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마이라는 손을 내밀기 전에 세르단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녀가 팔꿈치를 조금 들자 그가 오른손을 폈다. 손끝은 닿지 않았다. 마이라는 빈 손바닥 위에서 천천히 손목을 돌렸다가 반 발 물러섰다. 기다린 적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동작이었다. 그런데 세르단은 기다렸고, 그녀가 멈추는 자리에 정확히 손을 거뒀다.
르네아는 수첩에 쓸 것이 없는 사람처럼 연필만 쥐고 앉았다.
큰물결의 연습실은 공연장보다 작았다. 그래도 낮은종 무대 두 개쯤 들어갈 넓이였다. 창은 동쪽 벽을 따라 나 있었고, 밝은 직사각형이 바닥에 겹쳤다. 회전대도 환영도 없었다. 세르단은 문에 들어오자 마이라에게 오늘은 몸을 틀지 않고 한곳에 서 있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가 서는 자리에 작은 천을 놓았다. 발을 고정하는 장치가 아니라 동선을 기억할 표식이었다.
“손이 낮네요.”
마이라가 말했다. 세르단이 손을 한 뼘 내렸다.
“이제 더 낮아졌는데요.”
“예전 대사를 따라 해 봤습니다.”
두 사람이 웃었다. 르네아는 자기가 웃을 때를 놓쳤다는 사실부터 알았다. 무슨 옛 대사인지 몰랐다. 설명을 요청하면 말해 줄 사람들일 텐데, 지금 설명받는 자리에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창틀의 길이를 재는 척 수첩에 선을 하나 그었다.
첫 동작을 마친 마이라는 세르단에게 의자를 권하고 혼자 다음 동작을 했다. 스스로 손을 잡았다가 놓고, 사람 없는 쪽으로 빠르게 두 걸음을 옮겼다. 걸음의 끝에서 치맛자락이 따라왔다. 세르단이 그녀와 함께 걸을 필요는 없었다. 이 공연에서 마이라는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떠나 보낸 사람이었다.
르네아는 그 동작이 좋았다. 좋아서 더 기분이 복잡했다. 마이라의 새 공연을 보겠다는 약속을 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지금 한 여자의 잘하는 일을 보면서 다른 남자의 손만 세고 있었다. 그런 관객이 되고 싶어서 여기 온 것은 아니었다.
“이번엔 제가 너무 빨랐죠?”
마이라가 창가를 향해 물었다. 세르단이 아니라 르네아에게 묻는 말이었다.
“손을 놓는 데서요?”
“놓고 나서요. 돌아오려는 건지 나가는 건지 구별됐어요?”
르네아는 방금의 발을 떠올렸다. 자기 속이 시끄러워도 본 것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발끝이 문 쪽을 향하다 안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마이라는 그 대답을 듣고 다시 섰다. 이번에는 돌아오는 발을 없앴다. 걸음이 짧아졌는데 떠나는 쪽은 더 분명했다.
“이쪽이 좋네요.”
르네아가 말했다. 자기 입에서 직업의 말이 돌아오자 조금 편해졌다. 마이라는 한 번 더 확인한 뒤 연습을 멈췄다. 오늘 세르단에게 부탁한 부분은 여기까지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은 채 물을 마셨다. 마이라는 다음 동작의 시작을 혼자 다시 짚었다. 의자에 앉은 세르단도 발끝의 변화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왜 기다려요?”
르네아가 대본의 여백을 가리켰다. 마이라는 둘이 헤어지기 전에 자기 물건을 돌려받으려고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빼앗긴 것이 아니라 맡겨 둔 것이었다. 자기 마음을 되찾는 이야기냐고 르네아가 묻자 그녀는 아니라고 웃었다. 실제로 외투 한 벌이라고 했다.
세르단이 옆에서 작게 웃었다. 르네아도 이번에는 같이 웃었다. 아름다운 몸짓이 반드시 아름다운 물건을 옮기지는 않았다. 그 단순한 사실을 자기는 자꾸 잊었다. 둘이 친숙하다는 사실 역시 마음의 역사를 제멋대로 채울 허락은 아니었다.
