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는 찻잔을 놓칠 뻔했다.
뜨거워서가 아니었다.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들어 올리는 순간 손목 안쪽이 뻐근했다. 그녀는 잔을 탁자에 다시 놓았다. 찻물이 받침에 조금 흘렀다.
맞은편 세온의 손이 움직이다 멈췄다. 그는 잔을 빼앗지 않았다. 마른 천을 가운데 놓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려 드려도 됩니까?”
유리는 잠깐 그를 봤다. 열두째 날 아침, 서류 없이 마시기로 한 차였다. 세온 앞에도 가방이나 결재판은 없었다.
“네. 조금만요. 왼손으로 들게요.”
그가 찻잔의 받침을 돌렸다. 손잡이가 유리 쪽으로 편하게 왔다. 그녀는 왼손으로 잔을 들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놓았다. 고마워요, 하고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무슨 큰 일을 해냈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유리는 그 점이 좋아서 찻물을 천천히 마셨다.
계약 마지막 날이 지나자 오히려 아픈 곳이 또렷해졌다. 일할 때는 다음 줄을 쓰느라 밀어 두던 감각이었다. 유리는 손목을 함부로 돌려 시험하지 않고 잔을 내려놓았다.
“계속 괜찮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에요. 오늘은 확인받으러 가려고요.”
그녀가 말했다. 세온은 의원을 바로 부르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마을에서 진료 가능한 시간을 알고 싶으냐고 물었다. 유리가 그러라고 하자 다온에게 연락 경로만 확인했다.
찻방 창에는 눈 대신 물방울이 맺혔다. 안쪽이 따뜻해서였다. 유리는 그 작은 물방울이 로델 전체의 해빙 신호처럼 보이던 처음 날을 떠올렸다. 이제는 창 하나의 조건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물방울이 아래로 길을 만드는 모습은 좋았다.
세온이 물었다.
“오늘은 혼자 다녀오시는 편이 좋습니까?”
유리는 질문의 두 갈래를 생각했다. 아프니 따라오라는 말도, 일을 쉬니 혼자 있겠다는 말도 바로 나오지 않았다. 누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제대로 고르려면 잠깐 시간이 필요했다.
“진료는 혼자 받을게요. 돌아오는 길에는 같이 걸어도 좋겠어요. 당신 일정이 괜찮으면요.”
그는 자기 오전 업무가 끝나는 시각을 말했다. 그보다 빨리 끝나면 찻방에서 기다려도 됐고 다른 일이 생기면 연락하기로 했다. 서로의 기다림을 끝없이 열어 놓지 않았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차를 마셨다. 도움을 받는 조건을 말한다고 친밀함이 식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잡을 수 있는 손잡이가 생기는 느낌이었다.
다온이 아침 식사 그릇을 가져왔다. 수프 옆에 작은 달걀 부침이 놓였다. 유리는 한 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빵을 자를 때 손이 불편하자 다온이 물었다. 잘라 줄까, 하고.
“부탁드릴게요.”
유리가 대답했다. 세온이 조금 웃었다. 그녀는 그 표정을 보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
“일부러 오늘 도움받는 연습하는 건 아니에요.”
“저도 예전에 그 말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답했다. 반박하려던 유리도 웃었다. 서로가 했던 말을 전부 빚처럼 돌려받지 않아 다행이었다.
진료를 기다리는 방에는 마른 풀 냄새가 났다. 유리는 자기 손을 설명했다. 언제부터 어떤 동작에서 아팠는지, 쉬면 어떻게 달라지는지 말했다. 계절의 대가가 몸으로 옮겨 온다는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진료 뒤에는 당분간 무리한 쥐기와 긴 필기를 줄이고 경과를 다시 확인하기로 했다. 통증이 없어졌다는 결과는 아니었다. 유리는 다음 업무를 정할 때 역할을 조정할 항목을 자기 수첩에 짧게 남겼다. 왼손 글씨는 삐뚤었다.
밖으로 나오자 세온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약속 시각까지 조금 남아 있었다. 유리는 그가 미리 와서 눈을 맞으며 서 있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부터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근처 처마 아래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을 봤다. 종자 주머니를 든 여자가 안부를 물었다. 꽃은 피었느냐는 질문이 아니었다. 오늘 손은 어떠냐고 물었다. 유리는 조금 쉬어야 한다고 답했다.
