한테 물어보기도 전에 그렇게 닫아요?”
세르단이 물었다. 르네아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를 원래 몸으로 되돌려 세우려는 뜻이 싫다고 답했다. 남자는 그 말이 실제로 적혀 있는지 물었다.
르네아는 본문을 다시 폈다. 예전 동작을 요구하는 세부 문장은 없었다. 모호한 문구였고 그 모호함은 충분히 문제였다. 그러나 질문하기 전에 자기가 가장 두려운 답을 먼저 채웠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세르단은 그 문구가 자기도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어떤 무대를 원하느냐고 묻는 글이 온 것이라면 자기는 지금 할 수 있는 무대를 말해 보고 싶다고 했다. 옛 몸을 되찾았다고 광고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제가 보호하겠다는 말을 너무 빨리 했네요.”
르네아가 말했다. 남자는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그녀는 잠깐 놀랐다. 입 밖으로 보호하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대신 종이를 접는 손이 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미안하다고 했다. 설명으로 그 말을 길게 묶지 않았다. 세르단은 자기 이름을 써 달라고 답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먼저 둘이 각각 무얼 하고 싶은지 알아야 했다.
점심 준비를 할 때까지 두 사람은 제안에 답하지 않았다. 양파 대신 남은 채소를 끓였다. 그녀는 칼을 내려놓고 자기는 한 작품을 끝내자마자 다시 ‘두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불리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세르단이 숟가락을 멈췄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남자도 그녀의 이유를 전부 알지는 못했다. 르네아는 큰 방을 자기 이름으로 더 생각해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저와 같이 서는 게 싫어진 건가요?”
그가 물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녀는 그 질문을 농담으로 넘길 수 없었다. 르네아는 같이 서고 싶은 마음과 그 앞에 자기 이름을 두고 싶은 마음이 둘 다 있다고 답했다.
세르단은 한동안 창 쪽을 봤다. 르네아는 그가 실망한 것인지 생각하는 것인지 단정하지 않았다. 남자는 자기도 지금 쓰는 글을 두 사람의 후속작으로만 팔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녀는 조금 웃을 수 있었다. 같은 방향을 고르는 데에도 서로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남자가 원하던 것은 곧바로 공동 출연을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문을 자기 손으로 열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봉투를 각자의 방으로 가져가지 않고 식탁 끝에 놓기로 했다. 그녀에게 온 글이므로 답은 그녀가 쓰되, 그의 이름과 동작에 관한 말은 그가 직접 고르기로 했다. 오늘 안에 결론을 주기로 한 약속도 없었다.
오후에는 비가 잦아들었다. 세르단이 자기 글을 다시 보러 들어갔다. 르네아는 문설주에서 낮에 고른 조용한 시간을 다시 쓸지 물었다. 남자는 이제 소리 내지 않고 줄을 옮겨 볼 참이라고 했다.
그녀는 자기 방에서 도면을 폈다. 봉투의 문구가 머릿속에서 자꾸 남았다. 돌아왔다는 말은 떠나야 했던 사람을 제자리로 놓아 버리기 쉬웠다. 그러나 두 사람은 예전 무대가 아닌 지금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큰 방의 한쪽에 아직 이름을 쓰지 않았다.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처음에는 결함처럼 보였다. 이제는 무엇을 제안할지 스스로 묻는 자리였다. 그녀는 종이의 접힌 끝을 낮게 눌렀다.
저녁 전에 세르단이 작은 쪽지를 가져왔다. ‘저는 돌아온 춤보다 지금 시작하는 대사를 보여 주고 싶습니다.’ 아직 보내는 답이 아니라 자기에게 할 말을 적은 문장이었다.
르네아는 자기 종이도 보여 줬다. ‘환영의 크기보다, 늦게 온 사람이 볼 수 있는 장면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두 문장은 같은 작품의 소개처럼 잘 붙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 어긋남이 오늘은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함께 답을 써 볼까 물었다. 르네아는 내일 아침에 각자의 뜻을 읽고 난 뒤 그러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생각이 너무 뜨거웠다. 종이를 말리는 것처럼 말도 잠깐 놓아두고 싶었다.
그날 밤 둘은 부엌에서 나란히 차를 마셨다. 바깥의 비는 그쳤고 처마에서 물이 간헐적으로 떨어졌다. 르네아는 아까 들었던 대사의 뒤가 궁금해졌다고 말했다.
세르단은 기다린 것이 사람이 아니라 문을 열 용기였다고 답했다. 르네아는 그 인물이 결국 문을 여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아직 쓰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결말을 서둘러 달라고 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르네아는 식탁 끝의 봉투를 한 번 더 봤다. 종이는 이제 접혀 있었지만 거절한 답은 아니었다. 내일은 사랑하는 사람을 대신하지 않고, 그 사람 곁에서 자기 욕망을 쓰는 일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