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길을 그리는 데 가장 먼저 필요했던 것은 연필이 아니었다.
장화였다.
세라는 티오가 내민 장화를 내려다보았다. 자기 신발보다 두 치는 컸다. 발을 넣자 뒤꿈치가 들썩였다.
“이거 신고 바다에 들어가요?”
“바다 가까이. 빠지는 건 피하는 쪽이고.”
티오는 안쪽에 헝겊을 밀어 넣었다. 세라가 걸음을 떼자 이제 발과 장화가 같이 움직였다. 물 빠지는 구멍이 뚫린 밑창에서는 오래된 소금 냄새가 났다.
바렌이 낡은 관측대를 벽에서 떼어 냈다.
“소금계단이 드러나는 시간은 짧다. 오늘은 마흔 번 모래시계를 뒤집을 만큼.”
“그 전에 돌아오면 되죠?”
“물은 네가 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서른 번째에 짐을 버리고, 서른다섯 번째에는 사람만 돌아와.”
세라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숫자들이 길이가 아니라 목숨의 모양이 됐다.
빛실에서는 바렌이 마루섬을 관측한다.
세라는 절벽 아래 소금계단에서 같은 섬을 본다.
서로 떨어진 두 시선으로 섬의 방위를 잡은 뒤, 한 관측을 마루섬의 응답과 잇는다. 잘되면 구조선이 건널 만큼 길이 생긴다. 잘되지 않으면 돌 하나가 탁해지고 하루가 끝난다.
바렌은 그 실패를 숨기지 않았다.
“내가 내려가면 다시 올라오는 데 오래 걸린다. 네가 가야 해.”
세라가 관측대를 받았다. 무거운 쇠가 팔 안에 안겼다.
“티오도 같이 가.”
소년의 얼굴이 굳었다.
“계단까지만요.”
“배에 태우는 게 아니다.”
티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망치와 밧줄을 챙겼다. 누메는 이미 배 위에서 돛을 정리하고 있었다. 빛이 물길을 잡는 순간 출발해야 했다.
누메는 부두 끝에서 건빵을 반으로 갈라 먹고 있었다. 배에는 빈 담요와 물통이 실렸다. 선장은 빈 담요 하나를 세라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최대로 태울 수 있는 수가 있어. 못 데려온 사람이 있다고 길을 더 넓히려 하지 마. 배는 내가 정할게.”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와 배에는 서로 다른 무게가 있었다.
부두를 지나 절벽 동쪽으로 돌아가자 바람이 달라졌다. 등대 뒤에서는 막혔던 소금기가 얼굴을 때렸다. 세라는 종이 덮개를 꼭 묶었다.
낮아진 바다 아래 검은 계단이 드러났다.
사람이 깎은 것인지 물이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돌 표면에는 흰 소금이 꽃처럼 피어 있었다. 마지막 발판은 아직 물속에 있었다.
티오가 앞장서서 밧줄을 묶었다.
“이 줄 안쪽. 바깥쪽은 돌이 미끄러워.”
“가 본 적 있어?”
“매번 여섯 번째까지만.”
“오늘은?”
“여덟 번째.”
그가 짧게 웃었다.
“두 개 늘었다고 좋아하지는 마.”
돌 틈에서 작은 불빛이 흘러나왔다. 푸른 이끼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보니 손톱만 한 게들이었다. 등껍질 아래에 빛을 품고 있었다. 파도가 덮일 때마다 일제히 어두워졌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켜졌다.
세라가 무심코 몸을 숙이자 티오가 어깨를 잡았다.
“등을 보이지 마. 물이 올 때 못 봐.”
그녀는 자세를 바로 했다. 예쁜 것을 보는 일에도 지켜야 할 순서가 있었다. 게들은 발밑으로 흩어졌다. 한 마리가 장화 끈에 매달렸다가 소금날개의 그림자가 지나가자 돌 틈으로 숨었다.
세라는 발판을 하나씩 밟았다. 장화 안에서 발가락이 힘을 줬다. 파도가 무릎 아래를 스치고 물러갈 때마다 자기가 딛고 선 돌까지 끌어가는 것 같았다.
여덟 번째 발판에서 등대 창이 보였다.
바렌이 작은 거울을 움직였다. 햇빛 하나가 번쩍였다.
도착 확인.