여자는 자기 주머니를 들어 보이고 온실 교대에 간다고 했다. 유리가 따라가 점검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이 다른 사람도 자기 씨앗의 일은 계속하고 있었다.
세온이 약속한 시각에 왔다. 그는 진료 결과부터 요구하지 않았다. 유리가 추웠는지 물었다. 그녀는 처마 아래라 괜찮았다고 답하고, 오늘 손을 무리하게 쓰지 않기로 했다고 자신이 말할 범위만 전했다.
“걷는 건 괜찮아요. 가방도 이 정도는 제가 멜게요.”
유리가 덧붙였다. 세온은 가방 무게를 따지지 않았다. 대신 길에서 얼음이 적은 쪽으로 걸었다. 유리는 그 옆에서 보폭을 고르는 소리를 들었다.
서문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그가 잠깐 멈췄다. 유리는 그쪽으로 가고 싶으냐고 물었다. 세온은 물높이 확인은 다른 담당이 맡았고, 오늘 아침 자기가 갈 일이 더 생긴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그런데 발은 그쪽으로 가네요.”
“손이 먼저 출근한 날도 있었잖아요.”
그가 말했다. 유리는 웃다가 발걸음을 찻방 쪽으로 돌렸다. 서로의 습관을 알아보는 일이 놀리는 말로만 끝나지 않아 좋았다. 오늘은 같이 안 가는 길 하나가 생겼다.
낮에는 리넷이 어머니 공책의 사본을 가지고 왔다. 유리는 오늘 새 비교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리넷은 안다며 종이 대신 빈 꽃병을 내밀었다.
꽃이 든 병은 아니었다. 나무에서 돌아온 뒤 리넷이 남은 가지를 그리며 옆에 놓던 물병이었다. 물병 표면에 작은 잎을 그려 넣었다. 새 꽃을 만들어 달라는 뜻이 아니라 오늘 탁자가 비어 보여서 가져왔다고 했다.
유리는 그 병에 마른 나뭇가지를 꽂았다. 살아 있는 나무에서 뜯은 것은 아니었다. 장작을 정리하다 떨어진 잔가지였다. 꽃이 없어도 병의 입구가 덜 쓸쓸해졌다.
“그림은 당신 것이라고 적어 둘까요?”
유리가 물었다. 리넷은 자기 이름을 병 밑에 적었다. 어머니 이름으로 남기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 작은 서명을 보고 잠깐 웃었다.
리넷이 돌아간 뒤 유리는 가방 안의 미발송 편지를 만졌다. 죄송하다는 말로 시작한 첫 편지는 아직 그대로였다. 여섯째 날 보낸 세 질문에 대한 답도 오지 않았다. 스승의 답을 받지 못했다고 오늘의 휴식이 잘못된 선택이 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편지를 꺼내 고쳐 쓰지 않았다. 그날의 자신이 무엇을 무서워했는지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필요한 일을 남에게 맡기면 그 사람도 자기처럼 피곤해질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결국 둘 다 혼자 남게 만들었다.
저녁 전에 세온과 다온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새 업무 요청서를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 바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유리는 먼저 범위를 한 문장으로 들어 보겠다고 답했다.
대행실이 보관한 과거 구호 지시와 공동회 문서의 날짜를 대조하는 일. 관련 당사자에게 자발적으로 확인할 질문을 정리하고, 현재 수로의 관찰 결과와 섞지 않는 일이었다. 새 봄 공급이나 경계 변경은 포함하지 않았다.
유리는 잠깐 생각한 뒤 읽을 수 있다고 했다. 받아 놓는 것이 수락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른손을 쉬게 하고 다온이 각 항목을 읽도록 부탁했다.
기간은 열셋째 날 아침부터 열여섯째 날 일몰까지로 제안됐다. 하루 업무 시간과 중단권은 앞선 조사와 같았다. 유리의 관찰과 설명은 그대로 두되 긴 필기는 별도 기록 담당이 맡고, 유리는 자신이 확인한 내용의 검토와 필요한 짧은 메모만 하기로 했다.
“그분 품삯을 제 몫에서 빼겠다는 건 아니죠?”
