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온의 편지는 이백여든넷째에 쓰여 있었다. 유리는 받은 날을 확인하고 종이를 폈다. 오늘은 이백여든일곱째였다. 그는 이백여든둘째에 그녀가 이백일흔아흐레째 부친 편지를 받았다고 썼다. 유리는 그 날짜를 다시 읽었다. 멀리 보낸 종이가 실제로 그의 손에 닿았다는 답이었다.
그녀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그 편지의 세부를 전부 외우고 있지는 않았다. 방에서 혼자 쓴 줄이 다른 탁자에서 읽혔다는 사실이 먼저 왔다. 이백여든넷째와 엿새째 보낸 뒤의 두 편지는 이 답이 확인해 주는 편지가 아니었다. 유리는 봉투를 겹쳐 놓지 않고 현재 받은 것의 날짜를 따로 남겼다.
그는 탁자를 돌린 뒤 발이 덜 걸린다고 썼다. 하지만 창가에서 읽을 때는 한쪽 눈이 부셨고 의자를 조금 옮겼다고 했다. 유리는 그 문장을 읽으며 자기 책 받침의 천이 밀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한 번 고른 편한 자리가 영원히 몸을 받쳐 주지는 않았다. 그는 덜 불편한 자리를 또 찾고 있었다.
책은 아직 끝내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읽는 책에서는 여행자가 떠난 뒤 남은 사람이 문을 수리하고 있었다. 같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어서 유리는 어느 문인지 몰랐다. 세온은 경첩 소리가 먼저 사라진 것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조용해진 집에서 떠난 사람의 발소리를 자꾸 기다리는 대목이라고 했다.
유리는 자기 책의 발받침을 생각했다. 서로 다른 집이었고 다른 작별이었다. 두 이야기가 같은 결말을 가져야 둘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소리 하나를 골라 보낸 것이 좋았다. 계절 계약의 증거를 설명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말이면서도, 어느 줄을 오래 읽었는지를 알려 주는 독자의 말이었다.
편지 중간에는 부탁이 하나 있었다. 다음에 만나면 그녀가 좋아한 대목을 목소리로 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유리는 그 줄에서 웃음이 났다. 전날 실제로 부친 편지에는 자신이 마지막 장을 읽어 주고 싶다는 말을 썼다. 서로의 종이가 아직 닿지 않은 날에 비슷한 부탁이 생긴 것이었다. 그것을 시계의 현상으로 읽을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그 문장을 한 번 소리 내 읽었다. 방 안에서는 자기 목소리만 들렸다. 세온이 종이에 쓴 부탁이 자기 목소리를 빌려 돌아오는 일이 조금 낯설었다. 유리는 종이를 다시 내려놓았다.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오늘 당장 길게 읽을 수 있는 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전에는 쉬기로 한 시간을 지켰다. 오른손은 편지를 오래 펼쳐 들면 손등 쪽이 당겼다. 받침 위에 놓고 읽다가 마지막 두 줄은 평평한 쟁반으로 옮겼다. 물건을 바꿔 쓰는 데 실패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책과 편지의 무게가 달랐고 오늘 손의 상태도 전날과 달랐다.
점심에 에다를 만나 편지에서 같은 부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친구는 그럼 둘이 같은 책을 읽기로 한 것이냐고 물었다. 유리는 서로 다른 책이라고 답했다. 에다는 그러면 들려주는 사람이 무엇을 빼고 무엇을 고를지도 이야기가 되겠다고 했다. 유리는 끝을 숨겨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 같아 조금 웃었다.
“끝을 안 말해도 재미있는 줄을 고르면 되죠.”
에다가 말했다. 유리는 자기가 좋아한 마지막 장을 전부 외워 읽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놓고 한 단락만 고를 수도 있었다. 상대가 읽고 싶어지면 빌려 주는 길도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그 사람을 대신해 책 한 권의 시간을 전부 살아 줄 수는 없었다.
