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위에 편지지를 놓으니 뚜껑이 닫히지 않았다.
르네아는 제일 위의 두꺼운 묶음을 꺼냈다. 메르딘에게 받은 화물칸 치수에 맞추느라 상자는 이미 한 번 작아졌다. 실제 틀과 고정 부품, 갈아 쓸 구리실이 먼저 들어갔다. 종이를 절반만 챙겨도 충분할 것 같았지만, 매일 한 장씩 쓰면 모자랄 것 같았다. 아직 매일 쓰겠다고 정한 사람은 없었다.
남쪽 도시 라겔의 전시장에서는 사흘간 짧은 관람을 열기로 했다. 그 전에 바닥을 보는 날과 설치할 날이 있었다. 메르딘이 중개한 첫 의뢰서에는 그 시간과 비용이 이미 나뉘어 있었다. 여기에 며칠 전 근처 오르사의 종이 공방 전시를 살펴보는 일정이 하나 더 생겼다.
처음부터 두 도시를 약속한 일은 아니었다. 라겔의 전시장 측이 이웃 공방의 문의를 전했고, 르네아는 따로 답장을 받았다. 처음 방에서 쓴 모양을 그대로 옮기라는 부탁은 거절했다. 오르사에서 직접 공간을 보고 조건이 맞을 때만 관람을 정하되, 방문과 점검의 보수는 열리지 않아도 지급하기로 했다. 상대가 서명한 사본과 그 준비금을 확인한 뒤에야 둘째 도시를 여정에 적었다.
관람이 정해졌다고 쓸 수 있는 곳은 아직 라겔뿐이었다. 그곳도 현장 조건이 틀리면 켜지 않을 수 있었다. 이동과 숙박은 각 의뢰 쪽에서 나눠 맡고 같은 구간의 배값을 두 번 청구하지 않도록 적었다. 르네아는 실제로 쓰기 전인 제작비와 자기 생활비를 다른 봉투에 넣었다. 낮은종에 남은 마지막 분담금도 이미 번 돈에서 따로 남겼다.
그 계산 뒤에 자기 물건을 넣으니 속옷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웃음이 나서 상자 뚜껑에 이마를 댔다. 무대보다 사는 일이 부피를 작게 줄여 주지는 않았다. 결국 도면을 작은 가방으로 옮겼다. 녹색 끈을 다시 묶고, 두꺼운 편지지는 절반으로 나눠 넣었다.
세르단은 출발 전날 해가 내려갈 무렵 왔다. 두 사람이 길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비가 와서 르네아의 작업방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녀가 들어오라고 하자 남자는 젖은 외투를 문 옆에 걸었다. 방에 앉을 의자는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자기 침대를 가리키지 않고 아래층에서 의자를 빌려왔다.
그는 집게 두 개를 가져왔다. 남쪽에서 종이 묶음을 말릴 때 쓸 만한 금속 집게였다. 사 온 물건이며 새 틀을 만들어 준 것은 아니라고 했다. 르네아는 그 설명이 우스웠다. 그래도 고맙다고 했다. 자기가 부탁하지 않은 큰 제작물보다 가방 안에 들어가는 집게 두 개가 반가웠다.
“종이 마당 이야기를 아직 안 들었잖습니까. 그때 종이를 날리시면 안 되니까요.”
그가 말했다. 그녀는 마당의 종이를 빼앗아 올 생각은 없다고 답했다. 두 사람은 웃었다. 웃음이 끝나자 방의 작은 상자들만 남았다. 여기에서 바닥을 펴 놓고 일하던 사람이 내일은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세르단은 이 도시에 남았다.
그는 돌계단에서 자기 글을 읽어 볼 자리를 정했다고 말했다. 다음 주 오전 한 번, 평소 낭독에 쓰지 않는 작은 방이었다. 방 사용료는 자기가 부담하고, 동료 배우 한 명에게 정한 읽기 보수를 주기로 했다고 했다. 공연 표를 팔거나 공개 연출을 맡은 것은 아니었다. 문이 닫힌 장면 두 쪽을 먼저 읽고 몸의 동선까지 확인해 볼 예정이었다.
르네아는 같이 읽어 주겠다고 할 뻔했다. 날짜는 그녀가 떠난 뒤였다. 남자는 그것을 몰라서 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기 애인에게 먼저 보이지 않은 초안을 읽어 볼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누가 읽느냐고 물었다. 세르단은 지난 낭독의 상대 배우가 시간이 맞아 동의했다고 답했다.
