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구애가 이루어진 날.’
르네아는 종이를 한 번 더 읽었다. 어제 선창 공연을 알리던 자리였다. 행사 담당자가 다음 달 목공 모임 안내 옆에 작은 후기를 붙여 놓았다. 짐배 위 공연을 방 안으로 옮겼다는 말은 없었고, 손바닥만 한 빛도 종이에는 없었다. 대신 그녀와 세르단의 이름 위에 커다란 구애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빌린 운반 끈 하나를 돌려주러 왔다. 가방 바닥에 남은 것을 아침에 발견했다. 세르단은 낮은종에서 자기 목공 일을 하고 있었고, 펜도 오늘 다른 데서 일했다. 혼자 선창에 와서야 어제 두 사람에게 없던 문장을 혼자 마주했다.
“두 분 얘기가 좋아서요.”
담당자는 종이를 보여 주자 그렇게 말했다. 별 생각 없이 썼다는 웃음이었다. 다른 가게에서 행사 소식을 붙여 주겠다며 같은 문장을 두 장 가져갔다고 했다. 도시 전체에 퍼진 소문은 아니었다. 당장 가서 가져올 수 있는 두 장과 눈앞의 한 장이었다.
르네아는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아직 연인이 아니고, 사적으로 만난 적은 있지만 어제 한 말은 대본이며, 그전에 입을 맞춘 일은 누구에게 설명할 이유가 없고. 머릿속에 문장들이 몰렸다. 설명을 길게 할수록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더 많은 빈칸이 생길 것 같았다.
그녀는 손에 든 끈을 먼저 돌려줬다.
“공연 속 인물들이 함께 나가는 장면이었어요. 배우들의 사적인 일을 알리는 말로 쓰진 말아 주세요.”
담당자가 종이를 다시 읽었다.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아니라고 했다. 르네아는 의도보다 종이에 적힌 문장을 가리켰다. 그녀는 어제 장면을 좋게 봐 준 것을 지우자고 온 것이 아니었다. 이름 위의 구애가 실제 두 사람의 관계를 대신 설명하는 것이 싫었다.
여자는 못을 빼 종이를 내렸다. 다음 안내에는 공연 이름과 장소만 쓰겠다고 했다. 르네아는 이미 가져간 두 장도 고쳐 달라고 부탁했다. 담당자는 직접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녀는 가게 이름을 듣고 그날 안에 회수했는지 알려 달라고 했다. 아직 하지 않은 정정이 끝난 일인 척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선창을 나오자 바람에 외투 자락이 들렸다. 그녀는 순간 웃음이 났다. 사랑을 말하려고 하면 자꾸 다른 일을 먼저 하게 됐다. 대본을 고치고, 실을 닦고, 남이 붙인 말을 떼러 오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한 번도 인쇄소에 맡긴 적이 없는데 종이가 더 먼저 알아본 사람처럼 붙어 있었다.
낮은종 앞에는 그림장이가 와 있었다. 완성한 초상의 작은 종이 본을 가져왔다. 세르단이 고른 두 번째 얼굴이었다. 남자는 웃지 않고 상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르네아의 빈 손이 그림 아래에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거리가 처음 봤을 때는 덜 보였는데 오늘은 제일 먼저 보였다.
“문구는 아직 안 넣었습니다.”
그림장이가 말했다. 르네아는 그 말이 반가워 너무 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이상하다는 듯 보자, 그녀는 선창의 종이를 간단히 이야기했다. 그림장이는 얼굴을 그리는 것과 그 얼굴에 말을 붙이는 일은 다르다며 종이 아래를 비워 두었다.
“그림은 마음에 드세요?”
르네아는 손으로 종이 가장자리를 눌렀다. 남자의 눈길 끝에 자기 얼굴이 있었다. 세르단이 실제로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는 그림이었는데 그녀는 자꾸 자기 쪽으로 읽었다. 그가 보고 싶다고 말했던 일과 어제 어깨를 가까이 둔 일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네. 이 얼굴이 좋아요.”
