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은 약속보다 먼저 식었다.
르네아는 전날 밤 종이에 싸 온 빵을 아침 식탁에 올렸다. 둘은 문 닫기 전의 빵집에 도착했고, 세르단은 마지막 꿀빵을 그녀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자기가 먼저 골랐다고 했다. 그녀가 그 뻔뻔함을 웃느라 빵 하나를 더 사는 바람에 아침 몫이 남았다. 다벨의 이름을 들은 뒤에도 그와 마주 앉아 먹은 저녁은 사라지지 않았다.
창가의 배는 여전히 단단했다. 르네아는 손가락으로 눌러 보고 그대로 두었다. 어제 안 익은 것을 오늘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첩 위의 마지막 소금 과자는 아침에 먹었다. 부스러기를 털다가 청색 봉투를 떠올렸고, 자기 방에 없는 봉투를 너무 선명하게 떠올린다는 사실에 조금 짜증이 났다.
낮은종에 도착했을 때 세르단은 작업대의 서랍을 고치고 있었다. 무대 위에 섰던 손으로 나사를 돌리는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르네아는 그가 다른 직업으로 변한 것처럼 보려다 그만뒀다. 어제도 두 일을 한 사람이었다.
“정오에 나가세요?”
“정오보다 조금 먼저요. 걸어가려고 합니다.”
그는 나사를 통에 담고 외투를 들었다. 르네아는 동행할까 하는 말을 이미 세 번쯤 머릿속에서 했었다. 큰물결은 혼자 찾아갈 수 없는 곳도 아니었다. 그의 배역을 자기가 듣고 싶은 것인지, 그가 돌아오는 길을 알고 싶은 것인지부터 분간해야 했다.
“함께 가길 원하세요?”
세르단은 외투를 걸치다 그녀를 봤다.
“혼자 듣고 오고 싶습니다. 거기서는 제가 대답해야 할 말이 많을 것 같아서요.”
“알겠어요. 저는 다음 장면을 고칠게요.”
말을 하고 나니 심술처럼 들릴까 걱정됐다. 르네아는 수첩을 폈다. 실제로 고칠 것이 있었다. 어제 여자가 목적지를 말한 뒤 남자가 묻는 대사가 너무 빨리 왔다. 자신이 원하는 곳을 고르는 시간을 조금 더 주고 싶었다. 그가 떠나는 동안 기다리는 여자가 되지 않으려고 급히 만든 일이 아니었다.
세르단은 수첩의 지운 자국을 잠깐 보았다.
“돌아와서 읽어도 됩니까.”
“대사가 남아 있으면요.”
“제 대사는 지워도 됩니다. 제가 읽을 자리는 남겨 주십시오.”
그녀는 연필 끝을 손톱에 댔다. 읽을 자리. 그 말을 오래된 주연석과 비교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비교가 됐다. 르네아는 자기 작업대 옆의 흔들리는 의자를 봤다. 육백 개의 객석이 있는 극장과 겨뤄야 하는 물건치고 초라했다.
“의자가 싫으면 서서 읽어요.”
그가 웃고 나갔다. 문이 닫힌 뒤에도 그녀의 입가에는 웃음이 조금 남았다. 불안한 날에 웃을 일이 있다는 건 불안을 없애 주지는 않았지만 손을 움직이게 했다.
펜은 어제 쓰던 실을 길이별로 나눴다. 르네아는 회로가 쉬는 전면에 붉은 천을 덮고, 사용할 수 있는 바닥 쪽에 분필로 선을 그었다. 난간을 길게 늘일 생각은 없었다. 여자가 목적지를 말할 때 자기 그림자를 밟고 건너는 동작을 넣고 싶었다. 펜이 직접 해 보더니 발이 아니라 치마가 걸린다고 했다.
“그림자는 안 걸릴 텐데요.”
“제 치마는 그림자가 아니거든요.”
옳은 말이었다. 르네아는 선 하나를 지웠다. 세르단이 없는 동안에도 연습은 됐다. 펜은 대사를 읽는 대신 객석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펜은 관객이 어디서 그녀를 놓칠지 말해 줄 수 있었고, 자기 팔 길이로 실을 풀 때 무엇이 불편한지도 알았다. 르네아는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이브론이 얇은 장부를 가져왔다. 어제 받은 입장료에서 의자 운반값과 기름, 둘의 공연 몫과 펜의 일당을 빼자 금액이 작아졌다. 건물 빚까지 지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르네아는 자기 몫이 적힌 칸을 손끝으로 짚었다. 이름이 이번에는 곧게 쓰여 있었다.
