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는 이백나흘째 아침에 왔다. 수현을 부른 것이 아니라 조일에게 약속한 자리 보기를 하러 온 것이었다. 견습은 탁자 위의 주문 종이를 자기가 쓰는 순서대로 펼쳐 뒀다. 수현은 그 옆에 자기 컵을 놓으려다가 뒤로 물렸다. 작은 상자를 고르는 동안 가게의 앞 탁자는 조일의 것이었다.
목수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종이 모형을 봤다. 조일은 세 칸으로 나누면 주문을 잊지 않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길모는 어느 칸의 종이를 제일 자주 꺼내느냐고 물었다. 견습은 잠깐 망설였다. 아직 분류하는 이름부터 정하지 않은 채 칸을 셋 그렸던 것이다.
수현은 답을 대신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주문을 기다리는 것과 값을 받은 것, 끝난 것으로 나누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일의 주문에는 재료를 먼저 사야 하는 것도 있었다. 견습은 종이 넷을 실제로 옮겨 보다가 세 칸의 이름이 일의 순서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길모는 그럼 칸막이를 처음부터 붙이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만들 물건의 종류를 고치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공짜로 더 나은 상자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빼는 칸막이를 맞추려면 손이 더 갔다. 조일은 목수가 말한 품을 듣고 자기 주머니를 만졌다. 수현은 그 손을 보고 장부를 펼치지 않았다.
견습은 뚜껑이 꼭 있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겠다고 했다. 종이가 날아가는 것은 막고 싶지만 매번 여는 손을 더 쓰고 싶지는 않았다. 길모는 열어 둔 채 어디에 두는지 보자고 했다. 조일이 종이 뚜껑을 옆으로 젖히자 수현의 물컵이 놓이던 자리까지 닿았다. 오늘 아침 컵을 물린 까닭이 실제 문제가 됐다.
“제 물컵은 밤에 들어옵니까?”
수현이 묻자 조일은 상자도 밤에 잔다고 답했다. 길모는 둘 다 사라지면 싼 가구가 되겠다며 웃었다. 그들은 작은 농담 뒤에 실제 물건을 함께 놓았다. 컵을 조금 뒤로 보냈더니 수현이 앉아 손을 뻗어야 했다. 한 사람의 쉬운 뚜껑이 다른 사람의 긴 팔이 됐다.
조일은 상자 폭을 더 줄이겠다고 했다. 길모는 안에 넣을 종이부터 다시 접어 보라고 했다. 종이를 억지로 접으면 주문의 아래 줄이 가려졌다. 견습은 한 장을 펴고 다른 장을 얹어 보더니 자신이 필요한 것은 작은 상자가 아니라 하루치 종이를 꺼내 놓을 빈 폭일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수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목수 앞에서 새 의뢰를 없애 버리는 대답이 될까 조심스러웠다. 길모는 종이 모형과 실제 자리를 본 시간도 자기 품이라고 했다. 오늘 보기의 값과 나중 제작의 값은 처음부터 나누기로 한 터였다. 조일은 약속한 돈을 자기 주머니에서 꺼냈다.
길모는 뚜껑 없는 낮은 테두리와 옆으로 빠지는 얇은 덮개의 두 안을 남겼다. 어느 쪽도 오늘 만들지는 않았다. 견습은 일단 테두리가 낮은 안을 택하고 자기 종이로 며칠 써 본 뒤 제작을 다시 묻겠다고 했다. 수현은 자기 가게의 모든 상자가 한꺼번에 바뀌는 상상을 멈췄다. 오늘 물건은 하나였다.
목수가 나가기 전에 명주의 가게에서 새 문의를 받았다고 말했다. 수현이 그린 두 손의 그림을 명주가 보여 줬다는 것이다. 길모는 손가락 수를 다섯까지 세는 감정 품도 있느냐고 물었다. 수현은 그 부분은 손님이 마쳤다고 답했다. 길모는 그럼 자기 몫은 손가락이 지나갈 나무 폭이라고 했다.
그는 낮에 실제 자리를 보고 가능하면 작은 받침 두 개를 따로 놓는 안의 값을 말할 생각이라고 했다. 수현은 자기 그림대로 만들라고 하지 않았다. 어제 그려 둔 낮은 네모는 안 맞는 자투리 판을 놓아 본 뒤 남긴 질문이었다. 목수는 실제 아래 종이를 꺼내는 손을 다시 보겠다고 했다.
