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보인 것은 세르단의 모자가 아니라 빈 의자였다.
오르사의 선착장에는 짐을 기다리는 의자가 두 줄 있었다. 르네아는 상자를 맡긴 표를 손에 쥔 채 그 사이를 걸었다. 오르사에 온 뒤 전날 추가로 받은 답장에는 오늘 배로 오겠다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제일 가까운 출구에서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배에서 내린 뒤 좁은 통로를 돌아 다른 쪽으로 나왔다.
세르단은 그 끝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를 보고 손을 들었다. 르네아는 반가워서 빨리 걷다가 화물꾼의 앞을 막을 뻔했다. 한 발 비켜 기다리는 사이 남자가 일어서려 했다. 그녀가 손을 들었다. 그대로 있어도 자기가 간다는 뜻으로, 말을 덧붙였다. 무대의 정지 신호가 아니라 사람이 많은 길에서 하는 부탁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가까이 가서 한 첫말이었다. 세르단도 같은 말을 했다. 그가 손을 내밀자 르네아는 잡았다. 배의 난간을 오래 쥐었던 손이 차가웠다. 그녀는 따뜻하게 해 줄 것을 찾는 대신 지금 안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앉아서라면 좋겠다고 했다. 그녀는 옆 의자에 가방을 놓고 몸을 기울였다. 외투의 단추가 자기 턱에 닿았다.
그를 기억한 몸은 바로 가까워졌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는 순서는 달랐다. 르네아는 먼저 짐을 들고 앞으로 나가다가 옆이 빈 것을 알아차렸다. 세르단은 의자 앞에서 잠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오늘은 흔들리는 배에서 내린 뒤 바로 걷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녀는 돌아와 섰다. 길을 잘 아는 사람이 된 것이 먼저 갈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는 오르사에 나흘 먼저 도착했다. 방문 점검은 이틀 전 마쳤다. 공방 전시실의 바닥 한쪽은 작업대의 진동을 그대로 받았다. 돌을 새로 깔거나 구리실을 옮길 수 있는지는 목공의 추가 확인이 필요했다. 약속한 방문과 점검은 끝났지만 관람을 열겠다는 답은 하지 않았다. 세르단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방이 그를 위해 준비된 무대가 되지는 않았다.
그 이야기를 걸으면서 다 하려니 자꾸 속도가 났다. 그녀는 저 앞의 창문을 가리켰다가 남자가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을 봤다. 그는 눈을 그쪽으로 빨리 옮기면 어지럽다고 말했다. 르네아는 손을 내렸다. 잠깐 멈춰 서서 보고 싶은지 묻자, 그는 숙소에 먼저 가고 싶다고 답했다.
“제가 안내하는 길도 처음이네요.”
그녀가 말했다. 남자는 길보다 설명이 빠르다고 답했다. 웃음이 났다. 에스카렌에서는 남자가 자기보다 길을 잘 알았다. 그녀는 전시실과 숙소 사이를 혼자 다닌 나흘의 속도를 그대로 들고 있었다. 그는 오늘 막 도착한 사람이었다. 길이 맞아도 보폭은 새로 정해야 했다.
세르단의 숙소는 그녀가 묵는 공방 별실과 달랐다. 자신의 목공 보수에서 여행 경비를 따로 남겨 방을 구했다고 했다. 르네아는 방문 점검에 붙은 숙박을 그에게 나눠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공방의 방은 의뢰로 온 작업자에게 준 것이었다. 남자는 짐을 맡기고 정한 시각까지 쉬기로 했다. 그녀는 저녁에 가까운 광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방을 나오며 조금 서운했다. 오래 기다린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떨어졌다. 그가 오기 전에 일도 마쳤으니 오늘 몇 시간은 통째로 자기 것처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르네아는 공방으로 가는 길에서 작은 배를 샀다. 씹어 보니 단맛보다 껍질의 향이 먼저 왔다. 그에게 사다 줄지 묻지 않았다는 생각에 웃었다. 아직 자기 것 하나를 먹는 낮이었다.