잠시 뒤 의상 장인에게 보낼 끈의 길이를 확인하러 세르단이 복도 쪽 탁자로 갔다. 걸어 나가기 전에 바닥이 안정됐다고 스스로 말했다. 르네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마이라는 다음 약속이 적힌 종이를 접었다. 방에 둘만 남자 르네아는 연필을 너무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려고 수첩을 덮었다.
“오래 맞춰 본 사람들은 정말 다르네요.”
그녀가 말했다. 칭찬으로 시작했는데 문장 끝이 조금 뾰족했다. 마이라는 창가에 걸쳐 둔 자기 외투를 집어 들었다. 비단 안감 안쪽에 해진 솔기가 보였다. 포스터에서는 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제가 처음 같이 섰을 때는 서로 손을 두 번이나 놓쳤어요. 관객 앞에서요.”
“그 뒤로 많이 했겠죠.”
“네. 많이 했죠.”
마이라는 그 시간을 축소하지 않았다. 르네아는 왜 그 대답을 반박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한 번의 웃음만으로 삼 년 전 무대가 자기 앞에 돌아온 것 같았다. 자기는 며칠 동안 묻고 연습해서 얻은 손의 높이를, 저 여자는 팔꿈치 하나로 부르고 있었다.
“저도 저렇게 알고 싶어서요.”
말이 나온 뒤 르네아는 자기 무릎을 봤다.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뜻으로 끝낼 수 있었다. 마이라가 그쪽으로 받아 주면 둘 다 편해질 터였다. 그러나 편해진 다음에도 자신은 불편할 것 같았다.
“동작만 말하는 건 아니에요.”
마이라는 외투를 팔에 걸고 잠깐 기다렸다. 더 캐묻지 않는 얼굴이었다. 르네아는 그 점 때문에 도망갈 농담을 찾지 못했다. 자기 마음을 말해 달라고 상대 여자를 붙잡을 권리는 없었다. 궁금한 사실과 떠넘기고 싶은 불안을 가려야 했다.
“두 분이 연인인 적이 있었어요?”
“아뇨.”
대답은 짧았다. 르네아는 숨을 너무 크게 내쉬지 않으려고 했다. 마이라가 그 뒤에 세르단이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덧붙일까 봐도 걱정했다. 하지만 그녀는 외투의 접힌 깃만 폈다.
“저희가 같이 무대에 섰던 건 사실이에요. 지금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도 그거예요.”
르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인이 아니었다는 답이 자기 자리를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자기는 아직 그에게 무엇도 묻지 않았다. 세르단이 마이라와 손을 잘 맞추는 동안 불편했던 마음을, 없는 과거를 확인받는 것으로 전부 처리할 수는 없었다.
“이상한 질문해서 미안해요.”
“이상하진 않아요. 제 다음 동작도 기억해 주시면 좋겠지만요.”
르네아는 웃다가 자기 수첩을 폈다. 문 쪽으로 뻗었던 마이라의 발끝을 그렸다. 그림이 또 새처럼 못생겼다. 마이라는 그걸 보고 자기 신발을 그렇게 그리면 장인에게 혼난다고 했다. 둘이 같이 웃는 사이 복도에서 나무 자를 놓는 소리가 났다.
세르단이 돌아왔을 때 마이라는 둘의 대화를 설명하지 않았다. 르네아도 그가 누구와 연애했는지 확인한 일을 그의 앞에서 농담으로 돌리지 않았다. 셋은 다음 연습의 시간을 맞췄다. 마이라의 공개 초연은 다음 달이었고, 그 전에 소수의 동료에게 보여 주는 시연이 있을 예정이었다. 오늘은 그 첫머리만 확인한 것이었다.
큰물결을 나와 낮은종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르단이 먼저 걸음을 늦췄다. 길 양편으로 손수레가 지나가고 있었다. 르네아는 벽 쪽으로 비켜 섰다. 그에게 무엇을 묻고 싶은지 길의 돌멩이보다 더 많이 골랐다.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엉뚱하게도 손에 관한 말이었다.
“저랑 할 때도 다 아는 동작인데 모르는 척해요?”
그가 고개를 돌렸다. 르네아는 질문이 뾰족했던 만큼 답을 기다려야 했다. 세르단은 손수레 한 대가 지나간 뒤 벽의 등걸이를 봤다.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을 때 그가 말했다.
“아는 동작도 있고 처음 하는 것도 있습니다. 르네아 씨가 언제 손을 내밀지는 묻고 나서 알았죠.”
