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의 첫 줄에는 죄송하다는 말이 있었다.
유리는 그 아래를 읽고 펜을 내려놓았다. 로델에서 돌아갈 날짜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썼다. 다음 의뢰에 확답하지 않은 것도, 계약이 끝난 뒤 계속 온실 주변을 맴도는 것도 전부 잘못처럼 적혀 있었다.
문밖에서 알려 준 수레 시간은 내일 아침이었다. 세온은 빈자리만 확인했고, 유리의 답을 듣기 전에는 잡지 않았다. 그녀는 아침까지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가 돌아간 뒤 방 안은 너무 조용했다.
상자에는 봉인된 봄 일곱 병과 빈 병 하나가 있었다. 유리는 천 아래의 차가운 유리를 만졌다. 사흘 동안 열지 않은 병은 가져갈 수 있었다. 다음 온실에 빌려 줄 봄이었다. 여기 남긴 씨앗을 생각하면 그 사실이 어쩐지 배신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그런 문장을 스승에게 보내려고 하고 있었다.
아셀은 예전에 편지를 고쳐 돌려준 적이 있었다. 유리가 혼자 일을 마치지 못했다고 길게 썼을 때였다. 스승의 답은 질문 세 개였다. 누구의 일인가. 어디까지 받았나. 쉬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때 유리는 마지막 질문에 답을 쓰지 못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한동안 펜 끝을 굴리다가 첫 편지지를 접었다. 찢지 않고 가방의 안쪽에 넣었다. 나중에 다시 보면 오늘 자기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새 종이에 지금 모르겠는 것을 적었다.
기존 계약의 종료 확인과 새 조사의 시작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현장에 남지 않으면서 필요한 설명을 할 방법은 무엇인지. 남는다면 교대와 보수를 어느 범위부터 정해야 하는지.
세 질문을 적고 나자 글의 길이가 훨씬 짧아졌다. 아셀이 답한다고 현장의 겨울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답이 올 때까지 무조건 계속 일하겠다는 약속도 쓰지 않았다. 유리는 봉투를 닫지 않고 등불을 낮췄다.
그날 밤에는 이상한 꿈을 꾸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손목이 조금 뻐근했고 방은 차가웠다. 그녀는 이불을 한 번 더 끌어올렸다. 일어나야 할 일을 먼저 세지 않고 몸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창문이 밝아진 뒤에야 세수를 했다. 물은 처음 손끝에 닿을 때만 날카로웠다. 유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긴 숨을 내쉬었다. 거울 속 사람은 계약을 끝낸 온실지기였다. 이곳의 모든 겨울을 맡은 사람은 아니었다.
찻방에는 이른 수프가 끓고 있었다. 리넷은 교대자와 함께 저장실 점검을 마쳤다. 은빛콩의 새 잎은 어제보다 조금 펴졌고, 새로 받은 종자 두 주머니는 서늘한 선반에 있었다. 유리가 없던 시간에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온은 유리의 가방을 보고 수레를 탈 것인지 물었다.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다만 오늘 바로 다음 조사를 시작하지는 않을 거예요.”
유리가 답했다. 다온은 잠깐 국자를 든 채 서 있었다. 유리는 그 멈춤을 보고 사과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상대에게도 새 계획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면 오늘 나무 확인 설명은 누구한테 남겨요?”
다온이 물었다. 유리는 어제까지 작성한 임시 조치 인계와 관찰 범위를 꺼냈다. 자기 계약 때문에 넓어진 접점은 종료 뒤 급변하지 않았다. 물리 덮개와 뿌리를 계속 보는 일은 마을이 맡았고, 이상이 생기면 새 작업 범위를 정해야 했다.
다온은 이미 들은 설명을 다시 받아 적지 않았다. 교대자가 자기 말로 이해한 부분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유리는 계약의 마지막 인계에 빠진 것이 없는지 대조했다. 새로운 조사와 처음 맡은 일의 마무리는 이렇게 나눌 수 있었다.