저녁에는 남자가 먼저 광장에 나와 있었다. 앉을 곳과 고정된 불빛이 있는 작은 찻집을 골랐다고 했다. 르네아는 그가 자기에게 먼저 선택지를 줬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두 사람은 창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았다. 종업원이 잔을 내려놓고 나간 뒤, 그녀는 가방에서 짧은 편지를 꺼냈다.
종이의 가장자리가 조금 닳아 있었다. 왜 그렇게 오래 읽었느냐고 그가 물었다. 르네아는 웃음이 없어서 더 읽었다고 답했다. 말하고 나니 민망했지만 접지는 않았다. 자기가 먼저 골랐던 이유들까지 설명했다. 피곤해서, 화가 나서, 자기 공연보다 다른 일이 중요해져서일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였어요?”
세르단은 종이를 봤다. 그날 작업이 늦게 끝났고 배에 우편을 싣기 전에 보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짧아진 이유가 전부 시간 때문은 아니었다. 낭독에서 자기 문장이 막혔고 그 이야기를 쓰려다 말았다고 했다. 좋은 소식부터 보내고 싶어서 잘 지내라는 인사로 덮었다는 말이었다.
르네아는 바로 자기는 나쁜 소식도 괜찮다고 답하려다가 기다렸다. 남자는 편지에 못 쓴 이야기가 그것이라고 했다. 자기 대본을 읽은 동료가 문 앞에 사람이 왜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고, 그는 그 순간 설명을 너무 오래 했다고 했다. 상대가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쪽으로 설명하다 보니 자기가 쓴 두 쪽보다 변명이 길어졌다고 했다.
“르네아 씨한테도 그걸 다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 들었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서운하게 나왔다. 세르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들어도 된다고 말해 줘야 쓰겠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했다. 자기가 고르지 못한 것을 종이에 남겨 놓은 셈이라고 했다. 르네아는 다음 편지를 꼭 길게 써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말을 못 골랐다는 한 줄이 있었으면 덜 추측했을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그렇게 써 볼 수 있겠다고 했다. 매번 가능할 거라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르네아는 자신도 짧은 편지를 받으면 바로 정답을 만들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오늘처럼 물을 수는 있지만, 기다리는 며칠이 없던 일은 아니라고 했다. 남자는 그 며칠에 미안하다고 답했다. 그녀는 미안함으로 편지를 다시 길게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차는 이미 반쯤 식어 있었다. 르네아가 마른 종이의 소리를 흉내 냈다. 세르단은 잔을 내려놓고 웃었다. 그 소리가 그렇게 크냐고 물었다. 그녀는 크기보다 끝이 서로 닿는 때가 불규칙하다고 했다. 물이 떨어지는 날에는 종이보다 통이 더 크게 울었다. 남자는 그럼 종이 이야기가 아니라 통 이야기도 가져온 셈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좋아서 그녀는 말을 조금 더 했다. 관객이 줄어든 날과 자기 이름으로 인사한 순간, 도렌이 입구 그림을 고쳐 보자고 했던 일을 이야기했다. 세르단은 중간에 자기 장면과 닮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도 그의 첫 낭독의 실패를 자기 경험으로 고치지 않았다. 다른 도시에서 각자 가져온 이야기가 탁자 위에 나란히 놓였다.
그때 남자가 접힌 종이를 꺼냈다. 오르사에 오는 다른 이유가 하나 있다고 했다. 돌계단에서 함께 읽었던 동료 배우가 이곳의 정기 낭독 모임을 소개했고, 그는 출발 전에 편지로 빈 시간을 물었다. 담당자는 짧은 장면을 보여 줄 수 있는 낮을 하나 정해 줬다. 표를 파는 공연이 아니라 초대받은 몇 사람이 보고 의견을 말하는 자리였다.
방 사용료와 읽는 배우의 보수는 그가 부담했다. 아직 객석이 찬 것도, 공개 연출자로 초청받은 것도 아니었다. 르네아는 그 설명에서 배삯을 낼 수 있었던 이유를 새로 찾으려 하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자기 일도 해 보려고 따로 준비한 사람이 지금 맞은편에 있었다. 자기를 만나는 일이 줄어든 것과는 달랐다.