길모가 간 뒤 조일은 상자를 못 샀다는 표정을 잠깐 지었다. 수현은 자기도 새 물건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견습은 그럼 실망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된다고 답했다. 아침 보기 품을 잘못 썼다는 결론과 새 상자가 아직 없어서 아쉬운 마음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둘은 종이 모형의 덮개를 떼었다. 바람이 들면 날아갈 수 있었지만 오늘은 가게 안쪽에서만 쓸 것이었다. 조일은 종이를 한꺼번에 잔뜩 넣지 않고 실제 받을 네 장만 놓았다. 수현은 자기 컵을 원래 자리로 돌렸다. 견습이 그 손을 보고 상자의 이웃이 벌써 돌아왔다고 했다.
점심 뒤 수현은 문간에서 들어온 좁은 빛을 봤다. 종이 모형의 그림자가 바닥에 비스듬히 드리웠다. 그는 윤초에게 보여 주려던 그림을 오늘 조금 그려 볼 생각이 들었다. 칼의 금을 정확히 옮길 때처럼 손목을 세우지는 않았다. 빈 종이에 컵 두 개의 바닥부터 그었다.
첫 컵은 입이 너무 넓어 사발 같았다. 두 번째는 물병처럼 높았다. 수현은 두 물건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늠하다 웃었다. 어제 그릇 가게에서도 보는 자리마다 숫자가 달랐다. 자기 기억 속의 컵은 정확한 증거품이 아니었다. 그는 사발 같은 컵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뒀다.
조일이 옆에서 무슨 그릇이냐고 물었다. 수현은 아직 컵이 될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견습은 그럼 손잡이는 나중에 달겠다고 했다. 그는 원래 손잡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조일은 자기 눈에는 들 때 힘이 들 것 같다는 말로 물러났다. 종이 위에 잘못 그린 물건은 실제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
붓을 오래 쥐자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수현은 두 컵 사이에 탁자 선을 하나 긋고 멈췄다. 더 그리면 윤초에게 보여 줄 모양이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 버텨야만 진심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림을 말리며 손을 펴고 물을 마셨다. 실제 컵은 그림보다 작은 편이었다.
해가 기울기 전에 명주가 전갈을 보냈다. 길모가 현장에서 둘로 나뉜 받침의 값을 말했고 그녀가 그중 작은 시험용 제작을 맡겼다는 소식이었다. 손님 장은 기존 판에 두고 자기 쪽 장만 낮은 별도 틀에 놓아 보기로 했다고 했다. 수현은 그 안을 자기 승리처럼 읽지 않았다.
명주는 내일 낮에 실제 종이를 놓는 장면을 다시 봐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목수도 함께 있을 예정이었다. 오늘 새 문의였다. 수현은 자신의 손이 아침보다 피곤한 것을 느꼈다. 관찰 두 번으로 달라지는 통장이 반가웠지만 그 반가움이 내일의 몸을 대신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제와 같은 짧은 범위를 다시 정하고, 들거나 만들지 않는 조건도 유지해 답했다. 아침에 갈 수 있는지 확인할 것이며 판을 완성했다고 보증하지 않겠다는 말도 붙였다. 명주는 종이를 직접 옮기며 볼 것이라고 답했다. 두 사람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대신 이번에 무엇을 함께 볼지가 분명해졌다.
조일은 새 받침을 보러 가는 것이 부럽다고 말했다. 수현은 오늘 자기 상자가 있었으면 좋았겠느냐고 물었다. 견습은 그렇기도 하지만 자기가 묻는 사이 남의 물건은 벌써 생기는 것 같다고 답했다. 수현은 그 말에 문득 윤초에게 했던 자기 부러움이 떠올랐다. 쉬운 위로를 내놓지 않았다.
그는 명주는 이미 같은 판을 쓰다 새 문제를 겪었고, 조일은 자기 칸부터 고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늦다고 단정하지는 말자는 뜻이었다. 견습은 알아도 아쉽다고 했다. 수현은 알겠다고 답했다. 종이 모형의 낮은 턱을 손으로 눌러 시험할 일은 조일이 직접 골랐다.