“다음엔 더 받으려면 뭘 해야 하죠?”
“비싼 표를 팔든가, 더 자주 열든가.”
“스물다섯 번째 의자를 놓는 방법은 없네요.”
이브론은 잠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가 장부를 덮었다. 자기도 그 방법을 말하려던 건 아니라고 했다. 르네아는 따지지 않았다. 대신 다음 공연 날짜는 출연자의 답을 듣고 정하자고 했다. 기다림을 몰래 약속으로 바꾸지 않으려면, 장부에 빈칸이 있는 것도 견뎌야 했다.
오후에 그녀는 펜 혼자 보는 작은 시험을 했다. 바닥의 한 회로에서 낮은 사각 발판을 올렸다. 높이는 발목에도 못 미쳤다. 펜의 시선이 모이자 실이 조용히 팽팽해졌다. 르네아는 올라서지 않고 발판 옆을 걸었다. 자기 그림자가 빛에 가려졌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멈췄다.
아무것도 서 있지 않은 발판을 여덟 박자에 풀었다. 다시 만들기 전에 분필 선 옆에 ‘그림자가 남는 길’이라고 적었다. 멋진 문장은 아니었으나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남자가 돌아올 때 보여 줄 성공을 급히 만들지 않아도 됐다.
세르단은 해가 창틀의 절반쯤 내려왔을 때 돌아왔다. 손에 든 것은 청색 봉투가 아니라 접은 대본이었다. 르네아는 그 종이를 보는 순간 가슴이 좁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대본을 받아 왔다는 사실만으로 일은 정해지지 않았다. 아는데도 손가락이 연필을 세게 눌렀다.
“읽을 자리가 남았습니까.”
그가 물었다. 르네아는 흔들리는 의자를 발로 조금 밀어 줬다. 세르단은 앉기 전에 다리가 흔들리는 곳을 확인하고 접은 천을 받쳤다. 삼 년 전 주연이 자기 자리의 높이를 맞추는 동안 그녀는 묻고 싶은 말을 정리했다.
“무슨 배역이에요?”
“일곱 번째 회전의 마지막 장면을 바꾼답니다. 돌아온 남자가 빈 무대를 걸어서 가로지르고, 중앙에서 옛 상대를 만나는 장면.”
그는 대본을 펼쳐 두 군데를 가리켰다. 르네아는 그의 허락을 묻고 종이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오래된 작품 제목 아래에 새 대사가 붙어 있었다. 출연자의 걸음보다 제목이 먼저 관객을 데려오는 공연이었다.
“회전은요?”
“다벨은 안 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요. 마지막 인사에서 한 바퀴만 천천히 돌 수 있느냐고 다시 묻더군요.”
르네아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가 직접 어떤 대답을 했는지 듣기도 전에 화가 나려 했다. 한 바퀴와 일곱 바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남자의 몸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작은 요구가 되지는 않았다.
“못 한다고 했습니다. 어두워지면 균형을 잃기도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걸어와서 앉아 쉬어야 한다고요.”
“그 말도 했어요?”
“기다리는 동안 계단 옆 의자에 앉았습니다. 굳이 숨길 수 없더군요.”
세르단이 웃었다. 사교적으로 입 끝만 올리는 웃음이었다. 르네아는 그 웃음을 벗겨 내겠다는 듯 들여다보지 않았다. 자기 앞에서도 그가 웃고 싶으면 웃을 수 있었다. 대신 물잔을 건넸다. 그는 고맙다고 하고 반쯤 마셨다.
“다벨은 입구에서 저를 알아봤습니다. 새 얼굴을 본 것처럼 반가워했죠. 책상 앞 의자도 그대로였고요. 제가 첫 주연을 맡았을 때 앉았던 의자입니다.”
르네아는 육백 석 가운데 어디에 그런 작은 의자가 놓였을지 상상했다. 세르단은 그곳에 직접 앉았다 왔다. 그녀가 못 본 그의 하루였다. 그 하루가 좋았는지 묻고 싶어졌다.
“반가웠어요?”
그는 바로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대본 가장자리를 엄지로 쓸었다.
