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병은 가득 찬 병보다 소리가 컸다.
유리는 운반 상자의 마른 받침을 다시 보았다. 공동 파종 사흘 뒤, 예순이레째 날 아침이었다. 여섯 봉인 병과 빈 병 두 개는 칸을 나눠 실었다. 운반 담당이 덜 채운 빈칸을 보완하자 서로 부딪치던 소리가 줄었다. 오늘 길에서 새 계절을 열 계획은 없었다.
상자는 정한 물품 운송으로 나가고 유리는 작은 가방을 따로 들었다. 씨앗 인장은 본인 가방, 무거운 판은 담당이 포장과 인수를 맡았다. 로델에 남길 책임 문서의 확인본은 해당 보관자에게 갔다. 첫 봄과 짧은 봄의 가을 반환을 짐과 함께 실어 없애지는 않았다.
다온은 마지막 숙식 내역을 가져왔다. 유리는 남은 기간과 실제 사용, 별도로 맡겼던 운반 비용을 대조했다. 연인이 생겼다는 이유로 오래 묵은 방의 값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서로 이미 합의한 정산을 마친 뒤 방 열쇠를 돌려줬다.
방은 생각보다 비어 보이지 않았다. 다음 사람이 쓸 받침과 의자는 원래 자리에 있었다. 유리가 두고 가는 물건은 없었다. 보내지 않은 처음 편지도 자기 가방 안쪽에 넣었다. 남겨야 작별이 완성되는 종이는 아니었다.
리넷은 온실 근무를 앞두고 잠깐 왔다. 두꺼운 공책 대신 작은 접지 한 장을 들었다. 은빛콩의 최근 그림이었다. 견습은 원본 종자 기록에서 떼어 온 것이 아니라 본인이 따로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여 줄지 줄지 아직 망설이는 손이었다.
유리는 가지고 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리넷은 그러려고 그렸다고 답했다. 굽은 잎이 여전히 굽어 있었고 아래 새잎은 전보다 넓었다. 유리는 거기에 없는 꽃을 마음으로 그려 넣지 않았다. 식물의 지금 모습이 먼 길을 같이 갈 수 있었다.
“다음에는 제가 틀린 그림도 보낼까요?”
리넷이 물었다. 유리는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때 물어 달라고 했다. 정기적인 관찰 보고를 무료로 보내라는 뜻은 아니었다. 견습은 그러면 자기 쉬는 날의 그림부터 그릴 거라고 했다. 유리는 어떤 것을 그릴지 묻고 싶어졌다.
리넷은 아직 모른다고 말했다. 그 대답이 당당해서 둘은 웃었다. 견습은 정한 근무 시각에 맞춰 온실로 돌아갔다. 유리는 그녀가 길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봤다. 따라가 마지막 물 상태를 한 번 더 묻지는 않았다.
다온은 빵을 싸 줄지 물었다. 유리는 정기편에 가져갈 만큼의 품목과 값을 확인하고 작은 묶음을 골랐다. 주인은 소금이 든 쪽을 안에 넣었다고 했다. 특별히 오래 보관해도 되는 빵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 먹을 것을 맨 앞에 뒀다.
세온은 출발 자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대행실 인수를 끝낸 뒤 자기 시간에 온다고 했다. 유리는 그가 몇 분 늦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했다. 기다리다 차편을 놓치는 선택을 좋은 이별의 조건처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만나지 못하면 전할 경로도 둘이 정해 두었다.
운반 상자의 인수가 먼저 끝났다. 유리는 마지막으로 자기 물건과 접수표의 항목을 맞췄다. 옆 사람은 밭에 가져갈 작은 묘목 상자를 실었다. 다른 승객은 어린아이의 외투를 다시 여몄다. 로델에서 떠나는 사람이 유리 혼자인 날은 아니었다.