리넷이 빈 꽃 그림을 가져왔다. 어머니 공책이 아니라 자기가 그린 나무의 새 기록이었다. 꽃이 떨어진 가지 옆에 작은 눈이 남아 있었다. 유리는 그것이 새 꽃을 약속하는 그림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도 오래 바라봤다.
“떠나시면 이건 보낼 수 있어요?”
리넷이 물었다.
“네. 다만 제가 바로 답할 수 있는지, 보고 새 작업을 맡을지는 그때 따로 정해야 해요.”
“알아요. 편지라고 다 부탁은 아니잖아요.”
리넷이 말했다. 유리는 자기 방에 두고 온 두 편지를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온갖 답을 구하는 것과 그냥 봐 달라고 보내는 것은 달랐다. 이 젊은 견습이 먼저 그 차이를 말해 줬다.
유리는 그림 아래의 관찰 날짜를 짚었다. 꽃을 잃은 다음에도 나무를 본 사람이 있다는 표시였다. 리넷은 종이를 접어 자기 서랍에 넣었다. 오늘 꼭 선물로 받아 가라고 하지 않았다.
밖에서 수레를 준비하는 소리가 났다. 세온은 말 옆에서 마부와 길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유리가 나오자 그는 하던 말을 마친 뒤 돌아봤다. 외투의 어깨에는 눈이 거의 없었다. 오늘은 한밤부터 문밖에 서 있었던 것 같지 않았다.
“아직 자리 있습니까?”
유리가 물었다. 세온은 마부에게 확인하고 한 자리 남았다고 했다. 남쪽 역참까지 먼저 가는 사람이 늘었다. 그녀가 안 타면 다른 짐을 싣게 될 자리였다.
길을 열어 뒀다는 말에는 실제 시각이 있었다. 해가 중천에 오른 뒤에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유리는 그 사실이 고마우면서 서운했다. 떠날 수 있는 사람으로 대한다는 것은 그녀가 없는 일정도 계속된다는 뜻이었다.
“제게 남으라고 부탁하실 일은 없어요?”
유리는 묻고 나서 조금 놀랐다. 떠나지 말라고 해 주길 바라는 질문으로 들릴 수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말을 덧붙이지 않고 세온의 답을 기다렸다.
그는 수레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인지 먼저 정리해야 합니다.”
유리는 그를 보았다. 세온은 공동회가 어젯밤 명단과 재심 준비를 검토했다고 말했다. 현장의 계절 반응을 다시 볼 전문가가 필요했다. 다만 대행이 부탁한다고 공동회가 필요한 노동을 공짜로 받아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아 달라고 말하기 전에, 요청할 범위와 낼 수 있는 대가를 정하자고 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유리는 주머니 안에서 손난로를 쥐었다. 잠깐 뜨거워진 마음을 그 온기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그가 자신을 원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하는 일이 필요하고 그 일의 값을 인정하겠다는 말이었다. 지금은 그 편이 더 깊이 마음에 닿았다.
“조건이 오기 전에는 남겠다고 답하지 않을게요.”
그녀가 말했다. 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셨으면 합니다.”
그 대답이 조금 이상해서 유리는 웃었다. 세온도 늦게 웃었다. 둘 다 원하는 답을 서둘러 받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유리는 수레에 실린 짐을 봤다. 지금 저기에 자기 상자를 올릴 수도 있었다.
“오늘 역참까지 가는 편은 안 탈게요. 그렇다고 조사 계약을 받은 것은 아니에요. 오늘은 제 일정을 하루 조정해서 쉬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녀는 그 선택을 자기 몫으로 말했다. 머물 방과 식사 비용도 확인했다. 다온의 찻방에 계속 무료로 묵는 것처럼 두지 않고, 오늘 하루의 이용 조건을 합의했다. 새 일의 보수와 미리 섞지 않았다.
세온은 마부에게 자리를 풀어도 된다고 전했다. 다른 짐 하나가 올라갔다. 유리는 수레가 떠나는 것을 보았다. 갈 수 있었던 길이 눈 위로 길게 이어졌다가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지나간 수레가 다음 기회까지 없애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셀에게 보낼 봉투를 마부에게 맡겼다. 우편을 실어 주는 조건을 확인했고 다온의 물품 운반과 별도로 처리했다. 보내지 않은 첫 편지는 가방 안에 남았다. 보낸 편지는 세 질문뿐이었다.