티오가 기구를 고정했다. 세라는 모래시계를 세웠다. 첫 번째 모래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루섬은 안개 뒤에 있었다. 아까 등대에서 보였던 바위 대신, 낮은 자리에서는 해안 숲 끝만 보였다. 같은 대상을 잡아야 했다. 다른 나무를 보고 숫자가 맞으면, 틀린 길을 정확하게 그리는 셈이었다.
세라는 종루를 찾았다.
지붕 하나가 물결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반짝이는 기와처럼 보이는 지붕이었다. 반사판이 달린 비상 종루라고 교본에 적혀 있었다.
관측대를 그쪽으로 돌렸다.
손잡이를 한 바퀴 돌렸는데 목표가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세라가 눈을 뗐다.
티오도 바다를 보고 있었다.
“지금 섬이 움직인 거지?”
“눈으로는 그렇게 보여.”
정확히는 섬까지 가는 거리가 접히고 있었다. 바위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그 위에 앉은 새가 갑자기 손바닥만 해졌다가 다시 점으로 줄었다.
세라는 세 번의 숫자를 적었다. 모두 달랐다.
등대에서 확인 빛이 왔다.
그녀는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모래가 내려갔다.
두 번째.
세 번째.
세라는 기구의 기울기를 확인했다. 다리는 돌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창틀처럼 습기로 부풀어 오를 곳도 없었다. 손 떨림이 문제인가 싶어 티오에게 잠깐 손잡이를 맡겼다.
그에게도 섬은 움직였다.
“내가 틀린 게 아니네.” 세라가 중얼거렸다.
“좋은 거야?”
“아니. 기구가 틀린 거면 고칠 수 있는데.”
티오는 웃지 않았다.
바렌에게 보낼 숫자를 골라야 했다. 평균을 내면 되지 않을까. 세라는 연필을 들었다가 멈췄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중간값을 만들면 배는 어디로 가게 될까.
주머니 속 지우개를 만졌다. 해도원에서 이럴 때는 표준값으로 돌아가라고 배웠다. 표준값은 마루섬 항로가 폐기되기 전에 나온 숫자였다. 지금 그 숫자를 쓰면 지도는 말끔해지고, 누메가 타고 갈 바다는 그대로 불안정할 터였다. 세라는 연필의 반대쪽을 돌려 쥐었다가 다시 바로 잡았다.
“내가 오래 걸리면 먼저 올라가.”
티오가 고개를 저었다.
“난 기구를 못 읽어. 네가 못 돌아가면 저 사람한테 뭘 보여 줘?”
그는 등대 창을 가리켰다. 세라 혼자 대답해야 하는 시험이 아니었다. 그 생각이 그녀의 손을 조금 느리게, 조금 정확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숫자를 고르지 않았다.
대신 연속해서 적었다. 가까워지는 때, 멀어지는 때, 종소리가 나는 때. 손목이 뻐근해질 때까지 줄을 채웠다.
여섯 번째 모래가 내려갔다.
바다에서 종이 울렸다.
세라의 연필이 멎었다.
종이 울리는 동안 섬의 지붕이 멈췄다. 길지 않았다. 종의 끝소리가 사라지면 지붕도 다시 흔들렸다.
그녀는 다음 종을 기다렸다.
한 번.
잠깐 쉼.
두 번.
두 번째 긴 울림에서 눈금을 읽었다. 앞서 멈췄던 값과 비슷했다. 아주 조금 달랐지만 허용 범위 안이었다.
“티오. 종 치는 동안 이 줄을 당겨 줘.”
“밧줄을?”
“아니. 거울 가리는 천.”
그녀는 관측대 옆에 붙인 신호 거울을 등대로 돌렸다. 종이 울릴 때마다 천을 열었다. 마루섬 종과 같은 길이로 빛이 반짝였다.
세 번째 반복 뒤, 등대의 빛이 그 리듬을 따라왔다.
바렌이 알아들었다.
세라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정밀한 설명은 나중이었다. 지금은 멀리 떨어진 사람이 같은 순간을 고를 수 있었다.
빛실 위에서 맑은 원이 커졌다.
바다의 접힌 띠가 조금 펴졌다. 오르락내리락하던 종루 지붕이 잠깐 제자리에 머물렀다.
세라는 새 값을 적고 등대 쪽으로 표시판을 들었다. 티오가 미리 그려 둔 큰 숫자판이었다. 작은 종이의 글씨는 그 거리에서 읽히지 않았다.
등대에서 확인 빛 하나가 왔다.
다음 종소리에 세라는 다시 측정했다.
두 관측이 맞았다.
바다 위로 가느다란 길이 열렸다.
