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15세 이용가 4화

죽은 사람의 인장

본문 5,213자 · 공백 포함

AI를 활용해 창작한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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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장부를 봉인하는 데에도 끈값은 들었다.

조일이 남은 끈을 재는 동안 수현은 오른손을 탁자 밑에 놓았다. 손바닥 상처에 마른 피가 붙었다. 봉랍을 누르려 손을 펴자 살이 당겼다.

“제가 찍겠습니다. 본인이 보시는 앞에서요.”

서린이 현재 도장을 받았다. 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에게 맡긴 검은 함부로 만지지 않으면서 자기 손은 계속 쓸 생각을 했다. 그것도 고칠 버릇이었다.

검 함은 옆방에 있었다. 긴 파편과 짧은 파편, 합의회 보관 시편, 도문결이 낸 새 검은 각각의 목록대로 잠겼다. 젖은 검사표만 앞방의 천 위에 펼쳐졌다. 종이마다 모서리에 작은 돌이 하나씩 얹혔다.

“제 이름이 있다고 제가 검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하고 나니 먼저 변명한 꼴이었다. 서린은 붓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본인의 장부도 받았습니다. 같은 기준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제가 감정인이 될 수 있습니까?”

“본인의 서명에 관한 판단은 맡기지 않겠습니다. 쇠의 기록은 다른 입회인과 대조하고요.”

수현은 입을 다물었다. 남의 반론을 기다릴 때와 자기 말을 제한당할 때의 기분은 달랐다. 제한이 옳다는 걸 알아도 달랐다.

조일이 죽 두 그릇을 사 왔다. 한 그릇은 서린 앞에 놓였다. 그녀가 돈을 꺼내자 조일은 이미 값만큼 장부에 적었다고 했다.

“수리점 장부는 봉인했잖습니까?”

“새 종이에요. 밥은 장부 열릴 때까지 못 기다려서요.”

수현은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죽이 자꾸 그릇 밖으로 흘렀다. 조일은 웃지 않고 밑에 천을 깔았다. 그 배려가 손바닥보다 쓰렸다.

창고지기가 문 앞에서 기침했다. 구해 낸 정리꾼은 의원에게 갔고, 붙잡힌 짐꾼은 관아에 인계됐다고 했다. 노인의 옷과 신발도 마른 주머니에 따로 넣어 보관했다. 발자국 자리는 관아가 넘겨받았다.

수현은 노인이 말한 회색 등을 물으려다가 그만뒀다. 노인은 얼굴을 못 봤다고 말했다. 똑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하면 모르는 얼굴도 생겨날 것 같았다.

“내일 몸이 괜찮으시면 보관 위치부터 다시 확인해 주십사 전해 주세요.”

서린은 창고지기에게 그렇게 부탁했다. 범인의 이름은 부탁하지 않았다.

해가 진 뒤 종이장이 한 사람이 왔다. 합의회에 기록지를 대는 여자였다. 손톱 틈에 흰 풀가루가 말라 있었다. 그녀는 탁자 앞에 앉자마자 불을 멀리 옮겨 달라고 했다.

수현은 등잔을 벽 쪽으로 밀었다.

“먹이 마른 걸 봐야지, 불에 구운 걸 보면 안 되지요.”

종이장이는 검사표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서린에게 비스듬히 빛을 대 달라고 하고 종이 끝의 결을 살폈다. 가장자리에는 물에 젖어 솜처럼 일어난 섬유가 있었다.

“언제 만든 종이입니까?” 수현이 물었다.

“그렇게 바로 알면 장례 날도 종이에 적을 필요가 없겠지요.”

조일이 죽을 삼키다 멈췄다. 수현은 고개를 숙였다. 옳은 핀잔이었다.

종이장이는 납품한 기록지 묶음을 꺼냈다. 아직 쓰지 않은 종이에는 아래쪽에 얇은 격자무늬가 비쳤다. 검사표 아래에도 같은 모양이 있었다.

“이번 달에 바꾼 발입니다. 물 빠지는 대를 고치면서 이 줄이 더 생겼어요.”

그녀는 종이를 뜰 때 쓰는 틀이라고 덧붙였다. 그제야 수현은 두 무늬가 왜 나란히 놓였는지 알았다.

“그러면 숙부가 돌아가신 뒤 만든 종이군요.”