친구는 자기 원고를 잠깐 들어 봐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처음 독자에게 다시 보여 주기 전 호흡이 어디서 끊기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유리는 손으로 원고를 들지 않고 앉아 들을 수 있는 짧은 범위면 좋겠다고 답했다. 에다는 첫 두 단락만 읽겠다고 했다. 실제로 고른 종이를 자기 앞에 놓았다.
첫 단락의 방문자는 문고리를 잡고 팔꿈치를 조금 접었다. 유리는 전날 설명으로 들었던 동작을 문장 안에서 처음 들었다. 소리는 생각보다 짧았다. 두 번째 단락에서 방 안 사람의 잔이 탁자에 닿았다. 이전에 들었을 때는 잔을 내려놓지 않았는데 새 원고에서는 그 소리가 생겼다. 유리는 끝까지 듣고 나서 바뀐 곳을 물었다.
에다는 상대가 끝내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잔을 내려놓아도 문을 열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유리는 그 소리 때문에 방문자가 더 오래 기다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는 자기가 쓴 문장에서 그런 시간을 듣지는 못했다고 했다. 같은 문장 앞에 두 사람의 귀가 있었다.
유리는 한번 자기가 읽어 봐도 되느냐고 물었다. 에다는 좋다고 했지만 고쳐 읽지 말아 달라고 덧붙였다. 유리는 종이를 책 받침에 올렸다. 첫 문장을 읽는데 호흡이 긴 곳에서 목이 말랐다. 친구가 읽을 때 매끈하던 줄이 자기 목소리에서는 중간에 끊어졌다. 그녀는 물을 마시겠다고 하고 멈췄다.
에다는 문장이 너무 길어서 그러냐고 물었다. 유리는 자기 호흡도 낯설다고 답했다. 자기 목에서 한번 끊겼다는 이유로 원고의 길이를 모두 고치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둘은 끊긴 위치만 표시하고 그 뒤 한 줄을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호흡이 덜 남아 마지막 단어가 작아졌다. 유리는 소리도 손처럼 그날 몸을 쓴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두 단락을 마친 뒤 더 읽겠다고 하지 않았다. 에다는 충분하다고 답했다. 친구는 같은 문장을 자기 귀로 듣고 싶은 곳이 생겼다고 말했다. 유리는 조언을 잘해 줬다는 칭찬보다 그 말이 좋았다. 읽어 준 목소리는 원고를 대신 완성하지 않았고 친구는 자기 글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오후에는 혼자 뜰에 나갔다. 낮은 온실창 안에 기울어진 잎들이 보였다. 전에 관찰을 전했던 담당이 마른 천을 들고 지나갔다. 유리는 인사를 했고 그가 먼저 현재 통로를 알려 줬다. 그녀는 관리 결과를 보고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오늘 자기 방문은 검사나 일의 재개가 아니었다.
담당은 창가 의자 하나를 닦고 다른 손님에게 내줬다. 유리는 그 사람이 앉는 것을 보며 자기도 저 자리에 오래 앉아 세온에게 읽어 줄 수 있을지 생각했다. 햇빛은 밝았고 바람은 종이를 넘길 만큼 불었다. 아름다운 자리와 목소리를 내기 편한 자리는 다를 수 있었다. 그녀는 다른 조용한 의자도 눈으로 봤다.
바깥의 돌턱에 앉았을 때 손등이 다시 당겼다. 유리는 무릎 위에 올렸던 책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좋아하는 일을 조금 했다고 몸이 완전히 돌아온 것처럼 하루를 늘리면 안 됐다. 그녀는 책을 펼치지 않은 채 나뭇잎 소리를 들었다. 읽지 않는 시간에도 가지고 나온 책은 자기 곁에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 세온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그는 다음 만남을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썼다. 대행실의 일정이 나오면 실제로 갈 수 있는 시간을 묻고 싶다고 했다. 유리는 그 줄에서 이미 약속이 잡혔다고 듣지 않았다. 자신도 쉬는 시간과 시계 설명의 다음 단계를 받아 봐야 했다. 두 사람에게는 서로 외의 일정이 있었다.
