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속 세르단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웃고 있었다.
한 손을 높이 들고, 몸을 반쯤 뒤로 젖힌 얼굴이었다. 르네아는 그 얼굴을 먼저 알아봤다. 공연이 끝나고 인사하는 옛 그림이었다. 삼 년 전의 구두 끝이 종이 아래쪽에서 둥글게 돌아갔다. 다벨은 그 부분을 탁자 끝에 걸쳐 놓았다. 실제 남자는 서랍 덮개를 달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 얼굴을 다시 쓸 생각이십니까.”
세르단이 물었다. 아침 인사 뒤 처음 나온 말이었다. 르네아는 물병을 옮기려던 손을 멈췄다. 다벨은 접힌 종이의 윗부분을 손바닥으로 폈다. 웃음 아래에는 새 제목 대신 빈 줄이 있었다. 아직 붙이기 전인 그림이었다.
“기억하는 얼굴이 있어야 새로 하는 일도 보러 오지.”
“아래 구두까지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죠.”
“회전 복귀라고 쓰지는 않을 거야.”
세르단은 탁자 반대편으로 걸어와 앉았다. 그는 종이 속 자기 발을 손으로 가리지 않았다. 르네아는 남자의 왼쪽 바닥에 의자 다리가 걸리지 않는지 봤다가 눈을 들었다. 그가 필요한 자리는 이미 스스로 골랐다. 자기가 끼어들어 그림을 접어 버릴 수는 있었지만, 남자는 아직 할 말을 끝내지 않았다.
다벨은 함께 온 그림장이에게 빈 종이를 펴 달라고 했다. 입구에 선 여자가 가죽 통에서 새 종이를 꺼냈다. 손가락 마디에 검은 목탄 가루가 있었다. 다벨은 그제야 바닥빛 답변을 담은 편지도 내밀었다. 큰물결 연습실의 바닥등을 남기는 것은 가능하나, 본무대 전체 암전 장면은 아직 바꾸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세르단은 편지를 다 읽었다. 원래 배역으로 돌아오겠다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다벨도 오늘 여기서 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다만 다른 제안이 하나 있다며 가방에서 선창 그림을 꺼냈다. 나룻배 목공들이 여는 낮 행사에 짧은 공연을 넣고 싶다는 부탁이었다. 무대처럼 쓰는 짐배의 위치와 오는 길이 손으로 그려져 있었다.
“낮은종에서 한 장면을 가져오면 어떻겠느냐더군. 그쪽에서 내게 사람을 물었어. 당신들 얘기를 했지.”
르네아는 그림의 물결 표시를 봤다. 바닥이 무엇으로 돼 있는지, 구리실을 고정할 자리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벨에게 직접 보고 답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공연료와 사람 수는 행사 담당자와 따로 정해야 했다. 큰물결에 옮겨 오라는 제안에 딸린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그림도 같이 가져오셨어요?”
그녀가 옛 초상을 가리켰다. 다벨은 홍보를 부탁받은 김에 쓸 수 있는 판을 골랐다고 했다. 아직 날짜도 공연자도 인쇄하지 않았다. 르네아는 그가 빈 줄을 남긴 까닭을 알았다. 정하지 않은 것은 남겨 두면서 얼굴은 벌써 옛것을 골라 놓았다.
“저 얼굴은 쓰지 않겠습니다.”
세르단이 말했다.
르네아는 그를 봤다. 그는 포스터를 밀어 버리는 대신 종이 아래 빈 줄에 손가락을 뒀다.
“지금 할 공연을 본 뒤에 그려 주셨으면 합니다. 오래된 웃음까지 제가 다시 해야 하는 그림은 곤란합니다.”
“사람들이 자네를 몰라보면?”
“제 이름을 읽겠죠. 이름도 모르는 분이면 오늘 하는 걸 처음 보실 테고요.”
다벨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큰 극장에서 오래 표를 팔아 온 사람이 모르는 얼굴로 사람을 부르자는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르네아는 그 시간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름을 읽으면 된다는 말 옆에 덧붙일 설명이 머릿속에 줄지어 섰다. 지금 걷는 모습을 본 관객도 좋아했다는 말까지 나올 뻔했다.
