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표는 더운 벽에 붙지 않았다.
해성이 보여 준 화면에서 흰 종이 한쪽이 천천히 들렸다. 벽 표면에 맺힌 습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누르려다가 세오에게 먼저 물었다. 환기구 옆에 붙여도 되는지였다.
“그쪽은 비워 주세요. 고정판을 쓰는 편이 낫겠습니다.”
세오가 답했다.
다래는 선실에 둔 자기 이름표를 내려다봤다. 뒷면 접착지가 아직 떼어지지 않았다. 잘 붙을 거라고 생각해 싣고 온 작은 물건도 환경이 달라지면 제 역할부터 다시 찾아야 했다.
“주소는 종이부터 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연락받을 경로부터 만들어요.”
그녀가 말했다.
라온의 오진경 등록관이 예약된 교신에 들어왔다. 영상 대신 음성만 썼다. S-6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아끼려는 선택이었다. 다래는 나래의 화면에서 그가 보낸 간단한 접수안을 열었다.
주소 칸에는 사이가 아니라 라온 긴급구조 연락 창구가 먼저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임시 접수 부호를 넣는 방식이었다. 거주지 승인을 대신하는 주소가 아니라 구조와 물품 연락을 놓치지 않을 수신 경로였다.
“이렇게 적으면 라온으로 이사한 게 됩니까?”
해성이 물었다.
“아닙니다. 지금 누구에게 어떻게 연락할지만 정합니다. 거주지와 소유권 판단은 별도입니다.”
진경이 답했다.
그는 추가로 한 줄을 읽었다. 이 접수에 동의하지 않아도 긴급 지원을 제한하지 않는다. 다래는 설명을 들은 사람이 질문할 시간을 남겼다. 닫힌 방에 더 많은 서류를 들이미는 것이 오늘의 목표는 아니었다.
처음 답한 사람은 나뭇잎 그림 통을 갖고 있던 여자였다.
“물건이 라온에 오면 저한테 바로 알려 줍니까? 해성 씨가 없을 때도요?”
다래는 그녀가 정할 연락 담당과 본인 부호로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력이 모자라 바로 응답하지 못하면 지정 창구가 수신을 보존한다. 본인이 동의한 대리인을 둘 수 있지만 대표에게 모두 맡길 필요는 없었다.
“그럼 해 볼게요.”
그녀가 말했다.
이름과 현재 위치를 공개 채널에서 한꺼번에 읽지는 않았다. 진경이 준비한 비공개 구조 연락 경로와, 사람들끼리 화면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짧은 순서를 썼다. 공개 인원표에는 접수 완료 여부와 개인 부호만 돌아왔다. 다래는 의료 상담 자료를 그 표와 합치지 않았다.
마루는 자기 차례에 문서 형식을 물었다.
“발신 주소는 사이로 적어도 되죠?”
“지금 사용하는 이름으로 적고, 임시 연락 경로를 같이 넣으면 됩니다.”
진경이 말했다.
“지도에 없어서 또 검색이 안 되면요?”
“그래서 담당 창구와 접수 부호를 붙입니다. 검색되지 않는 이름만 남기지 않겠습니다.”
다래는 L-204를 떠올렸다. 그 번호는 저 사람들을 찾는 데 쓰였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과거 분실물 번호를 자기 주소처럼 빌려 쓰지 않아도 됐다.
마루의 접수에는 보호자가 확인한 연락 범위가 붙었다. 그가 자료를 빨리 다룬다고 성인의 동의 역할까지 넘겨받지는 않았다. 해성은 성인 담당자와 미성년들의 연락 방식을 따로 확인했다. 전체 스물세 명의 정보가 벽 한 장에 공개되는 일은 없었다.
중간에 주민 한 명이 오늘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미 한 번 주소 바꿨는데 짐이 안 왔어요. 또 쓰고 싶지 않습니다.”
다래는 이유를 증명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 신청할 수 있는 경로와 긴급 연락 방식만 설명했다. 진경은 대기 상태를 거부로 고정하지 않고 본인 답변 그대로 남겼다.
잠깐 뒤 그 사람이 물었다.
“그럼 지금은 물건 번호만 맡길 수 있어요?”
다래가 자기 차례의 송신을 받았다.