그녀가 물었다. 다온은 아니라며 별도 기록 노동 예산을 보여 줬다. 공동회 자료 대조와 대행실 보관 문서 확인 비용을 나누고, 장작과 종자 식량은 건드리지 않았다. 유리의 하루 보수는 앞서 합의한 기준으로 금액란에 적혀 있었다.
유리는 그 값을 다시 확인했다. 손이 아프니 싸게 일해야 한다는 문장은 없었다. 반대로 아무 일도 못 하는 날까지 보수를 보장하라는 요구도 아니었다. 할 일의 방식과 범위를 바꿔 가능한 것을 정했다.
숙식은 별도였고 이동과 보조 인력 시간도 따로 셌다. 결과 보장이 아니라 확인한 범위와 미확인을 인계하는 계약이었다. 자동 연장은 없었다. 열여섯째 날 끝내지 못한 일이 생기면 그때 다시 정해야 했다.
세온은 오늘 계약에 서명하자고 재촉하지 않았다. 유리는 밤까지 읽고 내일 아침 답하겠다고 했다. 손잡이를 돌려준 사람에게 좋은 답을 돌려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가 그 사실을 알고 기다리는 것처럼 보여 마음이 조금 더 따뜻해졌다.
유리는 계약 초안을 접기 전에 종이 모서리를 왼손으로 눌렀다. 잘 접히지 않아 한 번 더 맞췄다. 세온은 그 작은 실패를 대신하지 않고 기다렸다. 도움받은 뒤에도 혼자 할 자리가 남아 있다는 것이 편했다.
창밖에서 아이들이 눈을 모아 작은 벽을 만들고 있었다. 한 아이가 더 높이 쌓겠다고 말하자 다른 아이는 문부터 내야 한다고 했다. 유리는 웃으며 그쪽을 봤다. 세온도 고개를 돌렸다. 종이 없는 아침이 끝나도 같이 볼 것은 남아 있었다.
“저 담은 금방 무너질 것 같네요.”
유리가 말했다. 세온은 한동안 아이들이 눈을 다지는 손을 보았다.
“그러면 다시 만들겠지요. 안에 사람을 넣지 않고.”
유리는 그 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모든 것을 오래 남길 필요는 없었다. 찻잔 방향을 바꾼 일은 원본으로 보존하지 않아도 자기 몸에 작은 편안함으로 남았다. 그녀는 계약서 위의 물방울 자국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방의 마른 칸에 넣었다.
다온이 나간 뒤 세온도 일어났다. 유리가 그를 불렀다.
“아침 차가 좋았어요. 손잡이를 기억해 준 것도요.”
그는 다시 앉지 않고 그녀를 봤다. 긴 침묵 뒤 낮게 대답했다.
“다음에도 필요한 쪽을 먼저 묻겠습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알아맞혀 달라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모르면 묻는 사람이 좋았다. 자신도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방에 돌아가자 일곱 병은 여전히 봉인돼 있었다. 봄을 더 빌려주지 않는 동안에도 이곳에 남을 이유는 다른 모양으로 자랐다. 유리는 그 마음과 새 계약서를 같은 상자에 넣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열셋째 날의 빛이 창 아래 들어왔다. 유리는 읽은 계약의 질문 세 가지를 확인하고 범위를 고친 뒤 서명했다. 첫날 보수 선지급분을 수령했다. 세온과 다온도 각자의 자격과 부담 범위로 이름을 적었다.
오른손이 완전히 나았다고 쓰지 않았다. 긴 기록은 새로 배정된 담당자가 맡았다. 유리는 자신이 확인할 문장을 소리 내 읽었다. 아픈 손 하나가 조사 전체를 떠받치는 방식은 아니었다.
첫 요청에 대한 대행실 기록 담당의 안내가 도착했다. 오래된 구호 관련 보관철에서 지시 전달 번호를 찾았다는 내용이었다. 열람 허가 범위를 확인한 뒤 원본과 맞출 수 있다고 했다.
유리는 보관 목록의 두 줄을 읽었다. 같은 날의 구호 요청과 지시 전달이 서로 다른 철에 나뉘어 있었다. 세온은 옆에서 그 번호를 보고 손을 멈췄다.
그가 낮게 말했다.
“제가 기다렸다고 말한 그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