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빌려 달라는 편지에는 꽃 대신 말라붙은 콩 한 알이 들어 있었다.
한유리는 손바닥 위에 콩을 올려놓았다. 표면의 은빛 무늬가 거의 지워져 있었다. 종자 주머니에서 굴러다닌 씨앗이 아니었다. 얼음 밑에서 겨우 건져 낸 씨앗이었다.
편지 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흘이면 됩니다. 살아 있는지 확인할 시간만 주십시오.
유리는 편지를 접고 수레를 돌렸다. 남쪽으로 가면 마른 침대와 다음 일감이 있었다. 북쪽으로 가면 겨울과, 자신도 정확히 모르는 사흘이 있었다.
수레 바퀴가 눈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씨앗한테 확인만 하겠다니. 그런 사람은 대개 끝까지 보게 되는데.”
그녀가 혼잣말을 했다. 마부는 못 들은 척 담요를 한 장 더 건넸다.
로델 영지는 눈 속에서 발견됐다. 성벽보다 먼저 연기가 보였다. 굴뚝마다 연기 색이 엷었다. 장작을 아끼는 마을의 연기였다.
성문 앞에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검은 외투 어깨에 눈이 소복했다. 마중 나온 사람이라기엔 수행원도 깃발도 없었다. 그는 수레에서 내리는 유리에게 다가오다가, 그녀가 무거운 나무 상자를 쥔 걸 보고 걸음을 멈췄다.
“들어 드려도 되겠습니까.”
“기울이지 않으시면요.”
남자는 상자 바닥부터 받쳤다. 유리는 손을 놓기 전에 무게가 제대로 옮겨 갔는지 확인했다. 그가 상자를 안은 채 기다렸다.
“안에 봄이 들었습니까?”
“절반쯤요. 나머지 절반은 여기서 구해야 해요.”
남자의 시선이 황량한 길로 향했다.
“여기엔 겨울밖에 없는데.”
“그건 제가 보고 정할게요.”
그가 아주 조금 웃었다. 눈이 쌓인 얼굴에도 웃을 자리는 남아 있었다.
“세온입니다. 편지를 보냈습니다.”
“한유리예요. 온실부터 볼 수 있을까요?”
세온은 곧장 앞장섰다. 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과 갈라지는 곳이었다. 그는 따뜻한 응접실부터 권하지 않았다. 유리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온실은 낮은 언덕에 있었다. 유리창 세 동 중 두 동은 천으로 덮여 있었고, 남은 한 동만 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서는 어린 견습이 얼음 낀 물뿌리개를 품에 안고 있었다.
“리넷입니다. 저거 녹이는 중이에요.”
리넷이 물뿌리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장갑 낀 손끝이 붉었다.
유리는 창고 선반의 종자 상자부터 열었다. 은빛콩, 짧은밀, 노란잎무. 이름 아래에는 채종 날짜와 밭 이름이 적혀 있었다.
누군가 겨울이 오기 전에 봄의 순서를 정리해 뒀다.
“난방은 언제 멎었어요?”
“나흘 전이요. 고쳤는데 다시 얼어요.”
리넷이 대답했다. 세온은 문가에 서 있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걸 보고 유리가 물었다.
“여기는 들어오시면 안 되는 곳인가요?”
“눈이 묻어서.”
그는 자기 장화를 봤다. 유리는 입구의 솔을 턱으로 가리켰다.
“털고 들어오세요. 일이 많아요.”
세온은 고개를 숙이고 장화를 털었다. 영주 대행이 입구에서 발을 구르는 소리가 온실 안에 작게 울렸다. 리넷이 웃음을 참다가 물뿌리개 뒤로 얼굴을 숨겼다.
유리는 손으로 흙을 만져 보고, 온도 기록판을 읽었다. 씨앗 속은 아직 죽지 않았다. 하지만 온기를 급하게 넣으면 겉껍질만 벌어지고 속이 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종자 상자 셋을 안쪽 선반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세온이 하나씩 날랐다. 외투 자락이 흙바닥에 끌리자 리넷이 작은 옷걸이를 내밀었다.
외투가 벗겨졌다.
유리는 그제야 세온의 왼쪽 소매 끝을 봤다. 젖어 있었다. 눈 때문이 아니었다. 천이 손목까지 단단하게 얼어 있었다.
“수문에 계셨어요?”
