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온은 시계를 꺼내지 않았다.
서문으로 가는 길에서 유리는 그의 주머니가 묵직해진 쪽을 한 번 보았다. 어제 돌려준 물건이었다. 오늘은 그 안의 빛을 다시 보는 날이 아니었다. 사람이 자기가 겪은 일을 말하기로 한 날이었다.
밤사이 내린 눈은 길 가장자리에만 얇게 쌓였다. 수문으로 가는 교대자는 두 사람을 지나 앞서 걸었다. 유리는 자기 가방의 무게를 고쳐 메고 세온에게 물었다.
“어디서 시작할까요?”
“돌계단 아래가 좋겠습니다. 물가에 너무 가깝지 않은 곳으로요.”
그가 말했다. 유리는 그 장소를 따라갔다. 처음 걸었을 때 그가 봄이 오면 먼저 녹는다고 말한 계단이었다. 해는 아직 낮았고 돌 위에는 얼음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난간 안쪽의 평평한 자리에 섰다.
세온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밤에 순서를 적었다고 했다. 문장을 잘 쓰려고 여러 장을 버렸는지 모서리가 조금 닳아 있었다. 유리는 그 종이를 읽어도 되는지 묻지 않았다. 그가 자기 말을 이어 가는 데 쓰면 되는 물건이었다.
“이걸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아직 원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알겠어요. 제가 현장 기록과 맞춰 보고 싶은 부분이 생기면 먼저 물을게요.”
유리가 답했다. 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외투 아래 손이 종이를 한 번 접었다 폈다. 서문 종은 울리지 않았다. 대신 수문 너머에서 얼음이 얇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처음 불렀을 때는 몇 명인지 몰랐습니다. 물이 올라왔고, 저쪽에 사람이 있다는 것만 알았습니다.”
그가 강 건너 낮은 둑을 가리켰다. 유리는 같은 곳을 봤다. 지금은 눈이 덮여 발자국도 없었다. 기록의 빛 속에서 젊은 세온이 보던 방향이었다.
“문을 열어 달라고 했는데, 저는 이름을 물었습니다. 어느 집 사람인지, 여기 명부에 있는지.”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 때문에 눈이 시렸다. 그녀는 장갑으로 눈가를 누르고 다시 세온을 봤다. 그의 얼굴을 편하게 해 줄 문장을 먼저 고르고 싶지 않았다.
“그걸 알아야 제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를 도와야 하는지 정하는 게 제 일인 줄 알았습니다.”
세온이 말을 이었다. 그는 스물한 살이었다는 변명을 붙이지 않았다. 일곱 해 전의 자기에게도 그때 아는 것이 있었다고 했다. 물이 불고 있었고 사람이 추웠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유리는 손난로를 주머니 안에서 돌렸다. 오늘도 하나 더 있었다. 건네고 싶었지만 상대가 멈춘 말을 다시 해야 하는 신호처럼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이름은 들었어요?”
그녀가 물었다.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고르면 틀린 사람을 그 자리에 세울 것 같습니다.”
세온이 대답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흐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지금 특정할 수 없는 것은 이름이었다. 이름을 모른다고 구호 요청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
오르만이 수문 쪽에서 걸어왔다. 두 사람을 보고 멈췄다가 물높이 확인을 계속했다. 세온은 그를 부르지 않았다. 자신의 말에 증언을 보태라고 요청할 순간이 아니라는 듯했다. 유리는 그 거리도 눈에 남겼다.
“명령을 기다렸다고 하셨죠.”
그녀가 말했다. 세온의 손이 종이에서 멈췄다.
“네. 누가 허락하면 제 결정이 아니게 될 줄 알았습니다. 열어도 잘못될 수 있었으니까요. 물이 어디로 갈지 저는 전부 알지 못했습니다.”
“그건 오르만 씨에게 물을 수 있는 일이었어요?”
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이 느렸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묻는 것보다 기다리는 쪽을 택했습니다.”
유리는 난간 너머 물을 봤다. 물길을 모르면 전문가에게 묻고, 아래 사람에게 알리고, 실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 선택에도 위험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험이 있다는 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의 주어를 지울 수는 없었다.
