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서린은 자기 서명이 들어간 종이를 다시 보았다.
10월 27일.
날짜는 더 이상 미래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종이가 어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보존 담당자가 봉인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 서린은 회사에서 새로 받은 현장 방문 안내를 출입 담당에게 보여 줬다.
안전 확인을 끝내러 온 방문은 아니었다. 남은 위험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왔다.
비는 그쳤지만 외부 계단은 젖어 있었다. 어제 옥상 문 앞에 남았던 발자국은 이미 흐려졌을 것이다. 서린은 볼 수 있었을 때 찍은 사진이 있다는 데 안도하면서도, 사진에 없던 것을 지금 기억으로 채우지 않기로 했다.
관리실에 백하은이 와 있었다.
목발 옆에 가방을 두고, 창가 의자에서 발을 올린 채 앉아 있었다. 정윤재가 출입 담당과 이야기를 나누다 서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자료 인계와 추가 위험 확인을 맡을 사람들을 연결하는 중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실 건 아니죠?”
서린이 하은에게 물었다.
“네. 여기서만 보여 드리기로 했어요. 병원에서도 돌아다니지 말랬고요.”
하은은 봉투를 꺼냈다. 어제 구겨진 흰 봉투가 아니라 바닥이 넓은 투명 서류 봉투였다.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면에는 종이를 덧대어 가렸다.
“엄마한테 물었어요. 주소 부분만 보여 드려도 된대요. 다른 사람 편지는 제가 뜯은 게 아니고요.”
서린은 의자를 가져와 같은 높이로 앉았다. 서서 내려다보면 하은이 계속 고개를 들어야 했다. 자료를 받는 것보다 먼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었다.
첫 번째 봉투에는 주소가 네 줄로 적혀 있었다.
도림시 은담생활관.
3동 하층 07.
수신인 부분은 종이 아래 가려져 있었다. 우편 요금 표시는 오래됐고 가장자리는 여러 번 만져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층이 반 층 아래라는 뜻인가요?”
“저는 그렇게 기억해요. 엄마는 계단 밑방이라고 불렀어요.”
서린은 그렇게 기억한다는 말을 먼저 적었다. 하은은 여기서 자란 사람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들은 기억도 갖고 있었다. 직접 와서 본 때와 전해 들은 때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하은이 두 번째 종이를 꺼냈다. 몇 년 전 안내문 사본이었다. 동 이름이 바뀌면서 우편물 수령 장소를 관리실로 모은다는 내용이었다. 옛 번호와 새 번호를 맞추는 표는 없었다.
“이때 서관으로 바뀌었대요. 그런데 엄마 주소는 새 번호를 안 받았어요.”
서린은 현재 도면을 펼쳤다. 2층 207호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뗐다.
하층 07이 207호일 이유는 없었다.
번호가 같다는 것은 사람을 잘못된 문으로 보내는 가장 쉬운 이유였다. 어제 214호 앞에서 빈방만 들여다본 자신이 떠올랐다.
도운이 출입 확인을 마치고 들어왔다. 그는 하은에게 발목 상태를 묻고 자료를 멀리서 보았다. 손에 든 것은 새 도면이 아니라 어제 그렸던 선로 회상도였다.
“옛 건물은 층마다 열 개씩 번호 붙이지 않았대요. 공사 구역마다 다시 시작했을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다는 뜻이죠?”
서린이 확인했다.
“네. 제 기억으로 방을 찾아가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하은이 작게 웃었다. 웃으려다 아픈 발을 조금 옮겼고, 서린은 가방을 의자 옆으로 비켜 놓았다. 화면 속에서 주저앉던 사람은 오늘 의자와 발받침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윤재가 건물 구조 확인에 쓸 자료 범위를 물었다. 봉투 원본은 하은이 가져가고, 동의한 주소 부분의 사본만 남겼다. 서린은 사본 가장자리에 누구에게서 언제 보았는지 적었다. 우편물이 있다는 것만으로 지금도 거주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한 줄도 붙였다.
기준은 관리실 문턱에 서 있었다.
“그 주소는 예전 겁니다.”
그가 말했다.
