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초는 붓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먼저 말하고, 적은 것을 듣겠습니다.”
수현은 그 선택이 손목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유를 대신 적지는 않았다. 사건 열하루째 아침, 관아의 정식 문답방이었다. 서린은 감정 서기로 입회했고 관아 기록인이 진술을 맡았다.
탁자에는 아직 어제의 사본이 없었다. 윤초가 먼저 요청한 말부터 듣기로 했다. 수현은 자기 이름이 적힌 빈 종이를 보았다. 오늘 본 진술이 자신의 의뢰에도 불리할 수 있다고 미리 안내받았다.
윤초는 죽은 짐꾼이 뚜껑을 열자고 했던 때로 돌아갔다. 그를 막은 일은 이미 말했다. 그녀는 같은 사실을 더 크게 말해서 새 사실처럼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 뒤 짐이 어디로 움직였는지부터 고쳤다.
“상자 둘이 한꺼번에 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내가 먼저 비킨 길로 한 묶음이 돌아 나갔습니다.”
수현은 숨을 천천히 골랐다. 이전 그림에서 윤초는 창고 쪽을 크게 묶어 그렸다. 두 짐을 합친다는 말은 전달자가 읽어 줬다고 했다. 실제 어느 물건을 넣었는지는 못 봤다고도 했다.
“그 묶음이 보조 짐이었습니까?” 기록인이 물었다.
“모릅니다. 천을 씌운 낮은 틀이었습니다. 검 상자 옆에서 왔습니다.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못 봤습니다.”
“직접 길을 비켰습니까?”
“예. 전달자가 인계 표지를 보였고, 나는 내 옆을 지나가게 했습니다.”
그녀의 왼손이 탁자 끝을 짚었다. 손목을 다치기 전의 오른손이 어디에 있었는지 설명할 때도 왼손을 썼다. 수현은 허공의 짧은 선을 종이 위에 따라 긋지 않았다. 관아 기록인이 직접 방향을 확인했다.
윤초는 나루 동쪽 짐터의 출입 틀을 그렸다. 짐꾼이 서 있던 곳, 자기가 막은 뚜껑, 전달자가 다가온 곳. 길을 내준 자리는 창고 입구가 아니라 그 옆 통로였다.
그동안 말하지 않은 까닭을 묻자 그녀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바깥에서 물통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수현은 그 소리에 눈을 돌렸다가 다시 그녀를 봤다.
“내가 본 것만 말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못 보게 했는지는 빼고 싶었습니다.”
말이 짧아져도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윤초는 짐을 열지 못하게 한 것을 계약 준수라고만 부르려 했다고 말했다. 인계 표시를 확인한 것도 맡은 일을 한 것이라 여겼다. 두 일을 나란히 쓰면, 자기가 의문을 들은 뒤에도 통로를 열었다는 사실이 남았다.
“그 사람이 무게를 다시 재자고도 했습니까?”
“예. 뚜껑을 못 열면 저울에 다시 올리자고 했습니다.”
수현은 시선을 내렸다. 나루 장부에는 두 번 잰 무게가 있었다. 그 두 번째가 윤초가 거절한 재측정과 같은 일인지는 아직 몰랐다. 시간 순서부터 다시 맞춰야 했다.
“왜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출항이 늦으면 내 책임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 얼굴은 못 봤습니다. 나는 내 계약에 그 조건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기록인이 원문 계약에 적힌 문장인지 물었다. 윤초는 모른다고 했다. 읽어 준 말과 자신이 읽은 말을 지난 진술부터 나누기로 했는데도, 그날의 압박은 여전히 자기 생각처럼 붙어 있었다.
수현은 자기 수령 부표를 떠올렸다. 돈을 세느라 읽지 않은 작은 문장. 남의 이름이 된 글씨와 자기가 대수롭지 않게 넘긴 글씨를 한꺼번에 남 탓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진술을 받은 뒤에야 관아 기록인은 어제 창고에서 확보한 열람 사본을 보여 줬다. 윤초는 자기 이름 옆의 획을 오래 보았다. 수현은 그 눈길로 알아봤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제가 한 표시와 닮았습니다. 이 종이인지는 모릅니다.”
“어떤 종이에 표시했습니까?”