그녀가 답했다. 그림장이가 어느 쪽이냐고 묻자 르네아는 두 사람 다라고 했다. 조금 늦게 보탠 말이라 여자가 웃었다. 르네아는 굳이 취소하지 않았다. 종이 속 자기 얼굴도 나쁘지 않았다. 사랑받으려면 늘 실을 잡은 손부터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얼굴보다 편했다.
세르단은 로비 서랍 앞에 앉아 있었다. 덮개는 제자리에 붙었고 손잡이가 새 구멍에서 반듯하게 나왔다. 그는 그림을 보고 먼저 다벨에게도 보여 주었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전달하기 전에 당사자 둘이 볼 차례라고 했다. 완성본의 인쇄 수와 쓰는 곳은 행사나 공연이 정해져야 정할 일이었다.
세르단은 그림을 오래 봤다. 자기 얼굴보다 르네아의 손 가까이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녀는 어디를 고치고 싶은지 물어볼까 하다가 기다렸다. 그가 그림 속 여자의 엄지가 너무 안으로 말려 있다는 말을 했다. 르네아는 실제로 손을 펴 봤다. 긴장하면 그렇게 됐다.
“이대로 둘래요.”
그녀가 말했다. 세르단이 고개를 들었다.
“전 여기서 긴장했으니까요.”
그림장이는 알겠다고 했다. 매끈한 손을 갖고 싶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 섰던 몸에서 자기가 기억하는 모양 하나를 빼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종이 본을 두고 그림 도구를 챙겨 갔다. 르네아는 그 뒤에야 선창에서 있었던 일을 세르단에게 전했다.
남자는 자기 이름 위에 놓인 문구를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가 싫어할까 걱정하다가, 당장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는 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아침에 그랬다. 그녀는 담당자가 회수하기로 한 두 장까지 설명했다.
“우리 얘기를 전부 해 줘야 고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제 얘기도 거기까지로 부탁드리고 싶군요.”
“혹시 당신은 달랐을까 봐요. 사람들 앞에서 웃고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웃을 수는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고치고 싶었을 겁니다.”
르네아는 그 차이를 들었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잘 웃는다고 무엇이든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자기는 남자의 오래된 얼굴을 종이에서 내리는 일을 보면서도 아직 실제 웃음이 무엇을 숨기는지 먼저 추측할 때가 있었다. 지금은 물었고 대답을 들었다.
오후에는 두 사람이 각자의 일을 했다. 르네아는 선창에서 가져온 실을 손질했다. 짧게 잘라 쓰고 남은 조각은 한쪽 칸에 모았다. 다음 무대에 길이를 보태 쓰려면 다시 고정할 수 있는 매듭인지 확인해야 했다. 세르단은 서랍의 나무 가루를 털고 이브론에게 손잡이를 잡아 보라고 했다.
이브론은 덮개를 세 번 열었다 닫았다. 전에는 끝을 들고 밀어야 했는데 이제 손잡이로 움직였다. 그는 서랍이 이렇게 가벼웠느냐고 했다. 세르단은 서랍은 그대로고 손잡이가 생겼을 뿐이라고 답했다. 르네아가 웃었다. 이브론도 자기 말을 듣고 웃었다. 남자는 옛 무대 말고도 이렇게 짧게 사람을 웃길 수 있었다.
그녀는 잘 손질된 실을 감으며 그 목소리를 들었다. 자기가 그를 좋아하게 된 까닭을 전부 나열해 보면 어떤 사람이 나올까 생각했다. 실을 놓는 시간을 기다려 준 사람, 못 걷는 길을 말한 사람, 빵을 수프에 너무 많이 넣은 사람. 목록이 길어져도 실제 남자의 하루보다 길어질 수는 없었다.
목록 바깥의 것을 알고 싶다는 쪽이 더 가까웠다.
그가 공연을 하나 고르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녀는 그 선택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공연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다. 수프가 짠지 물었을 때도 정답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물으면 남자가 어떤 얼굴로 대답하는지 또 보고 싶었다.
르네아는 실 끝을 너무 세게 당겼다. 매듭이 손가락을 눌렀다. 그녀가 손을 풀자 세르단이 맞은편에서 봤다. 괜찮으냐는 질문에 피부만 눌렸다고 답했다. 그는 물을 마시러 가며 자기 잔도 가져갈지 물었다. 그녀는 지금 한 잔 마시겠다고 했다.