“네. 찾는 물건이 있으면 형태와 접수 경로를 남길 수 있습니다. 지금 상세한 사연까지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상대는 작은 조리용 칼집을 설명했다. 칼날은 이미 공구함에 따로 보관돼 있고, 손잡이에 감던 천만 찾고 있다고 했다. 물건 설명이 끝나자 목소리가 조금 가벼워졌다. 사람은 주소보다 먼저 자기 물건의 생김새를 말할 수 있었다.
다래는 그 설명을 제한된 물품 문의 칸에 적었다. 선실에서 칼집을 찾아 줄 수는 없었지만, 돌아가서 이어받을 사람이 있는 기록으로 만들 수 있었다.
진경이 임시 접수의 예시를 보냈다. 다래는 첫 번째 줄을 읽고 멈췄다.
등록 대상 화물 일괄 수신.
그녀가 말했다.
“화물로 적힌 예시입니다. 받는 건 주민 연락이에요.”
진경은 잠깐 말을 멈췄다. 서식 바깥에서 키보드 소리가 났다.
“기존 양식을 가져왔습니다. 정정하겠습니다.”
그는 바뀐 문장을 읽었다.
구조 대상자의 개별 연락 수신.
다래는 이전 문구를 잘라 없앤 새 화면만 받지 않았다. 어느 예시가 정정됐는지 번호를 붙였다. 저쪽 사람이 잘못된 설명을 이미 받아 적었다면 고쳐 줄 수 있어야 했다. 다만 그 일을 길게 공용 채널에서 반복하지는 않았다. 진경이 대상자에게 직접 변경을 안내했다.
선실 창밖에서 사이 본체의 한 모서리가 어둠에 들어갔다. S-6은 나래 옆에 붙어 있었고, 두 물체의 자세가 변할 때마다 창의 반사가 옆으로 움직였다. 다래는 주소를 쓰는 동안 우주가 잠깐 멈춘 것처럼 느꼈다가 그 빛을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무진이 다음 관측과 전력 점검 시각을 알렸다. 문서를 끝낼 때까지 기다려 줄 시간은 따로 없었다. 진경은 긴 설명을 줄이고 필수 접수와 확인 회신만 이어 갔다.
받은 사람들은 자기 부호를 종이에 적었다. S-6의 재활용 고정판 하나를 연락판으로 썼다. 그 위에는 전체 실명 대신 임시 창구와 공용 문의 경로만 크게 썼다. 개인 접수표는 각자의 수납 주머니에 넣었다.
해성의 펜이 글자를 쓰다 미끄러졌다. 땀이 밴 손가락 때문이었다. 그는 천으로 손을 닦고 다시 썼다. 화면 속 글씨는 반듯하지 않았다. 다래는 인쇄한 표지보다 그 기울어진 줄이 더 오래 눈에 남았다.
한 주민이 오래된 수신표를 꺼냈다. 모서리가 닳아 글자 한 획이 없어져 있었다. 그는 그 옆에 새 창구를 써도 되는지 물었다. 다래는 원래 기록을 덮기보다 새 종이를 옆에 넣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다. 손에 남은 예전 주소도 그 사람의 물건이었다.
“이거 제가 글씨 써 준 겁니다. 옆방 사람한테요.”
그가 말했다.
“그분께도 전달할 수 있는지 동의를 먼저 물어 주세요. 여기 없는 분 자료를 지금 같이 접수하진 않겠습니다.”
그는 알았다고 답하며 종이를 넣었다. 다래는 창구가 생겼다고 이 모듈에 없는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받아 적으려던 마음을 접었다. 손을 뻗을 수 있는 데와 없는 데가 있었다.
마루가 고정판 위의 글씨를 읽었다. 첫 줄을 읽다가 글자가 겹친 곳에서 멈췄다. 해성이 지우려 하자 마루는 새 종이 조각을 그 옆에 대고 바른 글자를 썼다. 잘못 쓴 곳을 뜯다가 판 전체가 흔들리는 것보다 나았다. 옆의 아이가 그 글자를 따라 읽었다. 다래는 공개해야 할 개인 정보가 없는 줄인지 한 번 확인한 뒤, 그들이 끝까지 읽는 소리를 잠깐 들었다.
라온 긴급구조 연락 창구.
사이 임시 접수.
누군가를 화물로 부르지 않고도 받아 줄 칸이 생겼다.
다래는 자기가 처음 7-B에서 뜯었던 노란 카드를 떠올렸다. 안이 따뜻하면 사람이 기다린다는 문장이었다. 지금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다음 말을 받을지 조금 알게 됐다.