그가 손을 내렸다.
“새벽에 잠깐.”
“잠깐의 길이가 사람마다 다르죠.”
유리는 난롯가 의자를 가리켰다. 세온은 앉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그를 봤다.
“제가 확인하는 동안 할 일입니다. 손 녹이기.”
리넷이 이번에는 소리 내 웃었다. 세온은 마침내 의자에 앉았다. 명령에 익숙한 사람이 부탁을 수행하는 모습이 조금 어색했다.
유리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유리병 여덟 개와 씨앗 인장이 있었다. 병마다 지난 계절의 볕이 물처럼 고여 있었다. 화려한 빛은 아니었다. 비 오기 직전 빨랫줄에서 걷어 온 옷의 온기에 가까웠다.
“이 온실 한 동에만 사흘. 종자 숨이 돌아오는 데까지예요. 영지 전체의 겨울을 없앨 수는 없어요.”
“그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세온이 말했다. 유리는 그의 얼굴을 봤다. 바라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라기엔 너무 조심스러웠다.
“바라는 건 괜찮아요. 가능한 일과 구분하면 돼요.”
그는 손을 펴 난로 쪽으로 향했다. 손등의 흉터가 불빛에 잠깐 드러났다.
“그럼, 지금은 씨앗만 부탁드립니다.”
그 대답을 들은 뒤에야 유리는 계약서를 꺼냈다.
길지 않은 종이였다. 구획, 기간, 반환할 가을 결실. 일이 잘못될 때 멈출 수 있다는 줄. 공동 열쇠를 가진 주민 대표가 함께 읽어야 한다는 줄.
리넷이 다온을 데리러 달려갔다. 곧 찻방 주인이 둥근 빵과 열쇠를 안고 들어왔다.
“온실 빌리는 데 빵도 필요해요?”
다온이 물었다.
“제게는요. 점심을 못 먹어서.”
유리는 빵을 받았다. 따뜻한 속에서 작은 김이 올랐다. 그녀가 첫입을 삼킬 때까지 다온은 질문을 기다려 줬다.
그러고 나서 식량 이야기를 했다. 다음 수확에서 돌려줄 결실이 얼마나 되는지, 흉년이면 어떻게 되는지. 세온은 중간에 대신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는 자신이 아는 범위와 아직 모르는 범위를 나눠 말했다.
끝에 가서 다온이 열쇠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럼 우리 씨앗이니까, 우리도 같이 봐야겠네요.”
“네. 제가 떠난 뒤에도요.”
다온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든 듯 빵을 하나 더 남겨 놓았다.
잠깐 바람을 보러 나왔을 때, 유리는 온실 뒤에 작은 발자국들이 모여 있는 걸 봤다. 아이들이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리넷이 그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은 들킨 참새처럼 흩어졌다가, 멀리서 다시 모였다.
“무슨 꽃이 피냐고 매일 물어요.”
리넷이 말했다.
“채소 온실인데.”
“알아요. 그냥 뭐라도 피면 좋겠대요.”
유리는 주머니에서 편지에 들어 있던 콩을 꺼냈다. 겨우 한 알이었다. 그런데 이 한 알을 기다리는 얼굴은 자꾸 늘어났다.
세온이 뒤따라 나왔다. 그는 유리 옆이 아니라 반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 유리가 서 있는 자리에 바람이 덜 오도록, 문을 몸으로 받친 채였다.
“따뜻한 방을 준비했습니다. 밤에는 거기서 쉬시면 됩니다.”
“온실 옆이 좋아요. 첫날은 자주 봐야 해서요.”
“그러면 의자를 옮기겠습니다.”
“침대는 없어요?”
그가 말문을 멈췄다. 유리는 웃었다.
“농담이에요. 의자면 됩니다. 대신 담요는 두 장 부탁해요.”
세온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잊지 않겠다는 표시처럼 보였다. 유리는 그 사소한 동작이 의외로 오래 눈에 남았다.
그가 돌아서기 전 그녀는 물었다.
“정말 사흘이면 된다고 생각하셨어요?”
대답은 곧장 오지 않았다. 세온의 시선이 아이들이 남긴 발자국으로 내려갔다.
“아니요. 사흘을 부탁드리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리는 손안의 콩을 엄지로 한 번 굴렸다. 차가운 껍질이 손의 온기를 조금씩 받아들였다.