세온은 정한 시각에 왔다. 손에는 큰 선물이 없었고 외투 주머니에 멈춘 시계가 있었다. 그는 오늘도 벽시계를 보고 출발했다고 말했다. 유리는 이제 그 말을 들으면 웃게 됐다. 시간을 맞추는 물건을 꼭 과거에서 가져올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추운지 물었다. 그는 조금 춥다고 답했다. 유리도 그렇다고 했다. 봄 파종을 했다는 이유로 아침 공기가 따뜻해지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바람을 덜 맞는 옆자리로 움직였다. 떠날 길을 바라보는 위치가 조금 달라졌다.
“지금은 안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온이 말했다. 유리는 그 문장을 듣고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덧붙였다. 마음은 그렇지만 오늘의 출발을 바꾸라는 부탁으로 말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움을 모두 지워 와야 존중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도 더 있고 싶다고 답했다. 마렌의 일도 해 보고 싶고 오늘 이곳에서 차를 더 마시고도 싶었다. 둘 중 하나가 가짜 마음일 필요는 없었다. 세온은 잠시 웃었다. 서로의 말에서 하나를 지워 정답을 만들지 않았다.
출발 담당이 짐의 마지막 확인을 불렀다. 유리는 자기 차례에 갔다. 세온은 대신 줄을 서거나 담당에게 빠르게 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물품 목록과 본인 인수를 마치고 돌아왔다. 헤어지는 사람의 시간도 다른 승객의 시간과 함께 흘렀다.
남은 시간은 짧았다. 그는 편지를 언제 보내면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유리는 마렌의 확인된 개인 수신 경로와 예상 체류 기간을 말했다. 그 뒤의 순회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대행실의 공적 문서에 자기 개인 편지를 끼워 보내지 않기로 했다.
세온은 매일 답을 받을 수 있는지 묻지 않았다. 유리가 먼저 말했다. 도착했다는 짧은 소식은 보낼 생각이지만 전달편이 늦을 수도 있다고 했다. 길에서 먼저 읽고 말하고 싶은 일이 생겨도 상대에게 같은 날 도착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는 답장이 없으면 걱정할 것 같다고 말했다. 유리는 자기도 그럴 거라고 답했다. 둘은 현재 전달의 예상 경과와 실제 안전 확인을 물을 때 쓸 정식 경로를 나눴다. 불안할 때마다 온실 업무 담당에게 사생활을 알아보게 하지는 않았다.
유리는 그 대화가 고백보다 어렵다고 느꼈다. 좋아한다고 말한 뒤에는 기다리는 방법까지 저절로 같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세온이 어떤 간격에 불안해지는지, 자기는 피곤한 날 얼마나 말을 못 하는지 아직 서로 알지 못했다.
그녀는 모르면 묻겠다고 말했다. 짧은 답을 무심하다는 뜻으로 먼저 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세온도 자기에게 필요한 말을 부탁하겠다고 답했다. 두 사람은 앞으로 한 번도 오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리넷의 그림 모서리가 보였다. 세온은 잘 보이지 않는 그 종이를 가리키지 않았다. 유리가 먼저 꺼내 보여 줬다. 그는 새잎이 지난번보다 넓다고 말했다. 그림의 날짜를 보며 자기가 본 때와 다르다는 말도 덧붙였다.
유리는 그 차이가 좋았다. 같은 식물을 보고도 서로 다른 날을 가져갈 수 있었다. 멀리 떨어진 뒤의 편지도 그럴 것이다. 누가 더 정확히 기억하는지를 겨루는 종이보다 지금 무엇을 봤는지 묻는 종이가 되기를 바랐다.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유리는 왼손을 내밀었다. 세온이 잡고 힘을 조금 줄였다. 오늘은 그녀가 말하기 전에 그랬지만 앞으로 늘 알아서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정도가 편하다고 지금의 답을 했다.
그의 손을 놓자 손바닥이 갑자기 차가웠다. 유리는 다시 잡고 싶었지만 가방 끈을 고쳐 멨다. 세온은 그 동작을 보다가 길이 안전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일 잘하고 오라는 말은 그 뒤였다. 잘해야 돌아올 수 있는 자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도 쉬는 날이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대행실의 모든 인수를 자기 손으로 마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사람이 그 부담을 잊지 않도록 사적인 부탁을 할 수는 있었다. 세온은 자기 일정에서 실제로 지키겠다고 답했다.
