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는 꽃잎을 유리병에 담고 마개를 닫았다.
병 안쪽에 서리가 맺혔다. 반대로 병을 쥔 손바닥은 뜨거웠다. 온실 한쪽에서 따뜻함이 생겨날 때, 다른 어딘가에서는 같은 만큼 빼앗기고 있다는 신호였다.
“창문 닫지 마세요.”
리넷이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추워지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 열어 둬야 해요. 공기부터 확인할게요.”
유리는 병을 선반에서 떨어진 돌바닥에 놓았다. 리넷에게 물 온도를 적어 달라고 하고, 다온에게는 발아를 시작한 씨앗 수를 세어 달라고 부탁했다.
세온은 그동안 회중시계를 보고 있었다.
자기 물건인데도 손을 뻗지 않는 모습이, 유리에게는 오히려 눈에 걸렸다.
“시계는 원래 이렇게 멈춰 있었어요?”
“네. 고치려고 한 적도 없습니다.”
“못 고친 게 아니라요?”
세온이 고개를 들었다. 비난으로 들렸을까 싶어 유리는 말을 덧붙였다.
“둘은 다른 문제라서요.”
“고치지 않은 겁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시계로 내려갔다. 유리는 그 대답 뒤에 무엇이 있는지 묻지 않았다. 알고 싶은 마음과 물을 권리는 늘 같이 오지 않았다.
손바닥에 흙을 얹어 봤다. 바깥으로 밀려나야 할 겨울이 온실 가운데로 둥글게 말려들고 있었다. 그녀가 빌려 온 볕은 경계를 따라 제대로 돌고 있었다. 그 안에 다른 계절의 길이 겹쳐진 것이었다.
“이 온실에 전에 계절을 빌린 적 있어요?”
다온이 씨앗 상자 위에 손을 얹었다.
“지난 영주 때. 기록은 있을 거예요.”
“끝난 계약이라고 들었습니다.”
세온이 말했다.
리넷은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유리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재촉하지 않았다. 아직 말의 모양을 만들고 있는 얼굴이었다.
잠깐 뒤 리넷이 선반 아래에서 낡은 공책을 꺼냈다.
“엄마가 여기 일을 했어요. 기록이 전부 맞는지는 몰라도, 꽃 피는 날짜는 틀린 적 없어요.”
공책에는 작은 그림들이 있었다. 잎맥, 콩의 금, 같은 꽃의 첫날과 마지막 날. 글씨는 빠르고, 그림은 오래 들여다본 사람의 손이었다.
나흘꽃 옆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종이 울린 날엔 꽃이 일찍 진다.
밖에서 서문의 종이 다시 울렸다.
세온이 고개를 돌렸다. 유리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종이 울릴 때마다 같은 방향을 봤다. 소리의 근원을 확인하는 사람보다, 이미 아는 말을 다시 듣는 사람에 가까웠다.
“수문을 보러 가야겠어요.”
유리가 말했다.
세온의 표정이 가늘게 닫혔다.
“제가 먼저 다녀오겠습니다.”
“제 질문에 대신 대답해 줄 수는 없잖아요.”
“길이 얼었습니다.”
“그럼 길을 아는 분이 같이 가면 좋겠네요.”
그는 말없이 외투를 들었다. 유리는 그가 방금 거절하려 했던 게 길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걸음을 맞춰 나왔다. 말할 준비가 됐을 때 옆에 있을 수 있도록.
온실을 나서자 찬 공기가 뺨을 쳤다. 실내에 잠깐 머물렀을 뿐인데 겨울이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세온은 유리에게 새 담요를 건넸다.
“두 장 중 하나는 여기서 쓰십시오.”
그녀는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온실에 있던 볕 냄새가 남아 있었다. 옆에서 걷는 세온에게는 얼음과 젖은 나무 냄새가 났다.
서문으로 가는 길에서 두 사람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 침묵이 불편해질 때마다 세온이 먼저 얼음 없는 발 디딜 곳을 찾았다. 유리는 그의 뒤만 밟지 않고 옆의 자갈길을 골랐다.
성벽 아래에서 아이 하나가 달려오다 멈췄다. 온실을 훔쳐보던 아이였다.