“제 종이라면요. 같은 발 자국을 낸 다른 집이 없다고 말하진 못합니다. 젖어 줄 하나가 붙어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서린은 종이장이의 말을 두 줄로 나눠 적었다. 무늬의 유사함과 제작 시기 추정. 어느 쪽에도 확정이라는 표지는 없었다.

수현은 검사표 날짜를 보았다. 장례 열이틀 뒤. 종이가 그때 새것이었다고 해도, 날짜와 도장을 함께 찍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옛 검사 내용을 나중에 옮겨 적었을 가능성도 남았다.

그런 문서라면 옮긴 사람과 근거를 적어야 했다.

검사표에는 그 자리에 자기 이름이 있었다.

수현은 왼손으로 무릎을 눌렀다. 종이보다 먼저 목이 팽팽해졌다.

종이장이가 돌아가기 전 조일이 문밖에서 불러 세웠다. 새 종이를 한 묶음 살 형편은 안 됐다. 대신 무늬를 확인할 작은 조각 두 장만 값을 치르고 샀다. 서린에게 남길 것과 수리점에서 볼 것이었다.

“배운 걸로 돈을 벌 거면 배우는 값도 내야죠.”

조일이 동전 셋을 셌다. 종이장이는 한 닢을 돌려줬다. 작은 조각이니 작은 값을 받는다고 했다. 수현은 그 거래를 가림판 너머로 지켜봤다.

숙부가 검사받을 검을 받던 날에도 누군가는 종이를 사고 먹을 갈았을 것이다. 날짜 옆에 도장을 찍고, 밥 먹을 돈을 받아 갔을 것이다. 수현은 스승의 손이 늘 옳았다는 기억만 붙들면 그 손 아래 놓였던 다른 사람의 손을 놓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 장부 숫자가 틀릴 가능성도 함께 적어 주십시오.”

그가 서린에게 말했다.

조일이 고개를 들었다. 수현은 견습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합격 여덟, 불합격 둘. 숙부 글씨인 건 알지만 제가 그날 검 열 자루를 전부 본 건 아닙니다.”

서린은 이미 남겨 둔 미확인 칸을 보여 줬다. 수현의 말이 들어갈 자리가 있었다. 그는 그 자리가 빈 채였다는 게 고마웠다. 미리 죄도, 미리 용서도 써 놓지 않은 종이였다.

서린이 마른 비교용 종이에 옛 도장을 찍었다. 그 도장은 어제부터 유품 목록에 올라 있었고 지금은 앞방에서만 꺼냈다. 현재 도장은 다른 쪽에 찍혔다.

백 자의 끝이 짧았다. 검사표의 흔적과 닮았다.

“같은 도장입니까?” 조일이 물었다.

“같은 모양입니다.” 서린이 답했다. “누가 쥐었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수현은 검사표의 붉은 자국을 살폈다. 한 귀퉁이에 검은 먹이 번져 겹쳤다. 도장이 먹 위에 찍힌 것인지, 젖으면서 먹이 밀린 것인지 눈으로는 분명하지 않았다.

종이장이가 떠나기 전에 그런 자리는 손대지 말라고 했었다. 물을 더 적시거나 긁으면 처음 번진 흔적부터 사라진다고 했다. 수현은 반쯤 뻗은 손을 거뒀다.

“쇠처럼 들으면 안 돼요?” 조일이 낮게 물었다.

“종이는 안 들려.”

“손까지 안 좋은데 물어봤네요.”

“손이 좋아도 못 들어.”

그 말을 분명히 하니 수현도 조금 편해졌다.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확실해졌고, 그만큼 해야 할 일이 좁아졌다.

그들은 장례 날짜를 확인할 사람부터 정했다. 조문 온 모두를 의심하는 명단은 만들지 않았다. 도장이 놓였던 서랍, 뒤채 출입을 본 사람, 상단이 장부를 찾았다는 말을 따로 적었다.

수현은 상단에서 몇 명 왔는지조차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숙부가 누운 방 앞에 신발이 줄지어 있었던 것만 기억났다. 그중 누가 도장을 만졌는지는 본 적 없었다.

“장부를 내준 적은 있습니까?” 서린이 물었다.

“없습니다. 찾아 달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대행 날인을 허락한 적은요?”

“없습니다.”

그 두 대답은 기억의 안개 속에서도 단단했다. 수현은 적힌 문장을 읽고 왼손으로 자기 이름을 썼다. 평소보다 비뚤어진 글씨였다.

