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분 검토실 문 앞에는 빈 상자가 세 개 놓여 있었다.
강이준은 상자 옆면의 끈을 봤다. 아직 묶이지 않았다. 누가 종이를 버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손은 먼저 가장 가까운 상자를 자기 쪽으로 당기려 했다.
“그거 우리 것 아닙니다.”
태오가 말했다. 이준은 손을 거뒀다. 오늘 지켜야 하는 것은 상자가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갈 자료였다.
밤이 지나 아침 아홉 시, 센터 기록실에서 두 사람이 기다렸다. 윤단은 오전 현장 인수를 마치고 합류하기로 했다. 태오는 밤새 원본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담당자에게 새 묶음의 목록과 처분 검토 시간을 확인하고, 감사 접수번호에 연결할 보존 요청을 먼저 넣었다.
회신은 아직 없었다.
“이거 기존 보존 목록에 붙이면 되잖아요.”
이준이 말했다. 태오는 새 목록을 펴서 다른 자료 번호를 짚었다. 사고 별지와 승인 도면에는 없는 번호였다. 비슷한 때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같은 자료가 되지는 않았다.
“붙여 달라고 요청한 상태예요. 제가 붙었다고 쓰면 안 되고요.”
태오가 문을 두드렸다. 기록 담당자가 나와 두 사람의 방문 목적부터 확인했다. 그는 태오에게 상자를 열라고 하지 않았다. 전산 전환 때 스캔하지 않은 접수표의 뒷면이 있고, 일부는 정기 보존 기간을 재검토하는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정리 검토가 오늘입니다. 오늘 바로 파쇄하는 절차는 아니고요.”
그 말에 이준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그래도 검토가 끝나 처분 확정으로 넘어가면 뒤집는 절차가 더 필요했다. 태오는 정식 보존 요청이 대조될 때까지 해당 묶음을 구분해 달라고 했다.
담당자는 접수 상태를 조회했다. 화면을 보던 눈이 멈췄다. 이준은 좋은 소식인지 묻지 않았다. 태오가 들고 온 목록의 마지막 숫자 하나가 전산 목록과 달랐다.
같은 시설의 접수표였지만 마지막 자리가 하나 어긋났다. 이준은 서류를 빼앗아 보려다 손을 무릎에 놓았다. 태오가 옛 분류번호와 전산 전환 뒤 번호를 모두 적어 대조했다. 실수 하나가 급한 마음보다 먼저 길을 막고 있었다.
“옛 번호로 온 요청을 새 번호에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담당자가 말했다. 태오는 자기 요청서에도 새 번호가 빠졌다고 확인했다. 상대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두 번호의 대응표를 붙여 요청 대상을 정정했다. 담당자는 접수 시각을 지우지 않고 보완 시각을 더했다.
그동안 복도에서는 카트가 지나갔다. 빈 상자 하나가 문턱에 걸려 덜컥 울었다. 이준은 비켜 서는 것 외에 도울 일이 없었다. 종이도 자기가 힘을 주면 빨리 움직일 줄 알았는데, 오늘은 손이 자꾸 남았다.
윤단이 도착했을 때 태오는 보완 요청을 마친 상태였다. 반장은 종이를 읽고 물었다.
“지금 확인한 건?”
“자료가 있다는 목록, 오늘 검토 대상이라는 것, 보존 요청이 접수됐다는 것까지요. 실제 내용은 아직 못 봤습니다.”
태오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이준은 그 대답 옆에서 자기 초조함이 얼마나 많은 일을 이미 끝난 것으로 만들려 했는지 알았다.
오전 열 시가 지나 담당자가 다시 나왔다. 감사 자료 보완의 해당성 확인이 왔고, 검토 책임자가 이 묶음의 처분 판단을 유보했다고 했다. 무기한 보존이 결정됐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정식 대조가 끝날 때까지 지정 보관함에 별도로 남기고 상태를 기록하기로 했다.
태오는 그 안내를 되읽었다. 묶음 번호, 장수, 보관 위치와 담당자. 개인 책상에 가져가는 길은 없었다.
열람실에 들어갔다. 담당자가 봉함 상태를 사진으로 남긴 뒤 접수표를 펼쳤다. 전산 출력에서는 앞면의 시설 번호와 완료 도장만 보였다. 뒷면에는 인수를 받은 사람이 쓰는 작은 칸이 있었다.