그는 물을 건넸다. 아무 말 없이 꺼내 주는 잔을 받는 것보다 자기 목마름을 묻는 말이 먼저 있었던 것이 좋았다. 르네아는 그걸 좋아한다고 지금 말해 버릴까 했다. 그러면 선창의 종이 때문에 급해진 것처럼 들릴까. 그보다 더 싫은 것은 남자가 또 자기를 도와준 공로를 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 일 끝나면 잠깐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세르단은 손의 천을 내려놓았다.
“네. 저도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르네아는 잔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미리 골라 보지 않았다. 그러려고 애쓰다가 결국 선창 문구와 초상과 자신의 빈손을 차례로 떠올렸다. 남자가 자기도 할 말이 있다는 말을 한 것만으로 오후가 길어졌다.
해가 낮아질 무렵 선창 담당자가 직접 왔다. 가게 두 곳의 종이를 회수해 접어 가져왔다. 세 장을 함께 보여 주고 새 안내에는 공연자 이름과 짧은 공연을 보았다는 내용만 넣겠다고 했다. 르네아는 새 문장까지 읽었다.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말은 없었다.
세르단도 같이 봤다. 그는 고맙다고 답하고 옛 종이를 도로 붙이지 말아 달라고 했다. 담당자는 그러겠다고 했다. 사과가 길어지자 르네아는 어제 아이가 배를 들었던 장면은 자기도 좋았다고 말했다. 실수를 고친 뒤에도 공연을 좋아한 마음까지 거둘 필요는 없었다.
여자가 떠나고 극장 일도 끝났다. 이브론은 앞문을 잠그기 전에 안쪽 문 열쇠를 두 사람에게 맡겼다. 아직 밝으니 로비에서 이야기하고 나올 때 안문으로 나가면 됐다. 관객도 조수도 없는 자리였다. 르네아는 작업대에서 초상을 들고 오려다 그만뒀다. 이야기할 때 볼 얼굴은 여기에 있었다.
세르단은 창가 의자에 앉았다. 오늘 오래 서 있어서 왼쪽으로 몸을 돌릴 때 잠깐 어지러웠다고 했다. 지금 앉아 이야기하는 것은 괜찮다고 덧붙였다. 르네아는 맞은편 의자를 조금 가까이 옮겼다. 다리 하나 밑에 천을 받치고 앉자 높이가 맞았다.
처음에는 둘 다 물잔을 봤다. 그녀는 먼저 말을 꺼내려다 남자가 숨을 들이쉬는 것을 봤다. 공연 속 신호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가 자기 말을 시작하려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얼굴을 들었다.
“아까 종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바로 몰랐습니다.”
세르단이 말했다.
“거기 적힌 말이 싫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도 않은 사람의 말로 먼저 읽은 기분이었습니다.”
르네아의 손가락이 의자 옆을 잡았다. 남자는 창밖을 보지 않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듣는 사람이 한 명뿐인 자리에서 그가 말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질문을 일단 그대로 두었다.
“르네아 씨를 좋아합니다.”
그 말이 물잔 사이를 건너왔다.
“같이 공연할 때만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일을 마치고도 무슨 말을 더 하실지 궁금합니다. 어디 갈지 오래 고르시는 것도 더 보고 싶고요.”
르네아는 대답할 입을 열지 못했다. 말을 해 달라고 청한 입이 아니어서 더 놀라웠다. 그가 자기 부끄러움을 덜어 주려고 공연의 다음 대사를 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 끝난 일이 많은데 그 말에는 막을 내릴 자리가 없었다.
세르단은 어깨를 조금 내렸다. 그녀는 남자의 눈길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무엇이든 빨리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웃어서 넘기거나 잘 들었다고 답하는 것으로 자기 말을 대신하고 싶지 않았다. 원하는 대답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은 알았다. 문장으로 꺼내는 일을 남자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르네아는 의자 옆을 잡은 손을 폈다. 그 손을 들어 남자에게 닿기 전에 멈췄다. 지금은 손만으로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웃음을 참지 않은 채 그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