“그 한 시간의 시작과 끝을 기록한 문서가 있나요? 당신의 기억과 당시 실제 운영을 나눠 보고 싶어요.”
“정식 근무 기록과 수문 개방 기록은 있을 겁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요약에는 늦게 열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를 당신이 말했다는 것을 별도로 남길 수 있겠네요. 다만 누구에게 어디까지 전할지는 더 생각하세요.”
세온은 종이를 내려다봤다. 그는 말할 준비를 하는 것과 공개할 준비를 하는 것이 다르다는 말을 이해한 듯 오래 침묵했다. 유리는 그 시간을 단축하지 않았다. 수문 위의 교대자가 장화를 한 번 굴렀고 눈가루가 난간 아래로 떨어졌다.
“제가 두려웠다는 말만 하면, 누가 제 마음을 이해해야 할 것처럼 되겠군요.”
세온이 말했다.
유리는 그를 봤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죠. 그렇다고 그날 기다린 분이 이해해 줘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는 입술을 눌렀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유리는 위로를 덜 준 것인지 잠깐 고민했다. 그러나 자기가 곁에 있다는 이유로 그곳에 없던 사람들의 대답까지 대신할 수는 없었다.
세온은 종이를 외투 안에 넣었다.
“그 말은 적어 두겠습니다. 제 말 옆에요.”
“제 말도 정답은 아니에요.”
“그래서 이름을 붙여 두려고 합니다.”
그가 말했다. 유리는 손난로를 꺼냈다. 이번에는 먼저 하나 더 있는 것을 보여 줬다. 세온은 작은 웃음을 보이고 받았다. 그는 손을 녹이며 계속 말하지 않았다. 유리도 새로운 질문을 넣지 않았다.
시계의 담보로 보았던 빛보다 오늘의 침묵이 더 길게 느껴졌다. 같은 한 시간에 머무는 일이었지만 어제처럼 계약의 끝이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세온이 먼저 여기까지 하자고 말했고 유리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오르만에게 인사했다. 수문지기는 장갑을 고쳐 끼며 세온의 얼굴을 봤다. 과거 이야기를 들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오늘 오후에도 물높이를 함께 볼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세온은 오후 일정을 확인한 뒤 담당자를 연결하겠다고 했다. 자기가 무조건 남겠다는 대답이 아니었다. 오르만은 그것으로 됐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그 짧은 대화를 들으며 오늘 들은 과거가 현재의 일을 모두 삼키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마을에 돌아오자 교환 수레가 와 있었다. 약속한 낮보다 조금 일렀다. 조합 보관 담당자는 전날 서명한 종이와 봉한 종자 두 주머니를 다온에게 내밀었다. 유리는 상자를 받는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품종 상태를 확인할 자리만 비웠다.
삼실은 설명한 상태와 맞았다. 종자는 포장이 젖지 않았고 채종 표찰이 붙어 있었다. 무게와 겉상태를 함께 확인한 뒤 인수 기록에 서명했다. 아직 싹을 틔워 보지 않았으므로 발아 결과까지 확인됐다고 쓰지는 않았다.
리넷이 주머니를 들고 저장실로 들어갔다. 은빛콩 선반에 바로 놓으려다 유리가 손바닥을 들자 멈췄다. 새로 받은 콩은 잠든 상태로 맞는 곳에 따로 보관해야 했다. 리넷은 자기 실수를 알아채고 서늘한 선반을 정리했다.
“봄도 같이 오면 편했겠죠.”
그녀가 말했다.
“편한 만큼 돌려줄 것도 같이 왔겠죠.”
유리는 답하며 빈 받침을 건넸다. 리넷은 이번에는 웃었다. 새 종자는 누가 버틴 결과를 대신 지워 주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년 파종에서 고를 수 있는 씨앗이 조금 늘었다.
세온은 운반자에게 추가 구간의 품삯과 다음 상자 회수 조건이 처리됐는지 확인했다. 마부는 점심을 먹고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유리는 그 수레의 빈자리를 봤다. 자기도 이 길을 타고 다음 의뢰지로 갈 수 있었다. 아직 돌아갈 편을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문득 무거워졌다.