“네. 그래서 지금 도면하고 비교하려고요.”
“이미 나가신 분들이에요.”
하은이 봉투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길어지려는 말을 삼키는 것처럼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나갔다는 날짜가 언제인지 저희가 계속 묻잖아요. 엄마가 남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기록에서 어디로 옮겼는지 확인해 달라는 거예요. 사람이 다른 데 살게 된 것하고, 이 주소에 산 적이 없던 게 되는 건 다르니까요.”
기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린은 하은의 말을 줄여 정리해 주지 않았다. 지금은 긴 문장 그대로 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보관칸 확인을 맡은 직원이 관리실로 왔다. 어제 확보한 복제키로 안쪽 보관칸 문이 열렸다고 했다. 연결부 출입은 여전히 제한됐고, 서린은 담당자와 함께 문 밖의 안전 구역에서 위치만 확인할 수 있었다.
하은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녀는 의자에서 서린에게 봉투를 들어 보였다.
“사진으로요. 저는 여기 있을게요.”
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를 가진 사람이 자료가 있는 모든 곳까지 가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연결부 계단은 낮에도 어두웠다. 바깥빛이 꺾여 들어오지 않는 자리였다. 직원의 조명 아래, 파란 문 위에서 떼어진 표찰의 나사 구멍이 다시 보였다.
서린은 계단 수를 세기보다 바닥 높이를 비교했다. 서관 2층에서 내려간 반 층, 동관 계단 중간의 참. 하층이라는 말이 붙을 만한 위치였다. 그렇다고 여기 방 번호가 곧 07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보관칸 문은 파란 문 안쪽 통로 옆에 있었다. 안에 들어가지 않고 직원이 비춘 문틀을 봤다.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 아래 희미하게 숫자 곡선 하나가 드러났다.
7인지 2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보인다고 칠을 벗기진 마세요.”
서린이 말하자 직원은 이미 손을 멈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할 일은 보이는 상태를 남기는 것이었다. 번호를 얻겠다고 표면을 바꾸면 나중에 다른 사람이 볼 수 없었다.
문 옆의 좁은 틈에 우편함 받침대가 남아 있었다. 함 자체는 없었고 벽에 세로 자국만 여럿 나 있었다. 서린은 현재 도면의 배관 두께와 받침대 위치를 나란히 보았다. 도면에서 막힌 벽이 된 곳에, 편지를 받을 공간이 있었던 셈이었다.
직원이 안쪽 물품을 촬영한 사진을 보여 줬다. 가방과 취사도구, 고무줄로 묶은 우편물이 있었다. 봉투는 열지 않았고 겉면의 주소만 확인 중이었다. 가장 위 봉투에는 3동 하층이라는 글씨와 최근 소인이 찍혀 있었다.
주소가 살아 있다는 것과 사람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달랐다.
그런데 아무도 받지 않는 주소로 왜 우편이 계속 왔을까.
서린은 문 밖에서 보관칸과 계단참 사이 거리를 확인했다. 하은이 갇힌 통로와 우편물 보관 위치는 이어져 있었지만 같은 칸은 아니었다. 방 하나로 뭉뚱그리면 출입 경로도 사라졌다.
도운은 계단 위에서 사진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벽 모서리에 남은 파란 띠 끝을 가리켰다. 직원이 거리를 두고 비춰 주었다. 그것은 케이블이 아니라 옛 우편함 받침대를 묶었던 끈이었다.
“이건 제가 한 게 아니에요.”
“방식도 달라요?”
“네. 그냥 묶어 놓은 겁니다.”
서린은 어제의 매듭 하나가 오늘 모든 파란 끈의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걸 적었다. 도운은 그녀가 쓰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조금 웃었다.
“색깔 하나 잘못 골랐다고 평생 현장마다 불려 다닐 뻔했네요.”
“선 남긴 건 따로 적을 거예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둘은 같은 속도로 계단을 올라왔다. 웃음이 책임을 지우지는 않았지만, 대답을 끝낼 공간은 만들었다.
관리실에서 하은은 처음 보는 표를 만들고 있었다. 옛 이름, 들은 위치, 직접 확인한 위치. 세 칸 중 마지막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빈칸이 많아도 되죠?”