그녀는 전날 부친 편지의 끝에 날짜를 넣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늘 답을 받은 것은 더 앞의 편지였다. 지금 생각난 말을 이미 보낸 봉투 속에 고쳐 넣을 수는 없었다. 유리는 새 종이를 꺼내 같은 부탁을 서로 다른 날에 썼다는 소식을 짧게 남겼다. 그 종이는 오늘 완성하지 않아도 됐다.
에다가 저녁에 원고를 들려준 보답으로 차를 따르겠다고 했다. 유리는 그럼 자기도 세온에게 읽을 한 단락을 골라 들어 봐 달라고 했다. 친구는 차를 마시면서라면 좋다고 답했다. 원고의 교환이 빚을 없애는 정산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실제로 듣고 싶은 작은 일을 골랐다.
유리는 자기 책에서 손님이 발받침을 내려놓는 대목을 골랐다. 마지막 이름에 관한 줄은 읽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읽어야 장면이 살아 있는지 생각하다가 앞 문장 하나를 더했다. 에다는 누가 어디에 있는지 먼저 들리니 따라가기 쉽다고 했다. 유리는 상대가 같은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목소리의 시작에서 기억해야 했다.
그녀가 고른 단락에는 먼 길을 걷는 장면이 없었다. 물건을 내려놓고 발을 올리는 짧은 순간이었다. 읽으면서 자기 발도 의자 밑에서 조금 옮겼다. 에다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유리는 일부러 연기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친구는 그래서 더 잘 들렸다고 말했다. 몸은 문장 밖에서도 작은 대답을 했다.
목이 마르기 전에 읽음을 마쳤다. 차는 조금 식어 있었다. 유리는 찻잔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리고 들었다. 에다는 그 단락을 세온에게 들려주면 그가 발을 어디에 두는지 보고 싶겠다고 했다. 그녀는 실제로 같이 앉은 뒤에야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친구는 그러면 자기는 안 보는 쪽이 낫겠다고 했다.
그 농담에 유리는 잠깐 얼굴이 더워졌다. 누군가 자기 곁의 사람이 보고 싶다는 마음을 너무 분명히 알아보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화제를 돌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구에게 다음 만남을 중계해 주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았다. 같이 앉고 싶은 마음은 말할 수 있었고 그 자리의 나머지는 둘에게 남길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뒤에는 편지와 책을 다른 곳에 놓았다. 친구에게 읽어 준 종이 위에는 새로운 약속이 생긴 것이 없었다. 세온에게 전날 보낸 설명에는 아직 답이 없었다. 그 사실들을 하나씩 떠올린 뒤 유리는 자신이 오늘 목소리를 낸 장면을 생각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쉬어야만 회복을 지키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들은 친구의 문장과 자신이 읽은 책의 단락은 다른 종이에 있었다. 유리는 책갈피를 옮기다가 에다의 고친 문장을 베껴 두지 않았음을 떠올렸다. 다음에 달라진 글을 들을 수는 있어도 자기 필요에 맞춰 가져다 쓸 문장은 아니었다. 목소리로 받은 시간도 상대의 작업으로 남겨 둘 수 있었다.
그녀는 새 종이에서 세온의 책에 관한 질문 하나를 골랐다. 경첩이 조용해진 뒤 남은 사람이 그 문을 계속 쓰는지 궁금하다고 적었다. 결말을 꼭 알려 달라는 재촉은 붙이지 않았다. 그의 다음 읽음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다르면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편지에는 물음의 자리만 있으면 됐다.
밤에는 에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원고 속 문고리가 떠올랐지만 친구가 어떤 장면을 쓰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리는 그 차이를 즐겼다. 알고 있는 말이 생기면 일상 사물도 다른 소리로 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문이 원고의 문이 되지는 않았고 모든 기다림이 세온을 기다리는 시간은 아니었다.
그녀는 잠들기 전 새 종이의 첫 줄만 읽었다. 서로 같은 부탁을 했네요. 그 뒤에 시계 설명을 다시 길게 붙이지 않았다. 이미 전날 방법을 적어 보냈다. 오늘은 자기 목소리의 길이를 조금 배운 날이었다. 다음에 그가 실제로 옆에 앉으면 종이를 들지 않고도 한 단락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