그때 영상 아래에서 종이 한 장이 빠져나왔다. 좁은 고정판 끝에 끼워 둔 접수표였다. 마루가 몸을 밀려 하자 옆의 성인이 먼저 손잡이를 잡았다. 종이는 환기구 쪽으로 천천히 갔다.
화면이 흔들렸다.
다래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는 자기 단말만 닿았다. 세오가 음성으로 그 자리에서 쫓아가지 말라고 했다. 가까이 있던 성인이 허용된 위치에서 집게로 종이를 받았다. 마루는 자기 띠를 풀지 않았다.
기록은 종이에 남을 수 있었고 종이는 환기구를 막을 수도 있었다.
해성은 접수표를 각각 닫힌 주머니에 넣는 것으로 방식을 바꿨다. 연락판의 종이는 네 모서리를 고정했다. 다래는 남은 이름표를 나래의 수납망 안으로 다시 넣었다. 빈칸을 만드는 일보다 붙일 자리를 정하는 일이 먼저였다.
접수는 일부만 끝났다. 더 생각할 사람은 다음 창에 답하기로 했다. 진경은 완료 인원을 전체 주민 동의로 표시하지 않았다. 다래는 그에게 재연락 담당과 다음 확인 시각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창구가 생겼다고 아직 연락이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면, 받는 사람이 있다는 약속만 생긴 것이었다.
첫 확인 회신이 마루의 단말에 도착했다.
그는 글자를 읽다가 해성을 보았다. 해성은 자기 화면이 아니라 마루의 화면을 보겠다고 먼저 물었다.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왔어요. 접수됐다고.”
마루가 말했다.
짧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다래에게는 첫 상자가 반납됐을 때보다 크게 들렸다. 수신처가 실제로 대답했다.
라온 보관소에서 들어온 메시지도 하나 있었다. 7-B와 원본 카드의 봉인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는 회신이었다. 임의 폐기 금지와 원래 판정 기한은 분리해 보존 중이었다. 다래는 그 회신을 이번 임시 지원 기록과 다른 칸에 두었다. 저곳의 고장품과 이곳의 정상 지원물을 섞지 않았다.
세오는 통신을 줄인 동안의 계측값을 확인했다. 임시 흡착 지원 뒤 이산화탄소 상승은 완만한 추세였지만, 온도는 계속 관찰해야 했다. S-6의 전력 사용 기록에는 예상한 것보다 높은 구간이 하나 있었다.
“통신 때문입니까?”
다래가 물었다.
“현재 통신을 줄인 뒤에도 남습니다. 켜진 장비 목록과 맞춰 봐야 해요.”
세오는 해성에게 전체 전원을 끄라고 하지 않았다. 현재 생명유지와 안전에 필요한 장비는 유지한 채, 회로별 기록과 자동 예약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마루가 자료 위치를 알려 주고 성인 담당자가 해당 화면을 열었다.
이름 없는 막대가 같은 간격으로 높아졌다. 해성은 처음에는 냉각 펌프일 거라고 말했다. 세오는 다른 회로에서 유량 장비 전력이 따로 잡힌다고 짚었다. 확인하지 않은 전력 하나가 실제 방 안에서는 열이 됐다.
무진이 S-6과 나래의 접속 유지 조건을 갱신했다. 다음 그늘 구간에는 S-6의 발전 여유가 줄어들 예정이었다. 남은 축전량과 실제 부하를 맞춰야 했다. 다래는 창밖 지구의 밤을 보았다. 반짝이는 도시는 멀었고, 여기서 쓸 전력을 빌려 주지 않았다.
해성이 자동 운전 표를 찾았다. 분리 뒤에도 이전 작업 예약이 남아 있었다. 표에는 보온 보조 준비라는 줄이 보였다. 서비스 모듈이 사람이 적을 때 쓰던 조건이었다.
“이게 난방입니까?”
다래가 물었다.
세오는 세부 항목을 더 보자고 했다. 생명유지 장비의 동결 방지 기능과 실내 작업용 보온은 함부로 같은 것으로 끄면 안 됐다.
해성은 표를 넘겼다.
다음 예약 시작까지 열두 분.
방은 더운데, 사람 없는 방을 위해 남겨 둔 밤의 전력이 곧 켜질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