그녀가 물었다.
“네. 옮겨 적다가 새 주소를 만들지만 않으면요.”
서린은 하은이 적은 하층 07 옆에 연결부 보관칸의 위치를 확정 주소로 쓰지 않았다. 대신 후보 위치라고 적고, 어떤 흔적이 뒷받침하는지 사진 번호를 연결했다. 받침대와 봉투 주소, 층고가 같은 방향을 가리켰지만 아직 옛 공식 배치표가 없었다.
기준이 서랍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연락처가 적힌 부분은 안쪽으로 접어 감추고, 뒷면의 작은 그림을 내밀었다.
예전 물품 보관 위치를 그린 손지도였다.
동관은 1동, 서관은 3동. 중간 계단 아래에 하층이라는 말이 있었다. 하층의 첫 방과 끝 방을 잇는 선은 그려져 있었지만 문 번호는 일부만 적혔다.
“이건 누가 그렸어요?”
“제가요. 짐 찾으러 오면 설명하려고.”
“언제요?”
“정확한 날짜는 모릅니다. 작년에는 갖고 있었습니다.”
서린은 지도를 받아들기 전에 직원에게 출처를 함께 남겨 달라고 했다. 관리인의 손지도가 옛 설계도보다 더 실제 동선을 기억하고 있을 수는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그린 문이 모두 실제로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손지도 아래쪽에 네모가 하나 더 있었다.
직원 대기.
현재 도면에서는 공실 확인용 창고로 표시된 자리였다. 출입구 위치도 반대였다. 서린은 그곳이 당장 조사 대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늘 확인할 질문은 옛 주소가 어디를 가리켰는지였다.
하은은 봉투를 다시 넣다가 접힌 모서리를 펴 보았다.
“엄마가 이 주소 쓸 때는 부끄러워했다고 해요. 지원시설에 산다고 하면 설명을 너무 많이 해야 해서요. 지금은 그때 안 부끄러워해도 됐는데, 그 말을 먼저 하시더라고요.”
서린은 사진 속 화단을 떠올렸다. 머리 위 번호판만 보려고 지나쳤던 얼굴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한테는 건물 이름이 계약 구역이기 전에 살던 곳이었다.
“이 주소를 공개해 달라는 뜻은 아니죠?”
“네. 먼저 맞는 기록이 있었으면 해요. 누가 볼지는 엄마가 고르고요.”
하은이 봉투를 닫았다. 서린은 하층이라는 단어 옆에 더 이상 감정을 대신 적지 않았다. 복원한다는 말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모두 세상에 보여 준다는 뜻일 필요는 없었다.
윤재가 하은이 돌아갈 이동 수단을 확인했다. 하은은 친구가 데리러 온다고 답했다. 자료를 보여 주러 왔다가 또 건물 안에 남는 사람은 없도록, 서린은 출입 담당에게 그녀가 나간 시각도 부탁했다.
점심 무렵, 업체가 추가 자료를 전달했다. 은경은 새 도면이라고 부르지 않고 보관 중인 변경 이력 사본이라고 말했다. 서린은 그 표현대로 파일 제목을 적었다.
하층이 삭제된 시기와 전기 구역 이름이 바뀐 시기는 달랐다.
건축 도면에서는 사라진 구역이 전력 배치표에는 남아 있었다. 회로 이름은 3동 하부 보조. 그 옆에 수기로 적힌 메모가 있었다.
작업 시 차단. 감시 전원 별도 확인.
도운이 그 줄에서 고개를 들었다.
“조명 꺼진 시간하고 화면 끊긴 시간을 따로 봐야겠네요.”
서린은 어제 받은 중계함 사진을 다시 열었다. 설정 변경 표시 17:56. 아직 장치 시계의 정확성은 검증되지 않았다.
전력 배치표 아래에 끼워진 출력물에는 다른 시각이 있었다.
16:00. 하부 구역 조명 차단.
서린은 두 시각 사이에 선을 긋지 않았다. 먼저 그 어둠 속에서, 어느 카메라가 계속 켜져 있었는지 알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