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에는 르네아의 이름만 있었다.
봉투 뒷면에도 세르단의 이름은 없었다. 르네아는 누가 빠졌는지부터 확인한 자기 눈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편지를 보낸 메르딘은 북쪽 아케이드의 작은 전시실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선창 행사에서 빛을 본 적은 없으나, 그 모임에 다녀온 동업자에게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배우들이 떠난 뒤에도 빛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빛이 먼저 사라지고 두 사람이 걸어 나갔다는 답을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순서를 거꾸로 해 볼 수 있는지 알고 싶다고 적혀 있었다.
배우가 떠난 뒤 무엇이 남느냐는 말에 르네아는 손을 멈췄다. 영구히 남는 환영은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공연 속 인물이 없어도 관객이 보고 싶은 형상이 있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전시실 바닥과 관객이 들어오는 문을 한 번에 떠올렸다. 한동안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메르딘은 기술자 장식을 주문하려는 것이 아니라 르네아가 자기 이름으로 구성하는 짧은 환영 전시를 의뢰하고 싶다고 했다. 공연이 아닌 형식이라 관객 수와 보는 시간, 설치와 해제, 운영 인력을 함께 정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자세한 조건을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제안이었다. 정해진 사례금이나 날짜는 적혀 있지 않았다.
세르단은 맞은편에서 의자 다리에 받칠 작은 나무 조각을 고르고 있었다. 내일 소멜이 소개한 재봉사의 의자를 보러 갈 준비였다. 르네아는 그에게 편지가 왔다고 말한 뒤 잠깐 멈췄다. 자기 이름만 적힌 일을 소리 내면 그의 자리에서 의자가 하나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게 전시를 맡기고 싶대요. 배우 없이요.”
남자는 나무를 내려놓았다. 르네아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너무 자세히 봤다. 축하한다면 자기도 축하받을 얼굴을 해야 할 것 같았고, 서운해한다면 지금부터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 세르단은 편지를 더 읽어도 되는지 물었다. 그녀는 건넸다.
그는 천천히 읽고 봉투와 같이 돌려줬다.
“어떤 것을 만들고 싶으십니까.”
르네아는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다. 남자가 자기 자리를 먼저 묻지 않아 뜻밖이었다. 그녀는 종이에 그려 둔 넓은 빛의 그림을 떠올렸다. 그 장면을 여기로 옮기면 될까. 그렇게 생각하자 전시는 다툰 그림을 따로 쓰는 핑계가 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가서 보고 싶어요. 저한테 뭘 기대하는지요.”
세르단이 미소 지었다. 자기에게 아직 없는 그림을 반가워하는 얼굴처럼 보였다. 르네아는 정말 반가운지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녀가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 생기는 말을 듣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다음에는 나무 조각을 다시 손에 들었다. 자기 일도 계속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르네아는 편지를 놓지 않았다. 남자가 순순히 기뻐하면 자기가 더 편해질 줄 알았다. 실제로는 거절할 말을 잃어 난처했다. 아직 전시를 하기 어렵다고 답할 수는 있었다. 그때 꺼낼 말이 전부 남자의 이름에서 시작하지는 않았으면 했다.
그녀는 메르딘에게 만나고 싶다고 답했다. 이브론에게는 오늘 남은 환영 손질을 마치고 내일 오전에 전시실을 보러 가겠다고 알렸다. 그가 준비 중인 재공연의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약속한 열흘의 초안 검토 날은 남아 있었다. 르네아는 그날까지 돌아와 자기 의견을 내겠다고 했다.
이브론은 필요한 극장 물건이 생기면 대여 여부를 별도로 보자고 했다. 그녀는 그 말까지 적고 편지를 챙겼다.
전시실 문은 다음 날 늦은 아침에 열렸다.
르네아는 혼자 갔다. 세르단은 재봉사의 작업실로 갔고, 서로 점심에 어디 있을지까지 맞추지는 않았다. 북쪽 아케이드 아래에는 유리 공방과 종이 가게들이 이어져 있었다. 반쯤 닫힌 문 사이에서 연마 가루 냄새가 났다. 그녀는 공연장 간판이 없는 길에서 자기 이름이 적힌 방문 약속을 들고 있었다.