한 장에 수리 완료와 인수 보류가 함께 적혀 있었다.
이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도면의 중앙 유지선이 일반 배포에서 빠지던 시기였다. 해당 시설의 물리 정비는 완료됐지만 다음 기관에 넘기는 중앙 유지 항목은 확인 유보로 남았다. 앞면만 보면 모든 일이 끝났다.
“미전달 승인 번호하고 이어집니까?”
그가 물었다. 태오는 곧바로 답하지 않고 앞서 받은 정산소 확인서를 꺼냈다. 같은 번호는 아니었다. 접수표의 참조란에 그 번호가 이어지는 방식이었다. 직접 승인서 대신 인수 경로가 하나 생겼다.
윤단은 두 종이를 같은 사건으로 확정하지 말라고 했다. 다른 담당자가 이어서 대조할 수 있는 관계만 표시했다. 이준은 수첩에 써 놓은 결정적이라는 말을 지웠다. 늘 제일 먼저 쓰고 제일 자주 지우는 단어였다.
다른 접수표에는 보류 사유가 달랐다. 담당 부서 변경, 비용 항목 재확인, 시설 번호 개정. 전부 같은 명령으로 묶을 수는 없었다. 태오는 눈에 띄는 두 장만 뽑아 자기 주장을 만들지 않았다. 허용된 기간의 전체 목록과 각 사유를 함께 확인했다.
묶음의 중간에 접힌 작은 부속지가 있었다. 시민 개별 확인은 대표 확인으로 갈음한다는 처리 안내였다. 원본 동의서가 아니라 접수자가 참고한 설명이었다. 이준은 그 문장을 읽으며 선재의 발목에 붙은 종이를 떠올렸다.
안내에 적힌 갈음이 실제로 어디까지 허용됐는지, 누가 승인했는지는 여전히 봐야 했다. 눈앞의 종이가 그 권한을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허용 범위의 사본 발급을 기다리는 동안 백도겸이 들어왔다. 그는 담당자에게 먼저 인사한 뒤 이준 일행을 봤다. 서류철은 들고 있지 않았다.
“보존 대상을 늘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늘려 달라고 요청했고, 해당 묶음은 정식 대조 때까지 남기기로 했습니다.”
태오가 대답했다. 이준은 옆에서 고개를 들었다. 태오가 도겸의 질문을 받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자신이 한 일을 작게 만들지도 크게 만들지도 않았다.
도겸은 기록 담당자를 향해 물었다.
“센터 직원의 요청으로 총괄국 연계 자료 전체를 묶을 권한이 있습니까? 일반 정비표와 별도 관리 항목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담당자는 태오를 보지 않았다. 보존 판단의 주체는 검토 책임자이며, 감사 보완 요청의 대조 대상에 해당하는지 확인해 유보했다고 답했다. 전체 총괄국 자료가 아니라 목록에 특정된 한 묶음이었다.
도겸은 그 답을 끝까지 들었다. 그다음 권한과 범위에 관한 이의를 정식으로 남기겠다고 했다. 입구를 막거나 종이를 가져가려 하지는 않았다. 이준은 차라리 그랬으면 말하기 쉬웠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버렸다.
“원본을 지키는 게 왜 문제입니까?”
그가 물었다.
도겸이 돌아봤다.
“관계없는 개인정보와 시설 정보까지 한 번에 묶이면 다른 업무도 멈춥니다. 자료가 있다는 이유로 누구나 모든 것을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맞는 부분이 있는 말이었다. 이준은 탁자 위 가려진 이름들을 봤다. 그 이름을 볼 필요가 없어서 가렸다. 옳은 한 문장이 뒤의 결론까지 옳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원본은 여기 두고, 필요한 범위만 받습니다. 보존과 공개도 따로고요.”
그가 대답했다.
“권한 이의가 있으면 그 이의도 같이 남겨 주세요. 이 자료가 사라진 다음에 누가 가져갈 수 있었는지만 다투게 하지는 말고요.”
도겸의 시선이 잠깐 태오 쪽에 머물렀다. 그는 대답 대신 담당자에게 회신 경로를 확인했다. 태오는 펜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준은 그 손이 떨리는지 보려다 그만뒀다. 오늘 태오가 잘한 일을 손의 떨림 여부로 판단할 이유는 없었다.
