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를 자리에는 아직 칼이 닿지 않았다.
수현은 회랑 창고에서 옮겨 둔 함을 보았다. 합의회 뒤편의 작은 석실이었다. 불탄 창고에서 살아남은 물건을 다시 같은 자리에 넣지는 않았다. 오늘 열 함은 그중에서도 하나뿐이었다.
서린은 문 앞 명단을 읽었다. 수현, 상단 측 입회인, 칠목표국 기록인, 절단을 맡은 주 장인, 합의회 보관 담당. 윤초는 관아가 허락한 시간에 호송을 받아 왔고, 문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사건 여드레째 아침이었다. 수현은 오른손 붕대를 갈고 왔다. 오늘 힘을 쓰는 사람은 주 장인이었다. 쇠의 울림을 듣기 전에 쇠가 어디서 어떻게 잘리는지 모두가 볼 수 있어야 했다.
도문결은 오지 않았다. 대신 상단 입회인이 반론 문서를 읽었다. 보관 중 생긴 부식과 제작 때 생긴 결함을 절단 하나로 나눌 수 없으며, 시편을 훼손하면 재판매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재판매 대상이 아닙니다.” 서린이 말했다. “오늘 허락한 감정 범위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녀는 검 보관 시편의 끝쪽 일부만 붉은 종이띠로 표시했다. 윤초의 긴 파편과 짧은 파편, 스승의 쇠자, 도문결이 낸 새 검은 각자 봉인된 채였다. 한 자루를 자른다고 전부 같은 검이 되지는 않았다.
주 장인은 표면을 닦기 전에 묻은 기름과 얼룩을 그렸다. 수현은 왼손으로 그 그림의 방향을 짚었다. 칼끝, 칼등, 손잡이 쪽. 종이가 돌아가도 어느 면인지 잃지 않게 표시했다.
“여기가 줄눈입니까?”
서린이 작고 곧은 흠을 가리켰다. 수현은 고개를 낮췄다. 일정한 간격으로 새긴 것이 아니라 한 귀퉁이만 얇게 눌린 선이었다. 숫자도 이름도 없었다.
석문의 쪽지는 본인 확인이 끝나지 않았다. 그가 찍었다는 주장이 사실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기존 표면의 흠이 있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보는 모두 앞에 남길 수 있었다.
“누가 냈는지는 적지 마십시오. 절단 전에 있던 선으로요.”
수현이 말하자 주 장인은 선을 옮겨 그렸다. 자를 위치는 그 옆으로 조금 바뀌었다. 표면 표시를 통째로 없앨 이유가 없었다. 그 변경에도 입회인들의 확인이 필요했다.
조일은 오늘 가게에 남았다. 그 대신 수현의 왼쪽에는 비어 있는 의자가 하나 있었다. 견습이 있었다면 끈값을 몇 번 셌을지 떠올랐다. 수현은 그 생각으로 긴장을 조금 덜었다.
검을 고정하는 동안 금속과 나무 사이에 천이 들어갔다. 주 장인은 자기 도구를 하나씩 보이고 다른 쇠를 잘랐던 부스러기를 털었다. 수현이 아는 일이었지만 대신 손을 내밀지 않았다.
처음 긁히는 소리는 가늘었다.
다음 소리는 방 안을 길게 채웠다. 날이 한 번 지날 때마다 주 장인의 어깨가 조금 움직였다. 그만큼의 쇠가 원래 자리에서 사라졌다. 수현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을 허락한 종이의 무게를 뒤늦게 손끝에서 느꼈다.
윤초가 오른팔을 고쳐 놓았다. 관아 사람이 의자를 당겨 주었다. 그녀는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숙였다. 수현은 칼 부러지는 순간을 떠올렸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날의 소리를 자기가 대신 기억할 수는 없었다.
한참 뒤 작은 절편이 떨어졌다.
주 장인이 손을 멈췄다. 모두에게 도구에서 떨어진 가루와 절편을 구분해 보여 줬다. 가루도 버리지 않고 따로 받았다. 새로 생긴 면이 빛을 받았다.
수현은 그 앞에 천천히 앉았다.
검 안쪽에 어두운 띠가 있었다. 표면의 녹처럼 바깥에서 안으로 번진 모양과는 달랐다. 쇠를 겹쳐 단련할 때 맞물리지 않은 면이 길게 남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 말만으로 어느 화로에서 나온 쇠인지는 알 수 없었다.
“파검 그림을 가져오십시오.”