“네. 제가 앉으면 사람들이 무얼 기다리는지 알던 자리라서요. 여기서는 아직 모르는 게 많습니다.”
그 말은 작은 돌처럼 내려앉았다. 르네아는 여기서도 모두 안다고 우길 수 없었다. 자기는 무대에 처음 서는 사람이고 매번 대사를 고쳤다. 그와 같은 속도로 능숙해지겠다는 약속은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못 따라간 사람처럼 억울했다.
그녀는 잠깐 그 억울함을 자기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 뒤에야 다음 질문이 나왔다.
“그 자리에 돌아가고 싶어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옛날처럼 할 수 없다는 걸 다벨이 끝까지 받아들인다면요.”
세르단은 종이를 한 장 넘겼다. 회전이 지워진 자리에도 암전이 남아 있었다. 무대 바닥을 볼 수 있는 유리등을 두 개 두자는 요청을 했고, 제작자는 먼저 조명 담당과 상의하겠다고 했다. 그 답이 오기 전에는 출연을 약속하지 않기로 했다. 연습은 사흘 중 하루, 정해진 장면만 확인하는 조건으로 다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출연 몫도 종이에 적혀 있었다. 낮은종에서 어제 받은 것보다 컸다. 르네아는 그 줄을 일부러 못 본 척하지 않았다. 공연을 원하는 사람에게 돈도 필요했다. 다벨이 그를 부른 까닭에 좋은 이유와 불편한 이유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제안을 쉽게 미워할 길을 막았다.
“여기 연습과 겹치면 미리 말해 줘요.”
그녀는 자기 수첩을 그의 대본 옆에 놓았다.
“제가 계속 뭘 고치니까 아직 날짜를 못 정하겠지만, 그게 아무 날이나 괜찮다는 뜻은 아니에요.”
세르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아는 그가 미안하다고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제안한 무대 하나 때문에 다른 일을 원할 때마다 사과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섭섭하지 않은 사람을 연기할 자신도 없었다.
“오늘 고친 걸 읽어 보시겠어요?”
“네.”
그녀는 여자 대사를 가리켰다. 목적지를 말하기 전에 빈 배를 먼저 보는 장면이었다. 세르단이 조용히 읽었다. 르네아는 그가 재미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기다렸다.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자기 장면을 칭찬해 달라고 청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는 제가 바로 묻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네. 그걸 고치고 있었어요.”
“얼마나 기다리면 됩니까.”
“제가 말할 때까지요. 너무 길면 먼저 하품하지 말고요.”
그가 웃었다. 이번에는 웃을 때 눈가도 접혔다. 르네아는 자기 수첩을 가까이 끌었다가, 둘이 같이 읽기 좋도록 다시 가운데 놓았다. 오늘의 자리는 누가 예전에 앉았던 의자와 닮을 필요가 없었다. 이 의자는 천을 받쳐야 흔들리지 않았고, 지금은 한 사람이 앉아 다른 사람이 쓴 문장을 보고 있었다.
펜이 다가와 분필 선을 지워도 되느냐고 물었다. 르네아는 내일까지 남겨 달라고 했다. 세르단은 바닥에 적힌 말을 소리 내지 않고 읽었다. 그녀는 시험했던 발판이 자기 그림자를 삼켰다고 설명했다. 남자는 다음에는 빛을 옆에서 낮게 세워 보자고 제안했다. 답이 될지는 다시 만들어 봐야 알았다. 둘은 아직 없는 장면을 두고 잠깐 다퉜고, 르네아는 그 다툼이 반가웠다.
저녁 종이 울릴 무렵 마이라가 왔다. 내일 큰물결의 빈 연습실에서 자기 새 공연의 첫 동작을 확인한다며 세르단에게 짧은 대역을 부탁하고 싶다고 했다. 몸 상태에 맞춰 선 채 손만 내밀어 주면 된다는 말도 했다. 세르단은 먼저 르네아가 적은 연습 시간을 확인했다.
르네아는 수첩에서 시선을 들었다. 자기와 처음 고른 세 걸음 옆에, 다른 여자와 이미 아는 동작이 놓일 참이었다.
“저도 봐도 돼요?”
그녀가 묻자 마이라가 웃었다. 르네아는 그 웃음을 보며, 궁금하다는 말 안에 다른 이름을 가진 마음도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