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은 힘을 줘서 쓴 글씨였다.
고선재의 마지막 획이 종이 아래를 눌렀다. 이준은 유리 덮개 너머의 그 자국을 보았다. 손이 떨려 기울었던 이름 복원 서명과 달랐다. 오래전 노인은 자기 이름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전날 밤 선재가 직접 요청한 본인 기록이었다. 낮에 보관 담당이 등록과 요청 범위를 대조했고, 그날 야간에 당사자가 원본 해당 부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절차를 잡았다. 이준과 윤단은 선재가 고른 동행인이었다.
새 관리 복도의 출입도 다시 확인했다. 어젯밤 보충 작업표를 오늘 날짜처럼 내밀지 않았다. 밤 열한 시 이십 분, 같은 금속문을 지나 창구에 도착했다. 기존 건강 지원 경로의 재확인을 받은 뒤 미서와 계단을 걸어 선재의 자리로 갔다. 관리 잠금 안의 의자는 전날과 같은 안전 구역에 있었다.
원본은 기록 담당자가 가져왔다. 책상 위 받침은 낮았고, 선재가 몸을 앞으로 오래 굽히지 않아도 읽을 수 있었다. 이준은 의자 옆에 앉았다. 종이보다 먼저 노인의 발이 바닥에 닿는지 보았다.
“이걸 내가 썼네.”
선재가 말했다.
담당자는 어느 부분을 알아보는지 물었다. 노인은 획을 가리켰다. 당시 자기 필체와 맞고, 아래의 부품 번호도 기억난다고 했다. 그것만으로 모든 과거를 기억한다는 답은 아니었다.
문서 제목은 작업 시간 연장 확인이었다. 정해진 교대 뒤 한 차례 더 남아 분기 시설의 임시 보수를 맡는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인수자 배정은 별도 요청으로 적혀 있었다. 종료를 영원히 포기한다는 문장은 없었다.
이준은 다음 줄을 읽었다. 선택한 봉합의 대가는 본인에게 정산. 시민 부과에 대한 문구는 이 확인지에 없었다. 자기 잠을 쓰겠다는 서명과 남의 잠을 받겠다는 서명이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재는 오래 종이를 보았다. 오른쪽 엄지가 무릎 위에서 느리게 움직였다. 이준은 다음 말을 써 달라고 펜부터 내밀지 않았다.
“그날 바로 못 나간 줄만 알면, 내가 편해져.”
노인이 말했다.
“그런데 나는 한 번 남겠다고 했어. 그건 맞아.”
배관이 낮게 울렸다. 선재는 그쪽을 한 번 봤다가 다시 종이를 봤다. 이준은 자기가 기다렸던 답과 다른 답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나가려던 사람을 누군가 계속 막았다는 한 줄이면 설명하기 쉬웠다.
노인은 교대자가 오지 않던 밤을 말했다. 연락을 받은 사람이 있었고 대체 인력을 찾는 중이라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정확히 누구에게 어떤 시각에 말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물통 밑에 놓던 고무 받침이 자꾸 미끄러졌다는 것을 기억했다.
“받침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내가 밟고 있었어. 피곤하면 남한테 없다고부터 말해.”
선재가 짧게 웃었다. 이준은 옆의 수건을 노인이 잡기 쉬운 자리로 밀었다. 무슨 부품을 갈았는지보다 그 받침의 감각이 먼저 돌아온 모양이었다.
“다음 조가 올 때까지만 하겠다고 썼지. 내가 그 자리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거든. 틀린 말은 아니었어. 그런데 그 말만 하면 다음 사람을 안 불러도 됐지.”
“그때 연장 안 하시면 사고가 났습니까?”
이준이 물었다. 질문을 하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답이 노인을 변호해 주기를 바라는 질문이었다.
선재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 그때도 전부는 몰랐어. 날 밝으면 멈춰서 볼 수도 있었겠지. 나는 그걸 오래 말하지 않았고.”
노인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말했다. 실제로 하지 않은 다른 선택의 결과까지 꾸미지는 않았다. 이준은 질문지에서 꼭이라는 말을 지웠다. 꼭 남아야 했다는 문장을 자신이 먼저 만들고 있었다.