서린은 원본 검 함 대신 첫날의 관찰 그림과 이후 탁본 사본을 펼쳤다. 실제 파단면의 흐린 부분과 오늘 절편의 띠가 놓인 방향이 닮았다. 너비는 같지 않았다. 위치를 맞추려면 검마다 다른 두께도 따로 보아야 했다.
상단 입회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닮은 결함은 다른 검에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수현이 답했다.
“그러면 같은 강재라는 말은 못 하시겠군요.”
“같은 덩어리나 같은 날의 쇳물이라고는 못 합니다. 이 시편 안에 표면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어 붙임 결함이 있다는 말은 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끝내고 주 장인을 봤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도 같아야 했다. 주 장인은 절편을 돌려 빛을 바꿨다. 어두운 띠는 방향이 바뀌어도 남았다. 손톱으로 긁으려 하지는 않았다.
주 장인은 자기 말로 소견을 썼다. 단련 때 생긴 이음의 불완전함이 의심되며, 바깥 보관 상태만으로 생겼다고 보기 어렵다는 문장. 어느 납품 묶음 전체가 불량이라는 문장은 없었다.
수현은 결청을 쓰지 않았다. 손이 다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 필요한 것은 자기만 듣는 침묵보다 다른 눈으로도 남는 단면이었다. 그가 눈을 감으면 도리어 놓칠 것들이 있었다.
서린은 두 소견을 서로 다른 칸에 받아 적었다. 수현에게 유리한 증거가 됐다고 한 줄로 합치지 않았다. 윤초는 자리를 떠나기 전 그 종이를 읽었다.
“이 검은 부러질 수 있었다는 건가?”
“이 시편은 결함이 있습니다. 윤 표사의 검이 어떤 힘에서 부러졌는지는 더 봐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베었는지는 더더욱 아니고.”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초는 입술을 눌렀지만 실망을 그에게 떠넘기지 않았다. 그녀가 얻고 싶었던 말보다 작은 말이었다. 그래도 오늘 그 작은 말은 쇠의 안쪽에 닿아 있었다.
절편에는 새 번호가 붙었다. 남은 검에도 다른 번호를 붙였다. 원래 시편 하나가 두 보관물로 나뉘었으므로 목록부터 달라졌다. 수현은 칼을 붙이는 값만 알던 자기 가게의 장부를 떠올렸다.
상단 입회인은 분량이 줄었다고 기록해 달라 했다. 주 장인이 잘려 나간 자리를 보여 주고 가루까지 따로 담았다. 수현은 그 반론이 번거롭다고 생각하다가, 다음에 자기 물건을 누가 자르면 같은 요구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봉랍이 굳는 동안 수현은 오늘 얻은 답을 한 번 더 읽었다. 윤초의 파검에만 있던 의심이 합의회가 오래 보관한 물건 안에서도 보였다. 누군가의 맹세를 믿어야만 남는 질문에서, 서로 다른 사람이 다시 볼 수 있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앞날이 쉬워지지는 않았다. 결함 있는 검이 여기까지 왔다면 그 사이 검사한 사람, 돈을 받은 사람, 보내기로 한 사람의 몫이 있었다. 수현은 제 이름이 낀 칸도 빼지 않았다. 스승을 지킨다는 이유로 줄 하나를 먼저 지우면 오늘 자른 값이 없어질 것 같았다.
점심 종이 울려서야 문이 열렸다. 수현은 햇빛에서 눈을 두 번 깜박였다. 돌방 안의 어두운 띠가 한동안 눈앞에 남아 있었다. 손끝은 아무것도 듣지 않았는데 귀가 피곤했다.
윤초는 관아 사람을 기다렸다. 수현은 그녀와 나란히 문 옆에 섰다. 자유롭게 걸어 나가는 자신과 기다려야 하는 사람 사이에 문턱 하나가 놓였다.
“석문을 만나러 가나?”
“응답이 오면요.”
“나를 위해서라고 말하지 마. 그 사람은 그러면 말을 맞추려 들 거야.”
수현은 고개를 돌렸다. 윤초는 자기 손목의 붕대 끝을 왼손으로 눌렀다.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관아 사람이 다가오자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수현은 그 말이 기록에 들어갈 말인지 묻지 않았다. 오늘 이후 질문하는 자기 목소리에 남겨 둘 말이었다.
가게로 돌아오니 조일이 부품 장부 앞에 엎드려 있었다. 잠든 것은 아니었다. 숫자가 있는 줄마다 손가락을 대고 옮기는 중이었다. 이웃 공방에서 부탁한 경첩 크기와 재고표였다.