메르딘은 생각보다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책상 위에 전시실 모양을 그린 종이를 올려놓았지만 르네아에게 먼저 실제 방을 보라고 했다. 방은 길쭉했고 안쪽에 낮은 창 둘이 있었다. 바닥은 돌 위에 나무판을 댄 구조였다. 예쁜 방이라는 인상과 실을 고정할 수 있는 방이라는 판단은 따로 해야 했다.
르네아는 판 사이의 틈과 벽 밑을 봤다. 아래 구조는 아직 열어 보지 못했다. 현장에서 구리실을 꺼내지는 않았다. 메르딘이 여기서 빛을 하나 볼 수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오늘은 그림으로 설명하겠다고 했다. 여자는 알겠다고 하고 의자를 가져왔다. 부탁을 거절해도 이야기를 이어 갈 수 있었다.
“편지에 배우가 떠난 뒤라고 쓰셨어요. 그런데 여기에는 배우가 처음부터 없어도 되겠네요.”
르네아가 말했다.
“그래요. 배우가 필요하다면 그 역시 당신이 고를 일이에요. 다만 저는 공연 사이를 채우는 장식을 부탁한 것은 아니에요.”
여자는 빈 벽을 가리켰다. 지난 전시에서는 그곳에 수공 종이가 걸렸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림보다 종이가 드리우는 얇은 그림자를 오래 보기도 했다. 메르딘은 그게 우연히 생긴 덤인지 작가가 보여 주려던 것인지 묻다가, 처음부터 빛을 만드는 사람은 무엇을 고를지 궁금해졌다고 했다.
르네아는 늘 인물이 지나갈 길과 얼굴을 남기는 빛을 궁리했다. 그 일이 좋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먼저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종이에 접힌 면 하나를 그렸다. 멀리서는 얇은 벽처럼 보이지만 한쪽으로 몇 걸음 옮기면 안쪽의 빈 곳이 보이는 형상이었다. 실제 사람이나 바람을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관객의 위치에 따라 보이는 모양이 달라져도 한 회로의 주형 하나로 유지할 수 있는 방식부터 생각했다.
메르딘은 관객이 계속 들어와 빛 주변을 걸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르네아는 그 부분은 정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사람마다 집중하는 곳이 달라질 때 하중도 달라졌다. 좁은 방에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채우는 방식은 처음부터 제외하고 싶었다. 짧은 관람과 완전한 해제 사이에 쉬는 시간을 둘 수는 있었다.
바닥을 볼 목공과 조수, 관객을 받을 사람이 필요했다. 르네아는 자기 이름의 전시라도 혼자 모든 일을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제 입으로 하니 어깨가 펴졌다.
메르딘이 설명한 예산으로는 여러 날 종일 켜 둘 수 없었다. 르네아는 짧은 관람 시간에만 운영하는 안을 계산하기로 했다. 자기 보수도 남는 만큼 받겠다고 적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관객이 아무도 오지 않으면 어떡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메르딘은 올 사람의 수를 약속하지 못한다고 했다. 르네아는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이미 인기 있는 무용수의 이름도 붙지 않는 방이었다. 자기 빛만 보러 오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실제로는 알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다가 곧 나갈 수도 있었다. 인물의 설명을 빼면 자기 빛이 충분한지 드러날 터였다. 그 두려움을 세르단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로 바꾸기는 쉬웠다.
“초안을 맡아 보고 싶어요.”
르네아가 말했다.
“바닥을 더 봐야 하고, 필요한 사람과 비용도 확인해야 해요. 가능한 운영 시간까지 적어서 가져올게요. 그걸 보고 실제 의뢰 범위를 정해요.”
메르딘은 장부를 확인해 날짜 후보를 보내겠다고 했다. 르네아는 재공연과 겹치는지 살핀 뒤 답하기로 했다. 우선 다음에 가져올 그림과 비용표를 약속했다.
점심을 주문한 뒤 손을 봤다. 구리실 자국 대신 종이에 그림을 그린 검은 가루가 묻어 있었다. 르네아는 창빛 쪽으로 손을 옮겼다.