바람이 문으로 들어오자 모형 안의 한 장이 들렸다. 조일은 급히 손으로 덮었다. 손가락 아래에서 종이가 구겨졌다. 견습은 낮은 테두리를 고르면 꼭 다른 누름 물건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수현은 바람 들어올 때만 덮개를 얹는 안도 있겠다고 했지만 만들기 전에 실제로 불어오는 길부터 보자고 했다.
그들은 문을 활짝 열어 큰 바람을 일부러 만들지 않았다. 다음 번 자연스럽게 바람이 들 때 종이가 어느 쪽부터 움직이는지 보기로 했다. 조일은 귀퉁이에 자기 작은 나무 조각을 놓았다. 수현은 그 조각을 날카롭거나 무거운 쇳덩이로 바꿔 주지 않았다. 가벼운 종이를 누르다 손을 다치게 하면 또 다른 문제가 됐다.
잠깐 뒤 바람이 다시 들었다. 종이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래 주문을 꺼낼 때 나무 조각도 함께 밀렸다. 조일이 웃으며 자기 물건은 아직 밥을 먹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수현은 쌀은 먹이지 말라고 답했다. 견습은 그럼 종이만 먹여 두겠다고 했다. 낮은 모형 안에 오늘의 실제 한 장이 남았다.
저녁 무렵 윤초가 짧은 소식을 보냈다. 어제 자기가 들른 뒤 늦게 쉬게 했느냐는 물음은 없었다. 내일 저녁 가게 앞을 지나갈 수 있는데 그림을 볼 마음이 생겼으면 알려 달라는 말이었다. 수현은 아직 두 컵밖에 없다고 답했다. 더 그려서 나아지면 보여 주겠다고 덧붙이려다가 멈췄다.
그는 지금 상태로 짧게 보여 줘도 좋겠다고 답을 고쳤다. 내일 낮 방문이 실제로 끝난 뒤 몸을 보고 다시 알리겠다는 말도 했다. 그림까지 예약처럼 쌓으면 즐거운 일이 또 빚이 될 수 있었다. 윤초는 그러자고 답했다. 그 종이는 감정 요청과 다른 쪽에 놓였다.
수현은 종이 위의 두 컵을 보았다. 한쪽이 너무 커서 두 사람이 같은 물을 마셨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 사이 탁자에 빈 곳이 있었다. 윤초가 자기 메모를 내려놓고 차를 마시던 순간이 거기에 가까웠다. 그는 방을 정확히 재현했다는 설명을 쓸 생각은 없었다.
조일이 저녁 주문 하나를 마쳤다고 했다. 종이는 모형의 어느 칸으로 가야 할지 애매했다. 끝났지만 대금 일부는 아직 받지 못한 주문이었다. 견습은 상자를 셋으로 나누는 대신 한 장의 아래 모서리를 접고 받은 돈을 옆에 적었다. 수현은 글자가 가리지 않는 쪽인지 물었다. 조일은 자기가 다시 읽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장면을 보며 수현은 물건이 없어서 아무 일도 못 한 날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상자가 필요 없어졌다고 대신 결론 내리지 않았다. 실제 주문이 늘면 모형은 금세 좁아질 수도 있었다. 견습은 오늘 한 장이 어디로 갔는지 알았고 그만큼의 일을 마쳤다. 그것은 남의 받침과 견줄 성과가 아니었다.
저녁 바깥이 조용해지자 수현은 내일 쓸 종이에 오늘 받은 문의의 범위를 적었다. 손님에게 보이는 숫자와 자기 쪽에서 쓰는 줄을 같이 볼 것. 새 받침의 높이를 만져 판정할 것이 아니라 실제 장이 어느 손에서 어디로 가는지 볼 것이었다. 결청을 쓰지 않는 이유를 매번 새로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오늘 그림을 작은 판 밑에 평평하게 뒀다. 조일의 주문 종이와는 섞이지 않았다. 비가 오면 문간 바닥이 마른지도 다시 봐야 했지만 지금 돌에는 새 자국이 없었다. 수현은 지붕과 상자와 그림을 한꺼번에 책임질 생각을 내려놓았다. 각 물건이 내일 만날 손은 달랐다.
등불을 낮추자 종이 모형의 덮개 없는 윤곽이 어두워졌다. 조일은 나무 조각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수현은 자기 컵을 씻어 뒤집었다. 뚜껑을 열 때 빼앗기던 그 자리는 이제 비어 있었다. 그는 내일 그릇 가게에서도 누가 어떤 자리를 돌려받는지 보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