“전부를 먼저 정해 놓지는 마세요. 씨앗은 아직 대답 안 했으니까.”
그는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들었다. 처음 성문에서 봤을 때보다 눈빛이 조금 덜 멀었다.
온실로 돌아가자 세온은 정말 담요 두 장을 가져왔다. 한 장은 의자에, 한 장은 유리가 놓은 상자 곁에 접어 뒀다. 봄이 든 병도 추울까 봐서인 듯했다.
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 담요 위에 상자를 올렸다.
담보 이야기만 남았을 때 온실이 조용해졌다.
“금고 열쇠를 가져오겠습니다.”
세온이 일어서려 했다.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금은 받지 않아요. 이름 붙일 수 있는 한 시간이 필요해요.”
“한 시간.”
그가 낮게 되풀이했다.
“본인이 겪은 시간의 기록이에요. 기억을 잃는 건 아니에요. 계약이 끝나면 그대로 돌려드리고요. 남에게 보여 줄 권리도 제게는 없어요.”
세온의 손이 셔츠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느다란 시곗줄이 딸려 나왔다. 은색 회중시계였다. 뚜껑 가장자리가 마모돼 손에 익은 물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뚜껑을 열지 않은 채 탁자에 놓았다.
“이 시간도 가능합니까.”
유리는 시계에 손을 대지 않았다.
“어떤 시간인데요?”
“끝나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더 정확한 이름이 필요해요.”
세온은 유리창 밖을 보았다. 날이 밝은데도 서문 쪽에는 종이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의 손가락이 조금 굳었다.
유리는 기다렸다. 계약 때문에 남의 상처를 빨리 말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서문 수문에서, 누군가의 부탁을 듣고 대답하지 못한 한 시간.”
다온이 시선을 내렸다. 리넷은 창가의 상자를 정리하는 척 등을 돌렸다. 모두가 아는 일이거나, 모두가 묻지 않기로 한 일이었다.
유리는 종이 위에 세온이 말한 문장을 그대로 적었다.
“이 이름으로 맡기겠어요?”
“네.”
“지금도 바꿀 수 있어요.”
세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시계를 받아 나무 상자의 얕은 홈에 놓았다. 시계 안에서 바늘이 딱 한 번 움직였다. 열두 시와 한 시 사이에서 멈춘 초침이 보였다.
유리는 병의 볕을 한 방울씩 흙에 떨어뜨렸다. 리넷이 창문을 조금 열고, 다온이 공동 열쇠를 문틀의 홈에 끼웠다. 세온은 그녀가 부탁한 대로 선반을 붙잡았다.
누군가의 손길 하나만으로 오는 봄이 아니었다.
먼저 냄새가 바뀌었다.
차가운 돌 냄새 사이로 젖은 흙이 올라왔다. 창에 붙어 있던 서리가 아래부터 얇아졌다. 리넷의 물뿌리개 안에서 물이 찰랑거렸다.
유리가 눈을 감았다. 이 작은 공간의 경계를 따라 볕이 돌았다. 문 밖으로 새지 않도록, 씨앗이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세온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꽃을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문을 두드렸는데 누군가 정말 열어 준 사람의 얼굴이었다.
유리는 괜히 소매를 한 번 더 접었다.
“이제 시작이에요. 아직 살린 건 아니고요.”
“압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리넷이 선반 아래서 작은 탄성을 질렀다. 은빛콩 하나의 표면에 가느다란 금이 생겼다. 죽은 씨앗이 갈라지는 모양과는 달랐다. 안에서 밀어내는 힘이었다.
유리는 숨을 내쉬었다.
봄이 도착했다.
그때 시계 안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렸다.
그녀는 상자를 내려다봤다. 닫힌 회중시계 틈으로 흰 가루가 흘러나왔다. 온실의 흙에 닿은 가루는 작은 꽃잎으로 펼쳐졌다.
네 장의 길고 흰 꽃잎.
늦봄에만 피는 나흘꽃이었다.
유리는 아직 병 일곱 개의 마개를 열지도 않았다. 이 온실에 빌려 준 봄은 사흘뿐이었다.
세온이 그녀의 표정을 봤다.
“잘못됐습니까?”
유리는 꽃잎에 손을 대려다 멈췄다. 꽃잎 가장자리가 순식간에 얼고 있었다.
사흘짜리 봄 안에서, 다른 봄이 죽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