혼자 먹는 식사는 빨리 끝났다. 세르단에게 첫 그림을 보여 주고 싶었다. 싫으면 어디가 그런지도 듣고 싶었다. 그의 대답을 의뢰 수락의 허가로 쓰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낮은종에는 그가 먼저 돌아와 있었다. 재봉사의 의자는 받침을 새로 깎아야 했고, 맡을 수 있는 시간과 보수를 직접 정했다고 했다. 르네아는 그가 고른 일을 듣고 나서 자기 종이를 펼쳤다. 전시실 문을 그린 첫 장부터 남자 앞에 놓았다.
“초안을 맡기로 했어요.”
말하자 정말 자기 일이 됐다. 세르단은 잘됐다고 했다. 르네아는 그 말만 듣고 다음 종이를 급히 넘기려다 손을 멈췄다. 남자가 먼저 어떻게 하고 싶으냐고 물었던 어제의 질문에 이제 대답할 것이 있었다.
“빈 곳을 보고 싶어요. 가까이 가면 없는 게 아니라, 가까이 가서야 안쪽이 보이는 걸요.”
세르단은 그림을 돌려 봤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종이의 접힌 부분을 일으켰다. 실제 환영이 없으니 종이는 벽이 되지 않고 구겨졌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끝을 받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그러라고 하자 얇은 종이가 세워졌다. 그가 받친 것은 이 모형뿐이었다.
“이 안에 사람이 서지 않아도 되겠군요.”
남자가 말했다.
르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장에서 서운함을 찾으려고 잠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여전히 자기에게 반가운 제안이면 그에게는 밀려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먼저 상상했다. 그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고 싶으면 그림 바깥의 질문도 해야 했다.
“제가 당신 없는 장면을 만들면, 보고 싶으세요?”
“네.”
그는 조금도 오래 걸리지 않고 답했다.
“같이 서는 것 말고 볼 수 있는 것도 좋습니다. 다만 저를 첫날부터 필요한 사람 수에 넣지는 마십시오. 맡은 의자를 고칠 날이 생겼습니다.”
르네아가 웃었다. 남자도 미소 지었다. 그에게는 자기 의자가 있었고 그녀에게는 빈 방이 생기려 하고 있었다. 서로를 좋아한다는 말이 어느 쪽의 일을 줄여 놓지 않았다. 남자가 기뻐한다는 대답을 믿으면 자기는 자기 두려움을 따로 봐야 했다. 그것이 그를 의심하는 것보다 조금 더 어려웠다.
“사실 당신이 싫어하면 안 하겠다고 말할 뻔했어요.”
그녀가 털어놓았다.
“제가 싫어한다고 해도 하고 싶은 일인가요?”
르네아는 구겨진 모형을 봤다. 예쁜 그림으로 다듬지 않아 끝이 비뚤었다. 저 안을 비추는 빛을 직접 만들고 싶었다. 누군가가 그것만 보러 들어오는지 알고 싶었다. 칭찬받을 만한 답이라서가 아니라, 이미 자기 눈이 그 방으로 가고 있었다.
“네. 해 보고 싶어요.”
말하고 나니 남자의 손에 받친 모형을 다시 자기 손으로 들 수 있었다. 세르단이 손가락을 뺐다. 종이는 조금 기울었지만 넘어지지 않았다. 르네아는 그것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무너지는 끝을 새로 접었다. 지금은 실제 하중을 걸지 않은 종이라 여러 번 틀릴 수 있었다.
저녁에는 각자 남은 일을 했다. 세르단은 의자 치수를 정리했고 르네아는 조수에게 물어볼 항목을 썼다. 펜에게 가능한 시간을 묻는 것부터 해야 했다.
일을 마치고 남자가 오늘은 그림을 집에 가져갈지 물었다. 르네아는 가져가겠다고 했다. 자기 방의 벽에 놓고 아침에도 보고 싶었다. 그 뒤에는 세르단과 가까운 길을 조금 걷고 싶었다. 두 가지 마음이 부딪치지 않게 외투 안쪽에 종이를 잘 넣었다.
문을 나서며 그녀는 내일 전시실에서 날짜 후보가 오기로 했다고 말했다. 세르단도 재공연 검토 때 자기 가능한 날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아직 두 종이는 같은 탁자에 펼쳐지지 않았다. 르네아는 그때 무엇이 겹칠지 모르면서도 오늘 약속을 취소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 이름만 적힌 봉투를, 이번에는 뒤집어 보지 않고 가슴 쪽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