“쇠 속에 뭐가 있었어요?”
“붙지 않은 자리가 있었어.”
“그럼 우리 속도 좀 보면 안 돼요? 돈이 안 붙어요.”
조일은 오늘 받은 품삯을 보여 줬다. 기록 일의 절반은 끝냈고 절반은 대조를 받아야 했다. 받은 돈과 받을 돈을 다른 주머니에 넣었다. 수현은 죽 한 그릇 값을 실제 받은 쪽에서 꺼냈다.
그들은 가게 앞 긴 의자에 앉아 먹었다. 손님이 수리비를 묻고 지나갔다. 당장 맡기지는 않았다. 수현은 이제 모든 발걸음을 붙잡고 싶지는 않았다. 의뢰를 받으면 설명할 수 있는 범위가 조금 더 분명해졌다.
오후에 서린이 가게를 찾았다. 새 절편의 소견을 덮은 문서가 아니라 이전 정산 요청에 대한 회답을 가져왔다. 제칠차 검사 불합격품 일부의 인계료 수령인이 누구냐는 질문이었다.
상단은 석문이 정비품을 옮긴 사실은 인정했다. 다만 그가 검사도 함께 맡았다고 썼다. 수현의 대행 확인은 그 사람에게서 물건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근거로 붙인 것은 작성자가 없는 전달표 사본이었다.
수현은 목 뒤가 차가워졌다. 자기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보지 않았다는 말만으로 새 종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늘 확인한 결함이 내일 한 사람의 잘못으로 묶일 수도 있었다.
“그분을 본 검사자는 누구라고 합니까?”
“추가 회답이 필요합니다.”
서린은 문서의 빈 작성자 칸을 짚었다. 석문이 표국에 검 함을 옮긴 것과 수현에게 불합격품을 넘긴 것은 별개였다. 두 장소 사이를 선 하나로 이어 놓은 쪽은 상단이었다.
수현은 가게 뒤편으로 가서 모루 밑 빈자리를 보았다. 쇠자를 발견했던 자리에는 먼지 자국만 남았다. 숙부가 남긴 쇠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는 진술은 그대로였다. 이제 그 모름을 누군가 자기 이야기로 채우려 했다.
조일이 뒤따라오다 문턱에서 멈췄다.
“형이 안 받은 건 알잖아요.”
“알아. 그 사람이 안 줬는지는 그 사람 말을 들어야 해.”
수현은 창가로 돌아왔다. 믿음으로 서로를 구해 주는 이야기가 쉬워 보였다. 그러나 오늘 자른 쇠는 믿는 방향으로 단면을 바꾸지 않았다. 사람 말도 같은 자리를 남겨 줘야 했다.
해 질 무렵 석문의 응답이 왔다. 만날 시간은 없었다. 대신 그가 사는 곳의 문이 잠겼고 식구 둘이 짐을 들고 다른 골목으로 옮겼다는 말을 진오가 전했다. 진오는 뒤쫓지 않았다. 관아에 먼저 알리고 가게로 왔다.
서린은 즉시 전달자의 본 것과 들은 것을 나눠 물었다. 짐을 옮긴 것은 이웃이 봤고, 문이 잠긴 것은 진오가 직접 확인했다. 상단의 수레가 다녀갔다는 말은 두 사람 모두 전해 들은 것이었다.
수현은 검을 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늘 자기 손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셌다. 가족이 머물 곳을 확인하고, 관아가 사람을 찾을 때 필요한 장소를 정리하고, 새 절편이 누구 하나의 죄로 바뀌지 않게 하는 일.
그때 합의회 심부름꾼이 두 번째 문서를 들고 왔다. 도문결이 직접 낸 인사 확인서였다. 하급 검수인 석문을 성밖 보급소로 전출했다는 내용이었다.
날짜는 오늘이었다.
사유는 휴양과 업무 교대. 가족 동반 여부는 빈칸이었다. 문서 아래에는 다른 줄이 있었다.
‘기존 감정 협조 요청은 새 근무지로 이송 바랍니다.’
수현은 방금 자른 시편의 줄눈을 떠올렸다. 눈금 하나는 쇠에 남았는데, 그 눈금을 안다는 사람은 성밖으로 밀려났다.
서린이 문서 접수 시각을 적었다. 수현은 조일에게 가게 불을 꺼 달라고 했다. 오늘은 쇠를 더 볼 시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