“인계가 끝났다는 반쪽 표. 큰 이름은 미리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그 옆에 줄을 넣었습니다.”
“무엇을 확인하는 표라고 들었습니까?”
“호위 구간을 마쳤다는 표라고.”
윤초는 칼을 쥐지 않은 오른손으로 나무판 위 종이를 눌렀던 일을 설명했다. 짐 내용과 무게를 확인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표시하지 않았다는 말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서린이 말을 끊지 않고 기다렸다. 수현은 그녀가 옆에 있어 자기 입도 기다릴 수 있었다. 윤초가 한 일의 범위를 지키는 것은 그 일을 지워 주는 것과 달랐다.
관아 기록인은 원본의 남은 반쪽과 표국 보관 양식을 대조하겠다고 했다. 어제 창고 쪽 종이는 수령 근거의 일부였고 윤초가 직접 쓴 원본은 아직 소재를 확인해야 했다. 사본에서 닮은 획을 봤다는 사실만으로 필적을 판정하지 않았다.
“사본이 맞다면 거기에 적힌 인계가 있었다는 뜻은 되겠지요?” 수현이 물었다.
기록인은 고개를 저었다.
“어느 인계를 뜻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대의 부표도 같은 질문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수현은 고개를 숙였다. 자기 이름에는 느렸던 판단을 윤초의 이름에는 서두를 뻔했다. 그는 방금 질문도 문답 기록에 남겨 달라고 했다. 자신이 어느 부분에서 앞서갔는지 다시 볼 수 있어야 했다.
진술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쉬는 동안 윤초는 물잔을 두 손으로 감싸려다 오른손을 뺐다. 왼손 하나로 잔을 드니 바닥에 물 고리가 남았다. 수현은 천을 주되 탁자 위 그림은 닦지 않았다.
“나한테 화났나?” 그녀가 물었다.
“늦게 들은 것은 화납니다.”
“그럼 의뢰를 그만두겠나?”
수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중단 조건은 모르는 사실을 감춰 달라는 요구였다. 오늘 그녀는 숨겼던 사실을 말했고, 기록으로 남기고 있었다. 그 차이는 마음이 쓰린 것과 별개였다.
“말한 뒤 다시 없애 달라고 하시면 중단합니다.”
윤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없애 달라고 하려고 왔으면, 오늘도 안 왔겠지.”
그녀는 웃지 않았다. 수현도 웃지 않았다. 서로 믿는다는 말을 하지 않은 탁자 위에서 의뢰 조건 하나가 실제로 버텼다.
다음 문답에서는 그날 품삯을 받은 때를 물었다. 윤초는 인계 표시를 한 뒤 구간 완료분을 받았다고 했다. 돈을 받았다는 사실도 이전에는 말하지 않았다. 원래 받을 품삯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액수와 지급한 사람은 기억나는 범위에서 답했다. 지금 품삯을 돌려주면 자신이 한 표시가 사라지는지 묻지는 않았다. 수현은 관아가 그 돈과 표시를 별도 항목으로 받아 적는 것을 지켜봤다.
점심 무렵 진술 낭독이 시작됐다. 윤초는 두 군데를 고쳤다. 묶음을 직접 들었다는 표현은 길을 내줬다는 말로, 전달자가 상관이었다는 표현은 상관의 도장을 지닌 사람이라는 말로 바꿨다.
수현은 그 수정이 윤초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찜찜해했다. 그러나 보지 않은 상관의 얼굴을 봤다고 남길 수는 없었다.
윤초는 맨 마지막에 누락을 늦게 보충한 경위를 읽어 달라고 했다. 이전 진술의 날짜까지 포함됐다. 처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완전하게 쓰는 일이라는 문장이 남았다.
관아 사람은 이 진술만으로 통제를 풀 수 없다고 안내했다. 죽은 짐꾼의 가족에게 사과를 전하고 싶다는 요청도 별도였다. 가족은 현재 직접 만남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윤초는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
“편지도 지금은 보내지 않겠습니다. 원하지 않는다고 답한 것만 적어 주십시오.”
수현은 그녀가 더 아파 보여 무슨 말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그러나 가족이 언젠가 받아 줄 거라는 약속은 자신이 할 수 없었다. 그는 대신 떨어진 그림 종이를 정리했다.