“꽃 폈어요?”
유리는 허리를 조금 굽혔다.
“아직. 씨앗이 기지개 켜는 중이야.”
아이는 두 팔을 높이 들었다.
“이렇게요?”
“그것보다 조금 작게.”
아이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온이 옆에서 짧게 웃었다. 얼음 낀 길에서 처음 들은 가벼운 소리였다.
아이가 돌아간 뒤 유리는 물었다.
“자주 웃는 편은 아니시죠?”
“그렇게 보입니까.”
“아까 온실 병 밑에 담요 놓으신 거 보고 조금은 웃었어요.”
“병도 깨질 수 있으니까.”
“네. 그렇게 생각할게요.”
그녀가 웃음을 참자 세온도 더 설명하지 않았다. 덕분에 둘 사이의 걸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길 중간에서 유리의 신발 끈이 풀렸다. 추운 탓에 손끝이 둔해져 매듭을 두 번 놓쳤다. 세온이 옆에서 멈췄다.
그가 몸을 숙이려 하자 유리가 손을 들었다.
“이건 제가 할 수 있어요.”
세온은 곧장 몸을 폈다. 대신 바람이 부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리는 그가 기다리는 동안 천천히 매듭을 지었다.
일어서려는데 세온이 손을 내밀었다. 끈을 묶는 손과 일어서는 손은 다르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유리는 잠깐 망설이다 그 손을 잡았다.
장갑 너머의 손은 크고 차가웠다. 힘은 그녀가 몸을 일으키는 만큼만 들어왔다. 똑바로 선 뒤 유리가 손을 놓자 그도 바로 놓았다.
그 짧은 순간에 받은 도움을 어째서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은지, 유리는 알지 못했다.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그가 자신의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까 손 녹이는 일, 끝까지 안 하셨죠.”
세온이 뒤늦게 손을 봤다.
“잊었습니다.”
“그렇게 자주 잊으면 손이 먼저 항의할 텐데.”
유리는 주머니에서 납작한 주머니를 꺼냈다. 말린 씨앗 껍질을 넣은 손난로였다. 온실 난로 위에서 잠깐 데운 것이었다.
“돌아갈 때 돌려주세요. 제 것도 한 개 더 있으니까.”
그는 받기 전에 그녀의 주머니를 봤다. 작은 온기를 받는 일에도 이 사람에게는 확인할 것이 있었다. 유리는 그 기다림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유리가 다른 손난로를 흔들어 보여 주자 그제야 손을 내밀었다.
“확인까지 하시네요.”
“한 개만 있는데 주시는 것일까 봐.”
그녀는 그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보통은 고맙다는 말이 먼저 왔다. 누군가에게 온기를 주고도 자기 손이 괜찮은지 확인받는 일은 드물었다.
바람이 불어 담요 끝이 날렸다. 세온은 붙잡으려다 손을 거두고, 대신 유리에게 알려 줬다. 그녀가 직접 옷깃을 여몄다.
“로델에 봄이 오면 어디가 먼저 녹아요?”
유리가 물었다.
“서문 돌계단이요. 해가 비스듬히 닿아서.”
그의 대답은 뜻밖에 빨랐다.
“오래전에 보셨겠네요.”
“네. 그래도 위치는 기억합니다.”
유리는 앞으로 이어진 흰 길을 봤다. 누군가 기억해 둔 따뜻한 자리가 있다는 건, 겨울을 지나는 데 조금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수문 앞에는 오르만이 있었다. 큰 목도리를 코까지 올린 채 물높이 눈금을 보고 있었다. 세온을 발견하자 말없이 눈길을 내줬다.
유리는 수문 벽에 손을 대지 않고 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한쪽으로 빨려 갔다. 돌 틈에는 흰 꽃잎이 끼어 있었다.
병 안의 것과 같은 꽃잎이었다.
“여기는 겨울에 꽃잎이 자주 떠내려오나요?”
오르만의 눈이 좁아졌다.
“위쪽 숲에서 가끔. 옛날에는.”
“지금은요?”
그는 물을 봤다.
“지금은 얼어 있지.”