보관 담당자는 떠나기 전에 유리에게 조합의 짧은 소식을 전했다. 남쪽 온실의 다음 점검 일정이었다. 새로 맡으라고 강요한 일은 아니었다. 유리는 연락을 받고도 답을 미뤘다는 것을 기억했다. 로델의 겨울 안에서도 자기 일의 길은 계속되고 있었다.
점심 뒤 세온이 짧게 적은 메모를 내밀었다. 아침에 말한 내용 가운데 현재 구계약과 맞춰 볼 질문만 골랐다고 했다. 수문 운영 시각, 담보 기록이 옛 경로에 노출된 때, 종전 계약의 종료 근거. 자기 감정의 설명은 뺐다.
“이 질문들을 출장소에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유리는 원본을 읽고 허용 범위를 확인했다. 세온은 자신의 구호 지연 증언을 아직 공개하지 않았다. 현장 운영과 계약 기록을 물으려는 것과 그 고백을 대신 제출하는 것은 달랐다.
유리는 자기 관찰도 필요한 만큼만 묶었다. 온실의 잎맥 서리, 숲 뿌리 옆 겹친 홈, 공급 중단과 수문 조정 뒤의 변화. 누가 위조했다거나 왜 그랬다고 쓰지 않았다. 직접 본 것만으로도 구계약 종료 여부를 다시 물을 이유는 있었다.
다온은 공동회가 예전 계약의 원본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보관한 사본은 끝난 것으로 적혀 있었고 원본 서명자 일부의 이름만 남아 있었다. 리넷이 어머니 공책을 들어 보였다. 유리는 그 공책 전체를 가져갈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림을 허락받은 부분만 별도로 대조할 수 있었다.
“오늘 바로 가실 거예요?”
리넷이 물었다. 세온은 해 지기 전에 돌아올 길을 확인했다. 북부 출장소는 마을 밖의 역참 가까이에 있었고 짧은 수레길로 닿을 수 있었다. 다온은 오늘 담당자 근무가 남았는지 먼저 연락해 보자고 했다.
유리는 순간 자기 이름을 묶음에 쓰려다 멈췄다. 첫 계약은 끝났다. 계약 결과에 관한 설명과 원본의 처리 문의는 할 수 있었지만, 재심 절차 전체를 맡는 일은 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동행할 범위를 세온에게 분명히 말했다.
“제가 본 계절 반응과 첫 계약의 종료를 설명할게요. 그다음 조사까지 맡겠다는 답은 아직 못 해요.”
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범위로 부탁드립니다.”
그의 대답이 빨라 유리는 오히려 잠깐 멈췄다. 그는 붙잡는 조건을 보태지 않았다. 유리는 자기 선택이 존중되는 자리에서만 남고 싶은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출장소의 근무 확인은 역참을 오가는 사람에게서 돌아왔다. 오늘은 문서 수령만 가능하고 대조 상담은 다음 날 아침이라고 했다. 세온은 오늘 무리해 갔다가 길에서 해를 넘기지 않기로 했다. 유리는 작은 자료 묶음을 닫았다.
저녁 무렵 둘은 빈 온실을 한 번 더 지나갔다. 새 계절을 열러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담당 교대자가 남은 서리와 잠금 상태를 보여 줬다. 시계가 빠진 상자 홈은 유리가 이미 닦아 뒀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놓이지 않았다.
세온은 그 빈 곳을 보고 자기 주머니를 한 번 만졌다. 유리는 그에게 아침의 말을 후회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묻는 순간 그녀가 원하는 답을 듣게 될지도 몰라 말을 고르다, 다른 질문을 했다.
“내일도 오늘처럼, 그만두고 싶으면 말씀하실 수 있어요.”
그는 유리를 보았다.
“당신도요.”
짧은 답이었다. 그녀는 그 말이 머물라는 부탁보다 오래 마음에 남을 것 같았다.
찻방으로 돌아오니 출장소에서 온 기존 계약 사본이 탁자에 펼쳐져 있었다. 다온이 내일 가져갈 서류를 미리 찾아 둔 것이었다. 유리는 종료 확인 부분을 읽었다. 끝났다고 찍힌 날짜 옆에 당사자 확인은 별도라는 작은 문장이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다온이 물었다.
“끝났다는 건 보관소 말인데, 우리는 뭘 돌려받았는지 어디서 봐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