윤단이 확인지의 종료 조건을 물었다. 기록 담당자는 그다음 업무와 연결된 자료를 대조해야 한다고 했다. 오늘 본 것은 한 차례 연장 확인지와 해당 근무 인수 항목이었다. 이 한 장으로 뒤의 모든 밤이 승인되는 것은 아니었다.
선재가 손을 뻗었다가 유리 덮개 앞에서 멈췄다. 담당자가 원하는 문장을 확대 사본으로 보여 줬다. 다음 인수자 배정 요청. 노인은 그 줄을 오래 눌러 보듯 손가락을 폈다.
“이건 분명히 썼구나. 사람을 보내 달라고.”
그가 말했다. 이준은 처음 옷 안감에서 찾았던 복귀 문의를 떠올렸다. 남겠다는 선택 뒤에도 나오려는 요청은 있었다. 두 장은 서로를 거짓으로 만들지 않았다.
“한 번 동의했다고 그 뒤까지 다 받은 게 아니네요.”
이준이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남은 밤이 없던 것도 아니고.”
선재가 답했다. 노인은 이준을 보았다. 좋은 사람으로 정리해 달라는 얼굴은 아니었다. 자기 이름 밑에서 자기 행동이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부탁처럼 보였다.
원본 열람은 잠깐 멈췄다. 선재가 등을 기대고 물을 마셨다. 기록 담당자는 장을 덮지 않고 가림판을 올렸다. 쉬는 동안 질문이 계속 눈앞에 놓이지 않게 했다.
이준은 손목의 흰 선을 보았다. 봉합 여력은 세 건이었다. 마지막 실제 작업은 오래전에 상환한 남쪽 보행로의 한 건이었다. 지금 써서 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노인의 말도 자기 답답함도 시설의 금이 아니었다.
선재가 물병 뚜껑을 닫으려다 비스듬히 물렸다. 이준이 손을 내밀자 노인은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다시 돌려 맞춘 뒤 천천히 닫았다. 이준은 손을 무릎으로 돌려놓았다. 기다리는 일은 중요한 질문 앞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효선이한테는 어디까지 말할까요?”
이준이 물었다. 선재는 의자 옆의 이름천을 보았다. 전날 놓은 그대로 복원 사본 곁에 있었다.
“내가 한 번 더 남겠다고 했다는 것. 그 뒤에는 돌아오고 싶어서 문의했다는 것. 오늘은 그것까지.”
노인이 말했다. 효선과 직접 통화할 수도 있다고 윤단이 알려 줬다. 선재는 오늘 원본을 본 뒤라 말할 힘이 많이 남지 않았다며 다음에 하겠다고 했다. 이준은 두 문장을 제멋대로 하나의 긴 사과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
확인을 다시 시작하자 시민 연계 항목의 참조 번호가 나왔다. 개인 연장 확인지보다 뒤에 붙은 처리였다. 선재의 이름이 같은 묶음에 실렸지만 별도 승인 자격의 표시가 있었다. 당사자 개인의 동의 원본은 오늘 열람 범위에 없었다.
이준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이 선 뒤에 누가 있는지 묻고 싶었다. 기록 담당자는 관련 감사 요청과 대조 중인 자료라고 설명했다. 확인되지 않은 시민 이름은 덮여 있었다.
선재가 먼저 말했다.
“내가 저 사람들 잠을 받은 줄 알았어. 여기 앉아 있으니까. 나가면 그 사람들이 더 낼 거라고 듣기도 했고.”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는 기억하십니까?”
윤단이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준은 도겸의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그 자리에 넣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얼굴을 아는 악인으로 바꾸면 증언이 빨리 끝날 것이다. 그 끝을 원해서는 안 됐다.
미서는 정산 규정을 펼쳤다. 수리자 본인 채무의 양도는 허용되지 않았다. 시민 부과는 그와 별도로 이의를 제기하고 대조해야 할 관리 항목이었다. 선재가 대신 갚아야 한다는 설명의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다.