그녀는 물병의 뚜껑을 열었다.
“물 드실래요?”
다벨과 그림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단은 자기 잔을 앞으로 밀었다. 물을 따르는 일은 그의 말을 대신하지 않아도 할 수 있었다. 르네아는 잔 세 개를 놓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세르단의 대답은 그가 한 그대로 탁자 위에 남았다.
그림장이가 처음 입을 열었다.
“지금 그리는 건 가능합니다. 다만 공연을 안 봤어요. 저 그림을 안 보고 닮게 그릴 자신은 있지만, 어떤 장면을 넣어야 할지는 모르겠군요.”
“오늘은 환영 시험을 잡지 않았어요.”
르네아가 말했다. 조수도 관객도 없었다. 새 홍보 그림을 만들기 위해 준비 안 된 공연을 즉석에서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대본과, 환영을 해제한 다음 두 사람이 걷는 동선을 보여 주는 일이었다. 세르단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그는 오늘 바닥은 어제보다 낫지만 짧게만 하겠다고 했다. 무대의 등은 켜 두고, 실제 틀도 벽에서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림장이는 모양을 베끼려는 것이 아니니 빈 바닥이어도 좋다고 답했다. 다벨이 앞줄에 앉았다. 르네아는 쓰지 않는 회로에 천이 덮였는지 확인하고 무대에 올랐다.
세르단은 정한 곳에 섰다. 그는 그림장이의 종이를 의식하는 것처럼 잠깐 턱을 들었다. 르네아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손을 내밀고 객석 앞에서 아름답게 기다리던 옛 무용수의 표정이었다. 아직 한마디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그림 속 남자가 종이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그녀는 그 표정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기 대사를 시작했다.
“배표는 제가 샀어요.”
세르단이 그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입가의 모양이 조금 바뀌었다.
“그런데 목적지는 아직 고르는 중입니다.”
오늘 읽을 수 있는 문장만 골랐다. 남자는 배를 먼저 보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그러면 또 사야 한다고 답하자 다벨이 짧게 웃었다. 목탄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났다. 르네아는 그림장이를 돌아보지 않고 다음 대사를 했다. 세르단에게 말할 차례를 줬다.
그는 바로 웃지 않았다. 그녀를 보며 다음 말을 듣다가 제 차례에 짧게 고개를 숙였다. 미소를 만들지 않은 얼굴에 아까보다 할 일이 많아 보였다. 입술은 닫혀 있었고 어깨는 조금 낮았다. 르네아는 그 사람이 다음 말을 고르는 동안 무대에 같이 서 있는 것이 좋았다.
장면은 거기서 끝냈다. 세르단은 직접 의자를 골라 앉았다. 다벨은 예전 관객이라면 이 장면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세르단은 오늘 보여 준 것 뒤에 회전은 없다고 답했다. 다벨이 알겠다는 듯 손을 들었다. 동의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까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다음 몸짓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림장이는 두 장을 보여 줬다. 첫 장은 턱이 높았고 한 손이 옛 그림과 비슷하게 올라가 있었다. 둘째 장의 손은 허리보다 조금 아래였다. 남자의 눈길이 종이 가장자리 바깥을 보고 있었다. 르네아는 둘째 그림의 얼굴을 더 오래 봤다. 누군가 자기 앞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쪽이 좋습니다.”
세르단이 둘째 장을 골랐다. 그림장이는 그림 밖에 상대역을 넣을지 물었다. 다벨은 두 사람이 하는 연애극이라면 그 편이 알아보기 좋겠다고 했다. 르네아는 그제야 자기가 종이 앞에 불려 온 것을 알았다. 세르단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봤다.
“저는 실을 잡고 있는 손을 넣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림장이는 마지막 장면에는 실이 없었다고 했다. 르네아는 맞는 말이라 웃었다. 자기 작품을 알리는 그림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다는 표시를 빼면 안 될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림 속에 두 사람 얼굴과 구리실과 배와 옛 무대까지 전부 넣을 수는 없었다. 큰물결에서 가져온 종이보다 더 바쁜 종이가 될 터였다.