서린은 새 글씨를 검사표와 바로 맞대지 않았다. 다친 손으로 쓴 것을 평소 서명이라고 쓰지 않겠다고 했다. 수현의 예전 수리 영수증 사본이 필요했다.

“가게에 있을 겁니다.”

“보내지 말고 내일 함께 가지요. 가져오는 동안 경위가 끊기지 않도록.”

내일 가게 문은 또 늦게 열게 됐다. 수현은 쌀값을 세다가 그만뒀다. 값이 안 드는 진실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도문결이 문턱 밖에 섰다. 빈손이었다. 서린은 방문 시각을 적고 들어오라고 했다.

“선생의 미지급 대금을 정산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불리하게 쓰인다 들었습니다.”

“들은 분의 이름부터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서린이 묻자 도문결은 잠시 문 안을 보았다. 탁자 위의 검사표가 보이는 자리였다. 수현은 가림판을 세웠다. 반론을 들을 권리와 봉인 전 원본을 가까이 볼 권리가 같은 것은 아니었다.

도문결은 미지급금 이야기를 다시 했다. 백진석이 예전에 한 검사의 대금이고, 사후 정리 문서에 도장을 쓰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라고 했다.

“돌아가신 뒤 합격으로 정리할 수도 있습니까?” 수현이 물었다.

“살아 계실 때 끝낸 일이라면요.”

“그때 끝냈다는 기록은 어디 있습니까?”

“상단에서 찾아야 합니다.”

서린은 제출을 요청했다. 도문결이 날짜를 묻자 그녀는 답했다. 제출 여부와 예정일을 문서로 남겨 달라는 대답이었다. 상단 책임자는 그제야 자기 소매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수현은 수첩을 빼앗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찾을 기록이 하나쯤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검 함의 봉인을 지켜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제 대행 승낙서도 함께 요청합니다.”

도문결의 붓이 멎었다.

“백 수리공이 쓰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썼는지 묻는 겁니까, 생각을 묻는 겁니까?”

“본인이 제일 잘 아실 테니.”

수현은 가림판에 놓인 자기 왼손을 보았다. 상처 난 오른손을 감추자 꼭 뭔가 숨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오른손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쓰지 않았습니다. 그 대답은 기록으로 남기겠습니다.”

서린은 도문결에게도 같은 기회를 줬다. 상단 책임자는 검사표 작성자를 확인한 뒤 답하겠다고 했다. 그것도 기록됐다. 입이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이 같은 종이에 남았다.

도문결이 나가고 나서야 조일은 숨을 길게 뱉었다.

“저분 말은 늘 문이 두 개네요. 한쪽으로 들어가면 다른 쪽으로 나가요.”

“우리는 문지방을 적어야지.”

수현은 웃지 못했다. 스승의 이름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어떤 문으로 자기를 밀어 넣는지도 아직 몰랐다.

앞방을 닫기 전 서린은 검사표를 다시 보았다. 종이 가장자리의 접힌 부분이 마르며 조금 벌어졌다. 그 안쪽에는 정리 목록의 번호가 가늘게 적혀 있었다. 날짜보다 작고, 도장보다 옅은 글씨였다.

그녀는 창고에서 남은 목록 사본을 가져오게 했다. 수현은 맞은편 의자에서 기다렸다. 손바닥이 욱신거릴 때마다 오늘 누가 무엇을 봤는지 처음부터 되짚었다.

종이의 무늬는 사후 제작 가능성을 가리켰다. 옛 도장과 같은 모양이 찍혔다. 대행한 사람의 이름은 자기 것이지만, 승낙한 기억도 문서도 없었다. 세 문장을 이어도 아직 누가 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밤 종이 울릴 무렵 목록 사본이 도착했다. 서린은 번호를 맞추고 수현에게 종이를 돌렸다.

제칠차 검수표가 아니라 재작성 서류 묶음의 번호였다.

그 아래에는 대행 확인 때 동석한 운송인에게 받을 서명란이 있었다. 아직 비어 있었다. 이름만 먼저 적혀 있었다.

윤초.

수현은 그 이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관아로 떠나기 전 했던 말이 돌아왔다. 운반 계약에 서명했다는 말. 짐을 열지 못하게 막았다는 말.

자기 이름을 도둑맞은 종이에, 그녀가 숨긴 계약의 끝이 닿아 있었다.

4화 끝

Written by Grapheme · Published by Aldus Lib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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