노인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럼 내가 여기 남아서 남의 잠을 지켰다는 말도 아직 못 하겠네.”
“확인한 범위에서는 그렇습니다.”
미서의 대답은 정중하고 또렷했다. 이준은 그 답이 위로보다 아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래 버틴 이유가 자기 손안에서 작아지는 일이었다.
선재는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남을 지켰다는 말을 빼면 자기에게 무엇이 남을지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 수건을 들어 받침에 떨어진 물을 닦았다. 지금 물기 한 점을 없애는 손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늘 진술은 노인이 고른 범위로 남겼다. 자발적 연장 한 차례, 다음 인수자 요청, 뒤의 복귀 문의, 시민 부과 동의는 해당 확인지에 없음. 미서가 읽어 주자 선재는 문장 하나를 고쳤다. 처음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 쓴 부분이었다.
“가고 싶었어. 그래도 남기로 한 거지. 둘 중 하나만 있던 게 아니야.”
이준은 그 문장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도 늘 돌아가고 싶으면서 마지막 한 건을 붙잡았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이 남은 선택을 가볍게 만들지 않았다. 다만 그 선택으로 다음 밤까지 미리 맡길 수는 없었다.
열람을 마친 원본은 담당자가 회수했다. 선재는 본인에게 허용된 확인 사본만 받았다. 배관 옆 작은 상자에 이름 복원 사본과 따로 놓았다. 이름을 되찾은 종이와, 그 이름으로 한 선택의 종이가 서로를 가리지 않았다.
새 옷은 여전히 벽에 걸려 있었다. 이준은 이름천이 바람에 날릴까 한쪽을 받침 아래에 넣어도 되는지 물었다. 선재가 그러라고 했다. 바늘을 꺼내는 대신 천의 자리만 잡았다.
“내 이름이 무겁네.”
노인이 말했다.
“천은 가볍습니다.”
“그래서 자꾸 날아가려고 하나 봐.”
그가 웃었다. 이준도 웃었다가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노인을 처음 보았을 때보다 아는 일이 늘었는데, 데리고 나갈 수 있는 거리는 늘지 않았다. 그것을 실패한 밤 하나로만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밖에 나온 뒤 이준은 약속된 시간에 효선에게 연락했다. 두 문장을 그대로 전했다. 전화 너머에서는 다리미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바보가 남겠다고 썼을 수도 있지.”
효선이 말했다.
“내가 화낼까 봐 그 말까지 네가 지우지는 마. 화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이준은 네, 하고 답했다. 효선은 잠깐 숨을 고르고 오늘 밥은 먹었느냐고 물었다. 오빠에게 화가 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저녁을 물을 수 있었다. 이준은 먹었고 지금은 돌아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자 윤단이 차창을 조금 열었다. 따뜻해진 차 안에 바깥 공기가 들어왔다. 이준은 안전띠를 매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저분한테 남으라고 한 날은 있었네요.”
“그래. 그다음부터 누가 돌아갈 길을 만들었는지 봐야지.”
반장이 대답했다. 이준은 자기 파일에서 복귀 문 위치를 확인했다. 오늘도 같은 금속문으로 나왔다. 다음에 들어갈 때는 노인의 말뿐 아니라 밖에서 버틸 방법을 하나 더 가져가고 싶었다.
태오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네 전기공과 시설지원센터가 공용 쉼터의 예비 유지 운전을 함께 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효선의 가게도 연락과 물품 임시 보관에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했다. 마법을 쓰는 사람만 모이는 모임은 아니었다.
이준은 처음에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고 물으려 했다. 윤단이 먼저 다음 줄을 읽어 줬다. 실제 담당자의 근무 시간과 필요한 물건을 세어야 하므로 현장에 와서 맞추자는 말이었다.
그는 파일을 닫았다. 한 사람이 더 남겠다는 서명 대신 여러 사람이 각자 돌아갈 시간을 적는 일이라면 해 볼 수 있었다.
알림 아래에는 현장 관리자의 질문이 붙어 있었다.
“사람이 계속 손으로 보고 있어야 하면, 그 사람 밥 먹는 동안은 누가 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