“언제예요?”
“모레 낮입니다. 내일은 같이 읽을 분과 방을 확인하고요.”
그녀는 보고 싶다고 했다. 남자는 자기에게 직접 신청할 일은 아니지만 담당자에게 자리가 있는지 묻겠다고 했다. 그녀는 알겠다고 답했다. 제일 앞에 앉겠다는 말도, 끝나고 잘됐다고 해 주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끝난 뒤 저녁은 같이 먹고 싶다고 했다. 그 약속은 그가 바로 좋다고 답했다.
찻집을 나와 공방 쪽으로 걸었다. 이번에는 르네아가 속도를 묻지 않았다. 남자가 조금 느리게 가겠다고 먼저 말했다. 그녀는 자기 팔을 내밀지 않고 옆에 섰다. 손을 잡는 것과 몸을 받치는 것은 같지 않았다. 세르단이 손을 잡고 싶다고 하자 그녀는 쥐었다. 두 사람의 걸음 사이에 짧은 간격이 남았다.
다리 앞에서 그녀가 멈췄다. 이곳에는 계단 대신 옆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낮에는 혼자 늘 계단을 올랐다. 세르단은 돌아가는 쪽을 골랐다. 르네아는 그 길을 아직 가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자가 그러면 오늘 둘 다 처음이라고 답했다. 그녀는 자신이 모든 길을 안내할 필요가 없는 것을 그제야 좋아했다.
돌아간 길에는 작은 수선 가게가 있었다. 문을 닫는 여자가 의자 두 개를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한 의자는 다리가 짧아 바닥에 닿을 때 다른 소리를 냈다. 세르단은 그 소리를 듣고 자기 대본 속 문이 너무 조용하다고 말했다. 르네아는 어떤 문인지 물었다. 그는 닫히는 소리를 배우의 말로만 설명했는데 실제 문을 써 보면 다를지 모르겠다고 했다.
“제가 환영으로 만들어 드릴까요?”
말이 먼저 나갔다. 그녀는 웃었다. 그의 눈도 웃었다. 아직 부탁하지 않은 문이었다. 르네아는 제안을 거두고 실제 문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그가 물어볼 수 있겠다고 말했다. 남자는 지금은 이미 방에 있는 문을 먼저 보겠다고 답했다. 새로 만드는 것보다 그게 자기 장면에 맞는지부터 보겠다는 말이었다.
공방 앞에 닿았을 때에는 어둠이 내려 있었다. 문 위의 등불은 실제 불이었다. 르네아는 오늘 만남의 끝을 늦추고 싶었다. 세르단도 바로 돌아서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맞추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잠깐 앉을 자리를 봤다. 공방 앞 낮은 벤치에 앉고 나서 둘은 가까워졌다. 오래 떨어져 있었다고 낯선 입술은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웃었다.
남자가 왜 웃느냐고 물었다. 르네아는 자기가 오늘 너무 빨리 걸었다고 했다. 세르단은 돌아가는 길이 마음에 들었다고 답했다. 그녀는 그 길이 더 좋은 길이라고 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 혼자라면 계단을 오를 수도 있었다. 오늘은 그와 다른 길을 알게 된 것이 좋았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뒤 그녀는 가방에서 편지를 꺼냈다. 종이가 갑자기 긴 편지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제 그날 작업이 끝난 시각과 쓰지 못한 문 앞의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종이를 펴 놓고 내일 볼 방의 위치를 수첩에 적었다. 그의 일을 대신 준비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레 자기가 갈 길을 알아 두려는 기록이었다.
다음 날 아침, 공방 목공이 점검한 바닥의 답을 가져왔다. 지금 쓰는 전시실에는 관객이 서는 동안 종이 작업을 멈춰도 진동이 남는다고 했다. 르네아는 관람을 열지 않겠다는 말을 직접 전하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낭독 방의 문이 열려 있었다. 세르단의 목소리가 안에서 나왔다. 제 대사를 설명하지 않고, 한 번 더 읽어 달라고 부탁하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