도겸이 나간 뒤 담당자는 발급할 사본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과 연락처는 가리고, 앞뒤 장의 연결과 접수 번호가 끊기지 않도록 표시했다. 보존 결정의 범위와 권한 이의가 접수될 예정이라는 사실도 같은 열람 기록에 붙었다.
태오는 마지막 장에 서명하고 펜을 놓았다. 손가락 끝이 잉크에 조금 젖었다. 이준은 휴지를 내밀었다.
“오늘은 네가 고쳤네.”
“번호를 하나 빠뜨렸다가 채웠습니다.”
“그것도 자주 하는 수리입니다.”
태오가 웃었다. 웃고 나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면담 압박과 다음 달 계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원본 보존이 일자리 보장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윤단은 상담 담당에게 오늘의 권한 질의도 사실대로 남길 수 있는지 물어보자고 했다.
담당자가 묶음을 보관함에 다시 넣는 것을 끝까지 확인했다. 태오는 원본 없는 사본 봉투만 들고 나왔다. 가져온 종이는 늘었는데 원본은 자기 가방에 없다는 것이 이준에게는 이상하게 든든했다.
복도 창턱에는 누군가 두고 간 작은 화분이 있었다. 마른 잎 한 장이 문틈 바람에 흔들렸다. 태오는 그 옆에 봉투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방금 전에는 먼저 대답하던 사람이 컵을 든 뒤에야 긴 숨을 쉬었다.
“혼자였으면 말을 더 작게 했을 것 같아요.”
그가 말했다. 이준은 네가 다 했다고 답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옆에 사람이 있어서 할 수 있었던 일도 본인이 한 일이었다.
“다음에도 같이 오죠. 원본은 계속 저기에 두고.”
태오는 컵을 비우고 봉투를 다시 들었다.
점심은 기록실 아래 식당에서 먹었다. 태오는 국에 밥을 말다가 숟가락을 놓쳤다. 이준은 새 숟가락을 가져왔다. 겨우 종이를 넘겼다고 생각했던 손이 물건을 놓치고 있었다.
“밤에도 가십니까?”
태오가 물었다. 이준은 선재의 상태 확인을 떠올렸다. 오늘은 예정된 지원 담당의 연락이 있었다. 자신이 아니면 받을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윤단이 휴대폰의 근무표를 보여 줬다. 내일 이준의 칸이 비어 있었다. 쉬는 날로 적힌 칸을 보자 이준은 오히려 불안해졌다. 지금 종이 원본을 찾았는데 하루를 비워도 되는지 묻고 싶었다.
반장이 먼저 말했다.
“한 건도 안 했다고 안 피곤한 거 아니야. 이번엔 여덟 시간 자.”
“알람을 여덟 시간으로 맞추면 됩니까?”
“잠까지 완료 처리부터 하지 마.”
이준은 웃다가 하품했다. 자기가 하품하는 줄도 몰랐다는 것이 더 피곤하게 느껴졌다. 손목에는 흰 선만 있었고 새 채무는 없었다. 숫자가 영이어도 몸의 빈칸이 영인 것은 아니었다.
오후에 보존 접수 확인이 왔다. 태오는 원본 위치와 사본 발급 번호를 감사 보완 목록에 연결했다. 그다음 이준에게 개인 연락을 대신 받을 교대 창구 번호를 보냈다. 이준은 자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저녁 퇴근길, 효선에게 허락받은 만큼만 오늘 결과를 전했다. 그녀는 원본을 지켰다는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가 나올 날이 가까워졌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대신 지금 어디냐고 물었다.
“집 가는 버스입니다.”
“그럼 앉아. 서서 남의 자리까지 지키지 말고.”
전화를 끊은 뒤 자리가 하나 났다. 이준은 곧바로 앉았다. 창밖에서 점검 차량이 반대편으로 지나갔다. 자기가 타지 않은 차에도 익숙한 조끼가 있었다.
그때 윤단에게서 마지막 문자가 왔다. 내일 출동 예정인 동네 공용 쉼터의 문 고장 접수였다.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붙었다.
이 건은 우리 조가 맡음. 강이준 비번.
그는 답장을 쓰지 않고 화면을 껐다. 그 문을 자기가 보지 않아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내일은 정말 믿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