“다른 상대와는 안 물어도 알잖아요.”
“마이라와도 처음에는 물었습니다.”
르네아는 입술을 눌렀다. 자기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이제 더 부끄러웠다. 남자가 남보다 서툴러져 주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가 오래 쌓은 기술을 함께 쓰자고 먼저 부탁한 사람이 자신이었다. 그러면서 자기 앞에서는 무엇이든 처음인 얼굴이면 좋겠다는 욕심을 품었다.
“제가 못 본 시간이 너무 능숙해서 싫었나 봐요.”
그녀가 말했다. 질투라는 말은 혀끝에서 한 번 멈췄다. 그러나 이름을 안 붙이면 자꾸 상대가 잘못한 일처럼 들릴 터였다.
“질투했어요. 그게 오늘 연습을 나쁘게 만드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데.”
세르단은 바로 웃지 않았다. 잘된 일처럼 받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 없다는 말로 돌려주지도 않았다. 르네아는 손수레가 지나간 길에 작은 나뭇잎이 붙어 있는 것을 봤다. 마차 바퀴도 아니고 고작 나뭇잎이었는데, 지금은 볼 것이 있어서 고마웠다.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아직 모르겠어요. 적어도 일부러 서툴게 하진 마세요. 그러면 제가 더 화날 것 같아요.”
그가 짧게 웃었다. 르네아도 따라 웃었다. 말해 놓고도 자기 모순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가 평생 마이라의 이름을 피해야 하는 부탁까지 만들지는 않았다. 그녀는 벽에서 등을 떼고 길을 봤다. 가던 쪽으로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오늘 마이라가 마지막 발을 바꿨을 때 좋았어요.”
“어느 쪽이요?”
“안 돌아오는 발이요. 외투를 받고도 머무르면 다른 이야기 같아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아는 마이라의 동작을 말하는 동안 세르단이 다시 그 여자를 떠올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막으려고 자기 이야기만 계속할 수는 없었다. 좋은 공연을 함께 볼 사람을 원한다면 그 사람의 눈을 자기에게 묶어 둘 수 없었다.
낮은종에 도착한 뒤 둘은 어제의 ‘그림자가 남는 길’을 시험했다. 새 빛의 벽은 낮고 얇았다. 펜이 관객 자리에 앉았다. 르네아는 단일 회로에서 오른쪽으로 기운 판을 세우고 그 옆을 걸었다. 실에 걸린 힘을 느끼면서 자기 그림자가 벽 바깥으로 길게 누웠는지 확인했다.
세르단은 한 걸음 뒤에서 멈췄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오른손을 내밀려다 멈췄다. 연습 전 묻기로 한 손이었다. 질투를 말했다고 이 동작이 사적인 합의로 저절로 바뀌지는 않았다.
“지금 잡아도 돼요?”
“네. 오늘은 손을 조금 낮게 부탁합니다.”
그녀는 팔꿈치를 내렸다. 마이라가 아침에 했던 것과 닮은 각도였다. 순간 몸이 굳었으나 르네아는 그대로 손을 폈다. 세상에 하나뿐인 각도로만 가까워질 수 있다면 두 사람은 아직 손도 잡지 못했을 것이다. 손바닥이 닿자 그는 그녀가 고른 속도로 한 걸음만 왔다.
이것은 자기 앞의 남자가 해 주는 동작이었다. 다른 날 다른 사람에게 했던 모든 것 때문에 없어지지 않았다. 르네아는 실을 풀 여덟 박자를 소리 내어 셌다. 빛의 판이 완전히 내려간 뒤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놓았다. 오늘은 그 정확한 끝이 좋았다.
펜이 객석에서 일어나 치마 끝을 가리켰다. 빛을 피해 디딜 때마다 자락이 한쪽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르네아는 신발 위에 얹힌 옷감을 내려다봤다. 지금까지 덧댄 자국만 세 군데였다. 세르단은 소멜에게 보여 주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아까 마이라의 끈 길이를 맡기던 의상 장인이었다.
“좋은 무대 옷을 만들어요?”
“옷이 싫으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르네아는 수첩의 마지막 빈칸에 소멜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남자의 과거에서 이름 하나를 지우는 대신, 자기 다음 날에 다른 이름을 더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