“잘됐다 싶고, 제가 못 듣는 건 아쉬워요.”
“저도 라겔에서 같은 말을 할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르네아는 옆의 상자를 봤다.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마지막으로 묻고 싶었다. 지금 물으면 거절을 번복하게 할 질문이 될까 봐서만은 아니었다. 그가 갈 마음이 있었다면 그 마음을 이야기할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싶었다.
남자는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이번에는 남아서 시작하고 싶다고 먼저 말했다. 조건을 하나 더 주면 따라가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르네아는 알겠다고 했다. 마음에 꼭 드는 답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자기 없는 곳을 원한다는 말을 사랑이 줄었다는 뜻으로 고쳐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저녁은 아래층 식당에서 먹었다. 비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르네아는 라겔의 주소를 적은 작은 종이를 건넸다. 라겔에 도착해 점검하고 설치하는 날부터 사흘의 관람을 모두 마칠 때까지 전시장 옆 숙소를 쓰기로 했다. 오르사로 가는 배는 그 뒤였고, 그곳의 관람 여부는 방문 점검 뒤에 정할 일이었다. 우편이 늦으면 전시장에 맡긴 것을 나중에 찾기로 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도시에서 같은 밤을 산다고 편지가 같은 밤에 닿는 것은 아니었다.
“매일 쓰면 좋을 것 같다가, 짐이 넘쳤어요.”
그녀가 말했다. 세르단이 얼마나 넣었느냐고 물었다. 르네아는 가져온 절반의 두께를 손으로 보여 줬다. 남자는 오래 머물 생각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날짜보다 잉크가 먼저 늘었다고 답했다. 웃고 나니 다른 말을 할 수 있었다.
“꼭 매일 써야 하면, 어떤 날은 기다리지 말라는 편지만 쓰겠죠.”
세르단은 그건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바쁘면 다음 날에 쓰고, 보내고 싶은 것이 없으면 쉬어도 좋다고 말했다. 르네아도 같은 조건을 원했다. 대신 이동하는 날과 받는 주소가 바뀌는 일은 알려 주기로 했다.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소식은 기왕이면 짧게라도 보내고 싶었다. 편지를 안 쓴 날의 마음을 물으면 말할 수는 있지만, 횟수로 점수를 매기지 않기로 했다.
그런 말을 나눠도 그녀는 답장이 빨리 오면 좋아할 터였다. 빨리 왔다고 모범적인 연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반가움까지 고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자기 수프 그릇을 남자의 것 가까이에 놓았다. 지금은 전달할 말이 이 탁자를 건너면 닿았다. 그 짧은 거리가 새삼 아까웠다.
식사 뒤 세르단은 그녀를 방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르네아는 문 앞에서 잠깐 안고 싶다고 말했다. 남자가 좋다고 답했다. 둘은 출입을 막지 않는 안쪽 바닥으로 옮겼다. 그의 외투는 아직 조금 축축했다. 그녀는 그 냄새를 남겨 가려고 깊이 들이마셨다가, 그럴 필요 없이 지금 안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선착장에서 봐요.”
팔을 푼 뒤 그녀가 말했다. 그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날 밤에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배를 타기 전의 아쉬움으로 아직 정하지 않은 생활을 먼저 시작하지는 않았다. 르네아는 의자를 아래층에 돌려주고, 혼자 방에 올라와 마지막 불을 껐다.
아침에는 바람이 맑았다. 메르딘이 보내 준 화물꾼이 상자를 셌다. 배에서 내린 뒤 전시장 직원이 받을 이름도 확인했다. 별도 조수는 현지 직원 도렌이었다. 경력과 맡을 범위를 편지로 확인했지만 실제 신호와 받침 점검은 도착해서 맞춰야 했다. 르네아는 그 시간을 설치 속에 숨기지 않고 준비 일당으로 적어 둔 것을 다시 봤다.
펜은 출근 전에 들렀다. 남쪽에 가지 않는다고 이쪽 배의 줄까지 매어 줄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상자 끈이 풀려 있다고 말하고 그녀가 묶는 것을 기다렸다. 돌아올 때 자신이 하는 작은 연습을 보여 주고 싶다고 했다. 르네아는 보고 싶다고 답했다. 아직 그가 혼자 환영을 다루는 미래를 벌써 이뤘다고 부르지는 않았다.