“그럼 마지막 장면의 저를 넣어 주세요. 손은 비워 두고요.”
그녀는 무대에서 했던 것처럼 손을 몸 옆에 놓았다. 남자와 마주 보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림장이는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르네아는 자기가 남자에게 한 말을 그대로 듣고 고개를 숙였다. 둘 다 웃지 않고 있는 그림이 어떻게 연애극을 보여 줄지는 아직 몰랐다.
그림장이가 종이를 조금 더 채웠다. 르네아의 눈길은 남자의 어깨 아래에 닿았고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입술 모양은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두 사람 사이의 빈 곳이 좁아 보였다. 르네아는 방금 손을 잡지 않은 것이 아까웠다. 잡지 않아서 보이는 거리도 있었다.
다벨은 그림을 들어 멀리서 봤다. 오래된 그림보다 조용해서 한 줄은 필요하겠다고 했다. 세르단은 현재 공연의 내용과 이름만 쓰자고 했다. ‘돌아온’이라는 말도 빼 달라고 했다. 다벨이 그 말 하나는 아깝다고 중얼거렸다. 남자는 자기가 돌아온 곳을 아직 그에게 정해 주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림장이는 두 번째 그림에 표시를 했다. 완성 전에 두 사람이 문구와 그림을 같이 확인하고, 사용 장소도 정하자고 했다. 오늘의 초상은 확정한 공연 일정을 뜻하지 않았다. 다벨은 옛 판을 다시 통에 넣었다. 버리지 말라는 부탁은 세르단이 했다. 과거 공연의 그림으로 남길 수는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르네아는 옛 얼굴을 다시 봤다. 남자가 저 웃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라고 먼저 단정했다면 틀렸을 것이다. 한때 실제로 원했던 표정이고 오늘 해야 할 표정은 아니었다. 그림장이가 종이를 말자 옛 구두 끝이 제일 나중에 가려졌다.
일행이 떠난 뒤 세르단은 극장 서랍의 덮개를 마저 달았다. 르네아는 선창 그림을 펴 놓고 바닥 표시를 찾았다. 물 위라는 말 때문에 막연히 기대했던 작은 무대는 짐배 위에 걸친 판 두 장이었다. 실제로 가서 보기 전에는 환영을 쓰겠다고 답할 수 없었다.
“제가 아까 말을 너무 안 했어요?”
그녀가 물었다. 세르단이 나사를 돌리던 손을 멈췄다.
“어느 때 말씀입니까.”
“옛 얼굴을 고르라고 했을 때요. 저는 싫었거든요.”
“들어 주셔서 좋았습니다. 그다음에 제가 말을 못 했다면 물어보고 싶었을 겁니다.”
르네아는 그 대답을 천천히 받았다. 자기가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또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것이 조금 민망했다. 그래도 말을 대신한 뒤 잘했느냐고 묻는 것보다 나았다. 그녀는 자기가 둘째 그림을 먼저 골랐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는 벌써 골랐다.
오후 일과를 마친 뒤 두 사람은 약속대로 로비에 잠깐 앉았다. 세르단은 오늘 멀리 나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고, 르네아도 선창 그림을 덮어 두었다. 오늘 같이 앉고 싶다고 한 시간을 앞으로 할 공연의 회의로 다 채울 필요는 없었다.
“그림에서는 안 웃으셨네요.”
그녀가 말했다.
“웃을 때만 쓸 수 있는 얼굴은 아니니까요.”
“지금은요?”
세르단이 그녀를 봤다. 곧 미소가 번졌다. 르네아는 그가 자기 질문 때문에 웃었는지, 질문을 하는 자기 얼굴 때문에 웃었는지 몰랐다. 둘 중 어느 것이어도 오늘 앞줄의 다벨에게 보여 주려고 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좋다고 답하고 가까운 손을 잡았다. 탁자 위의 선창 그림은 접힌 채였다. 르네아는 포스터에 넣지 않은 손을 한 번 고쳐 잡았다. 종이에 없는 일을 오늘 자기들이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