그것은 교본에 그려진 곧은 선이 아니었다. 낮은 물결 사이를 비켜 가며 길게 휘어졌다. 은빛 비늘이 수천 개 이어 붙은 것처럼 반짝였다.
소금날개 두 마리가 그 위로 미끄러졌다.
몸이 튕겨 나가지 않았다.
“열렸어.”
티오가 속삭였다.
세라는 기뻐할 시간이 없었다. 길 한가운데 짙은 그림자가 돌고 있었다. 위에서 본다면 단순한 바위 그림자로 보일 터였다. 낮은 자리에서는 물이 원을 그리며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급류였다.
그녀는 세모 표시판을 들었다.
누메는 부두에서 그 판을 보고 있었다. 선장이 손을 들어 답했다. 배가 물 위에서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세라는 길의 오른쪽 가장자리를 붉게 표시했다. 급류를 피해 건널 수 있는 폭은 배 두 척이 나란히 갈 만큼은 안 됐다. 배가 한 번 돌면 돌아오는 길이 막힐 수 있었다.
바렌의 빛이 빠르게 두 번 왔다.
철수 준비.
세라는 모래시계를 보았다. 스물여덟 번째였다. 관측에 몰두한 동안 티오가 뒤집고 있었다. 소년의 발목까지 물이 올라와 있었다.
“일곱 번째 발판이 잠겼어.”
티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세라는 마지막 숫자를 적고 기구를 풀려 했다. 젖은 매듭이 단단히 조여 풀리지 않았다. 티오가 작은 칼로 끊으려 했지만 날이 밧줄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서른 번째.
짐을 버릴 시간.
세라는 관측대를 놓지 못했다. 해도원에서 지급한 물건이었다. 자기 석 달 품삯보다 비쌌다. 이것을 잃으면 돌아가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결이 발판 위를 덮었다.
티오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사람만 돌아오라잖아.”
세라는 손잡이를 놓았다.
연필과 종이만 안쪽 주머니에 밀어 넣고, 티오가 건넨 밧줄을 잡았다. 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그녀는 다음 발판을 발끝으로 찾았다.
없었다.
한 발 앞에서 돌이 끝났다. 잘못 디뎠다.
발이 미끄러지는 순간 티오가 줄을 당겼다. 세라의 무릎이 돌에 부딪쳤다. 장화 안으로 찬물이 들어왔다. 아팠지만 발은 다시 돌 위에 있었다.
둘은 기어서 계단을 올랐다.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 관측대는 물 아래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주변을 소금날개 한 마리가 맴돌았다. 기구를 구할 수는 없었다. 길을 그린 종이는 가슴 안에 있었다.
누메의 배는 이미 부두를 떠나고 있었다.
선장이 세라 쪽으로 손을 들었다.
“돌아올 길은?”
“왼쪽으로 크게 돌면 안 돼요! 급류가 있어요!”
“그런 중요한 말은 처음에 해!”
누메의 말투는 화내는 것 같았지만, 배는 이미 세라가 표시한 좁은 쪽을 향하고 있었다.
세라는 젖은 몸을 끌고 등대로 올라갔다.
바렌은 관측대가 없다는 말을 듣고도 화내지 않았다. 기록지를 먼저 받아 들었다. 물이 스민 모서리를 조심스럽게 폈다.
“발은?”
“둘 다 있어요.”
“그럼 잘 돌아왔다.”
세라는 갑자기 울 뻔했다. 값비싼 물건을 잃고도 잘했다는 말을 들어서가 아니었다. 자기가 물건보다 먼저 돌아와도 되는 곳에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하지만 창밖의 배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세라는 빛실 창에 붙었다. 누메의 배가 은빛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 종루가 멈췄던 순간보다 항로가 좁아졌다. 바렌은 빛돌을 조금 돌려 각도를 맞췄다.
돌의 아래쪽이 우윳빛으로 흐려졌다.
충전된 빛이 줄어들고 있었다.
세라는 마루섬의 반짝임을 찾았다. 저쪽에서도 같은 시각에 배를 보아야 길이 유지됐다. 반짝이는 원이 한 번, 두 번 보였다.
세 번째는 오지 않았다.
바렌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종이 울렸다.
이번에는 짧고 빠른 소리였다. 오래된 비상 신호표에서 배운 리듬. 빛을 유지할 수 없음.
마루섬의 지붕이 안개 속으로 꺼졌다.
배는 이미 바다 한가운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