메르딘은 첫 전시장 담당자에게 보낼 사본을 건넸다. 르네아는 설치 전 점검에서 형상이 줄어들거나 취소될 수 있다는 문장이 같은지 확인했다. 여자는 잘 다녀오라는 말 뒤에 자기 답을 미루지 말고 보내 달라고 했다. 성공한 소식만 골라 전하라는 부탁이 아니어서 르네아는 편했다.
세르단은 배가 닿기 전에 왔다. 빠르게 달려오지 않았고 지팡이도 들지 않았다. 오늘은 천천히 걸으면 괜찮다고 직접 말했다. 그녀는 그 한 번의 걸음으로 이후의 날까지 정하지 않았다. 남자가 선착장의 움직임이 어지러워 안쪽 돌의자에 앉겠다고 하자 함께 자리를 옮겼다.
배의 돛이 시야에서 반쯤 가려졌다. 르네아는 지금 어디를 봐야 그의 얼굴과 자기 배를 동시에 볼 수 있는지 생각했다. 두 방향을 한 번에 잡으려니 목만 뻣뻣해졌다. 그녀는 남자를 먼저 봤다. 오늘도 문 앞의 대본을 고칠 것이냐고 물었다. 세르단은 그렇지만 낮에는 실제 돈을 받는 목공 일도 있다고 답했다. 연출을 시작해도 방세가 줄지는 않았다.
그녀는 남쪽에서 바닥이 도면과 다르면 먼저 자기 눈을 믿겠다고 했다. 남자는 자기 판단을 믿으라는 격려 대신 그때 어떤 것을 봤는지 나중에 듣고 싶다고 말했다. 르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된 결과를 가져와야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도 되느냐고 묻고 잠깐 잡았다.
마지막 승선 안내가 왔다. 그녀는 배에 올랐고 화물칸과 객실을 나누는 좁은 문을 지났다. 선착장의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손을 들었다. 르네아는 손을 흔들었다. 배가 떠나자 더 오래 보려고 옆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그도 따라 걷지 않았다. 각자의 바닥에 선 사람들이 조금씩 멀어졌다.
첫날 물 위에서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잉크가 한쪽으로 몰렸다. 르네아는 창밖의 버드나무와 다른 배들의 밧줄을 봤다. 하루의 전부를 세르단에게 설명할 문장으로 바꾸려 하니, 아직 보고 있는 풍경이 벌써 지난 일이 됐다.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잠깐 눈으로만 여행했다.
다음 날 라겔에 닿았다. 전시장 직원이 이름을 확인한 뒤 상자를 숙소까지 옮겼다. 지붕 아래에 실제 종이들이 길게 걸려 있었다. 마당은 전시장 뒤에 있어 오늘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르네아는 나중에 물어보겠다고 답했다. 보고 싶은 것이 도착한 날 모두 허락될 필요는 없었다.
도렌은 짐을 옮긴 뒤 내일 어느 손을 먼저 보면 되느냐고 물었다. 르네아는 우선 목공과 바닥부터 볼 것이라고 답했다. 조수는 자기 일이 그 뒤에 있는 줄 알았다며 웃었다. 그녀는 받침을 볼 자리를 고를 때부터 같이 있어 달라고 했다. 그가 관객을 맞던 위치에서는 받침 하나가 가려질 수도 있었다. 도렌은 내일 일당이 시작되는 시각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에스카렌에서 펜이 서던 자리를 말로 옮겨 놓는 것으로 새 사람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내일 그가 먼저 보여 줄 길을 적었다.
숙소의 창에서는 에스카렌의 운하 대신 낮은 제방이 보였다. 세르단의 도시에 지금 어떤 빛이 있는지 몰랐다. 그녀는 짐을 푼 뒤 도착했다는 짧은 편지를 썼다. 바닥 점검은 내일이며 아직 환영은 켜지 않았다는 말도 넣었다. 그 아래에는 배에서 편지보다 풍경을 먼저 봤다고 적었다. 남자가 좋아할 답일지 미리 고치지 않았다.
봉투를 맡기고 돌아온 방에는 혼자 쓸 의자가 있었다. 르네아는 뚜껑을 열어 도면을 꺼냈다. 집게 두 개가 녹색 끈 옆에서 부딪쳤다. 그녀는 하나로 종이를 고정하고, 하나는 가방에 남겼다. 남자의 물건이 여기 있다고 함께 있는 척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 그가 없는 도시에서 처음으로 자기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