문답방을 비우기 전 윤초가 의자를 제자리로 밀었다. 오른팔을 쓰지 않으려고 허리로 조금씩 밀었다. 수현이 도우려 하자 그녀는 됐다고 했다. 문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의자가 돌아갈 때까지 재촉하지 않았다.
수현은 그 짧은 시간을 기다렸다. 누구를 죽였느냐는 질문을 받는 사람도 방금 앉았던 자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게 결백의 증거는 아니었다. 다만 오늘 그녀의 말을 들은 뒤에도 수현이 잊지 말아야 할 한 사람의 동작이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곽두가 관아 앞 그늘에 있었다. 나루 기록 확인 때문에 온 것이었다. 윤초 진술 내용을 미리 듣지 않았고, 안에서 누구를 만났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는 수현에게 낮은 틀 모양을 본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날 포장 끈을 회수한 일꾼이었다. 보조 짐의 품목은 모르지만, 관아 수방 자재라는 말을 듣고 받침의 치수를 따로 적어 뒀다고 했다.
“그 사람이 말부터 하게 해 주시오. 우리가 아는 모양을 먼저 갖다 주지 말고.”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루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말을 한다고 믿게 되는 순간을 조심해야 했다. 오늘 윤초의 그림을 곽두에게 펼치지 않았다.
가게로 돌아가는 길에는 작은 철물상이 문을 닫고 있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었다. 수현은 숯을 조금 사려던 걸음을 멈췄다. 주인은 안에서 손을 내저으며 내일 오라고 했다.
수현은 그 한마디로 보복이 시작됐다고 적지 않았다. 장사를 일찍 끝내는 사정은 많았다. 다만 조일에게 오늘 물건을 못 산 사실과 남은 숯을 확인하자고 했다.
견습은 돈함보다 가게 장부를 먼저 펼쳤다. 이웃 공방에 넘긴 경첩 값이 들어왔고, 방값으로 대신 낸 돈 일부는 아직 합의회 정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오의 동행 품삯은 약속한 날 지급했다.
“진술을 쓰면 돈도 새로 생겨요?” 조일이 물었다.
“없어. 종이값은 더 들지.”
“그럼 밥은 먼저 먹어요. 종이는 식어도 되니까.”
수현은 그 말을 따랐다. 밥을 먹는 동안 오늘 들은 내용을 대신 읊지 않았다. 조일은 가게를 지켰고, 필요한 사본은 내일 맡을 범위만 받아야 했다. 남의 죄책감까지 견습의 저녁값에 얹을 수는 없었다.
해 질 무렵 서린이 나루의 독립 진술 사본을 가져왔다. 낮은 틀에 묶였던 나무표의 절반을 일꾼이 보관하고 있었다. 반출표를 돌려줄 때 운반료를 못 받아, 정산 때 대조하려고 남겼다는 경위였다.
원본은 나루 보관함에 임시 봉인됐다. 표에는 장명 보급소의 번호가 남았고, 반대쪽은 칠목표국 정산지와 맞춰야 했다. 수현은 처음으로 검의 길과 쐐기의 길을 묶을 수 있는 물건을 본 기분이 들었다.
서린은 아직 배치 입증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숫자가 맞더라도 붙는 가장자리, 출고 묶음의 구성, 반송 여부까지 대조해야 했다. 상단에도 그 항목을 알리고 다음 날 입회를 요청했다.
수현은 새 종이에 내일 비교할 물건을 썼다. 시편의 절편과 기존 파단면 관찰, 표국 운반 계약 부표, 수방 창고 인수 기록, 나루의 반쪽 표. 누구 것인지 각 줄에 적었다. 어느 원본도 자기 가게 물건이 아니었다.
서린이 마지막 회답을 꺼냈다. 도문결이 내일 입회하겠다고 했다. 다만 같이 온 문서에는 다른 요구가 있었다.
‘일괄 납품으로 주장하려면 백진석 검사인의 불합격품 반환도 같은 묶음에 포함하십시오.’
수현은 숙부의 쇠자가 놓였던 모루 밑을 보았다. 윤초는 오늘 자기에게 불리한 말을 남겼다. 내일에는 수현이 자기 집 이름을 배치 밖으로 빼지 않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