유리는 마차에 올랐다. 문턱에서 오른손 대신 왼손을 썼고 담당의 필요한 도움만 받았다. 세온이 아래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를 찾은 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는지 급히 찾지 않았다.
그가 손을 들었다. 유리도 작은 손짓으로 답했다. 차편이 움직이자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외투가 가려졌다. 마지막까지 얼굴이 보여야 잘 떠난 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등을 좌석에 기대고 숨을 내쉬었다.
로델의 길은 울퉁불퉁했다. 상자 소리는 정한 운반 칸에서 낮게 이어졌다. 유리는 손을 무릎 위에 놓았다. 남은 여섯 병을 떠나는 길의 아쉬움에 쓸 수는 없었다. 계절의 온기와 사람을 보고 싶은 마음은 서로 대신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첫 휴게에서는 운반 담당이 물품 상태를 확인했다. 유리는 작은 가방만 직접 들고 내려 손과 몸을 쉬었다. 아직 마렌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정해진 중간 숙박지와 다음 날의 연결 편이 실제로 있어야 남은 길을 갈 수 있었다.
같은 차의 여자가 작은 묘목을 보고 이것도 계절을 빌리면 빨리 자라느냐고 물었다. 유리는 현재 식물과 보관 조건도 모르고 답할 수 없다고 했다. 여자는 그럼 지금은 그냥 들고 가겠다고 웃었다. 유리는 그 보통의 선택이 반가웠다.
길가 가게에서 따뜻한 물을 마셨다. 찻잔 손잡이를 자기 쪽으로 돌리고 나니 로델의 탁자가 생각났다. 유리는 잠깐 허전했다. 늘 누군가 돌려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날이 있었다.
저녁에는 정한 숙박지에 실제로 닿았다. 다음 편의 운행과 물품 보관 인수를 확인한 뒤 방으로 갔다. 침대 옆에는 낯선 작은 탁자가 있었다. 그녀는 오늘의 출발 소식을 한 줄 쓰려다 오른손의 피로를 보고 펜을 내려놓았다.
대신 다음 날 전달할 짧은 말을 미리 정리했다. 늦게 쓴다고 오늘 떠났던 마음까지 늦게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세온에게 당장 이 길의 모든 풍경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오늘은 잠을 자야 했다. 도착하지 않은 곳의 주소로 안전을 약속할 수도 없었다.
예순여드레째 날, 연결 편은 늦은 오전에 출발했다. 앞 구간의 물품 인수 때문에 지연됐다는 설명이 왔다. 유리는 새 도착 예상과 마렌의 수신 담당에게 전할 경로를 확인했다. 길은 연인을 얻은 사람에게만 매끄러워지지 않았다.
오후 늦게 마렌의 작은 숙소에 닿았다. 물품은 확인된 보관처가 실제로 받았다. 온실 업무는 다음 날부터였고 오늘 밤 현장을 보겠다는 요청은 받지 않았다. 유리는 자기 인장과 개인 가방을 챙겨 방으로 올라왔다.
도착 소식은 현지의 정기 전달편에 맡겼다. 세온에게는 며칠 뒤 갈 짧은 편지였다. 무사히 도착했고 손이 피곤해 오늘은 쉬겠다는 말, 길에서 차를 마시다가 그가 생각났다는 말이었다. 좋아한다고 매번 길게 증명하지 않아도 오늘 본 마음은 적을 수 있었다.
전달 담당이 봉투를 실제로 받았다. 아직 상대가 읽었다는 확인은 없었다. 유리는 그 빈 경과를 상상으로 채우지 않고 저녁을 먹었다. 마렌의 찻잔은 로델 것보다 조금 컸고 같은 손으로 들면 무거웠다.
그녀는 잔을 덜 채웠다. 새로운 곳에서 편하게 지낼 방법을 찾는 일이 그 사람을 덜 그리워하는 일은 아니었다. 창밖에서 낯선 온실의 문이 닫혔다. 내일 자기 일이 시작될 곳이었다. 유리는 오늘 떠나온 봄과 앞으로 만날 흙을 함께 생각하며 등불을 낮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