유리는 난간 아래의 흐름을 살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렀다. 그런데 꽃잎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물과 계절의 길이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판을 꺼냈다. 볕을 확인할 때 쓰는 평범한 도구였다. 꽃잎이 비친 자리만 유리판 안쪽에 물방울이 맺혔다.
이 온실에만 생긴 문제가 아니었다.
“옛 계약이 수문과도 연결됐나요?”
오르만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온이 그를 대신하지 않고 기다렸다. 한참 뒤 수문지기가 목도리를 내렸다.
“그날, 물을 열었을 때부터야.”
세온의 손이 난간에서 떨어졌다.
유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같은 한 시간을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보고 있는 쪽은 달랐다.
온실로 돌아오는 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큰 눈송이 몇 개가 담요에 앉았다. 유리가 털어 내기도 전에 세온이 걸음을 멈췄다.
“담보 기록을 보셔야겠습니까.”
유리는 그를 봤다.
“제가 원해서 여는 건 아니에요. 그 시간과 지금의 계절이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보면 저에 대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제가 정할게요.”
세온의 눈이 흔들렸다.
유리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그 기록에 없는 당신도, 제가 아직 다 안 건 아니잖아요.”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 눈송이가 속눈썹에 내려앉았다가 녹았다.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온실 안에서 두 사람은 작은 탁자를 마주했다. 리넷과 다온은 자리를 비켜 줬다. 기록을 확인하는 데 모두의 시선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유리는 세온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시계를 탁자 가운데 놓고 뚜껑을 열었다.
“여기서 보이는 것만 볼게요. 그만두고 싶으면 말해 주세요.”
세온이 시곗줄 끝을 잡았다. 유리는 인장을 시계 옆에 댔다.
초침이 움직였다.
소리가 먼저 왔다. 물소리였다. 유리창 너머의 온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시계 위에 비친 작은 빛 안에서, 일곱 해 전의 수문이 드러났다.
지금보다 젊은 세온이 서 있었다. 코트도 직함도 없었다. 손에는 열지 않은 명령서가 있었다.
물 건너편에서 누군가 불렀다.
문을 열어 달라고.
젊은 세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난간에 걸린 손이 떨렸다. 곁의 오르만이 수문 쪽을 가리켰다. 빛의 안쪽에서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탁자 위의 초침은 느리게 한 칸씩 움직였다.
유리는 옆에 앉은 현재의 세온을 보았다. 그는 빛을 외면하지 않았다. 대신 의자 끝을 너무 세게 쥐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찻잔을 그의 가까이에 옮겼다. 손을 잡는 것보다 지금 필요한 것이 뭘지 몰랐다. 그가 찻잔 손잡이를 쥐었다. 손가락의 힘이 조금 풀렸다.
빛 안의 수문이 마침내 열렸다.
흐르는 물 사이로 사람들이 건너왔다. 마지막 사람이 둑에 쓰러졌을 때 젊은 세온이 달려갔다. 기록의 끝에 남은 것은 영웅의 얼굴도, 누군가를 해쳤다는 장면도 아니었다.
늦게 움직인 사람이, 늦지 않으려고 뛰는 뒷모습이었다.
유리는 시계 옆 인장을 거뒀다.
“여기까지 볼게요.”
세온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 시간 먼저 열었더라면.”
그의 목소리가 온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다음 말은 제가 대신할 수 없어요.”
유리는 천천히 말했다.
“다만 지금 수문에는 그날의 꽃잎이 있어요. 누군가의 잘못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남았어요.”
세온은 한참 그녀를 봤다. 위로를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위로가 아닌 말 앞에서 조금씩 숨을 돌렸다.
“그러면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알려 주십시오.”
유리는 리넷의 공책을 탁자에 펼쳤다. 나흘꽃 그림 아래, 지워진 줄이 하나 더 있었다. 햇빛을 비스듬히 받자 연필 자국이 드러났다.
꽃이 지는 곳과 봄이 오는 곳이 다르다.
그때 온실 천장에서 차가운 것이 유리의 손등에 떨어졌다.
눈이었다.
리넷이 뛰어 들어왔다.
“밖에는 그쳤는데요.”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온실 안에서만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발아하던 은빛콩의 싹이, 눈송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