답은 며칠 뒤에야 올 수 있었다. 오늘의 선택을 대신해 줄 답은 아니었다.
세온은 곧바로 유리를 회의에 데려가지 않았다. 그는 오전에 대행실의 일을 보고, 조건 정리가 끝나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유리는 마을 끝까지 잠깐 걸었다가 돌아가겠다고 답했다. 함께 가 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았다.
눈길을 혼자 걷자 자기 발소리가 컸다. 며칠 동안 누군가의 보폭에 자꾸 귀를 기울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실이 싫지는 않았다. 다만 혼자 걸을 때 놓치는 자리도 알고 싶었다.
온실 뒤의 낮은 돌담에 볕이 닿고 있었다. 유리는 거기에 앉지 않고 장갑을 벗어 햇빛을 받았다. 병 안에 넣지 않은 겨울의 낮 볕이었다. 온기는 적었지만 누구에게 가을을 돌려줘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펴고 앞으로 맡고 싶은 일과 맡고 싶지 않은 일을 생각했다. 현장을 확인하는 일은 좋았다. 밤새 유출을 감시하며 깨어 있으라는 요구는 혼자 맡고 싶지 않았다. 주민의 증언을 자기 권한으로 열어 주겠다는 약속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목록을 적는다고 마음까지 차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유리는 세온이 자기 잔을 확인하던 얼굴을 떠올렸다.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더 선명한 조건이 필요했다. 그 마음으로 피로와 품삯을 흥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찻방에 돌아왔을 때 다온이 문을 열어 줬다. 유리는 오늘 일을 맡지 않았다고 다시 말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다온은 젖은 장화부터 벗으라고 했다. 따뜻한 방에 물을 들이면 마른 양말이 하나 더 필요해진다고 했다.
유리는 웃으며 장화를 벗었다. 의자에 앉아 발을 녹이는 동안 아무도 서류를 내밀지 않았다. 리넷은 자기 점검을 하러 나갔고, 다온은 수프를 저었다. 유리는 찻잔의 손잡이를 자기 오른쪽으로 돌렸다.
한낮이 지나자 세온이 왔다. 그는 방문 목적을 먼저 말했다. 조건표를 가져오지는 않았고, 유리가 어느 시간에 읽는 것이 편한지 물으러 왔다고 했다. 회의가 끝났다고 바로 답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저녁 전에 한 번 볼 수 있어요. 그 뒤에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고요.”
“내일 오전까지 답을 기다려도 됩니까?”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가진 시간을 그가 자기 일정표에서 먼저 빼 주는 것 같았다. 마음이 느슨해졌지만 유리는 그 감각을 수락으로 쓰지 않았다.
세온이 돌아서려다가 멈췄다.
“오늘은 시곗줄의 헐거운 고리를 수선해 달라고 맡겼습니다. 시계 본체는 열지 말고, 옛 표식에도 손대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유리는 그를 보았다. 시계가 멈춰 있던 일이 전부 끝났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물건을 계속 쥐고 자책의 증거로만 삼키지 않으려는 듯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늘과 옛 계약의 흔적은 그대로 남겨 두는 작은 수선이었다.
“돌아오면 어떻게 됐는지 알려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세온은 그러겠다고 했다. 둘 사이에 다음에 이야기할 작은 일이 하나 생겼다. 계약의 큰 결론과는 다른 종류의 약속이었다.
저녁 전에 다온이 조건 초안을 가져왔다. 유리는 창가의 빈 탁자로 옮겨 읽었다. 현장 조사 기간과 보수, 교대, 중단 사유를 적을 칸이 있었다. 빈칸이 많았다. 누군가 이미 정한 조건에 도장을 찍으러 부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제일 위의 요청 내용을 읽다가 펜을 멈췄다. 온실과 숲, 수문뿐 아니라 흰종 경계탑까지 한 줄에 들어 있었다. 아직 보지 않은 장소였다. 지금 인력과 기간으로 모두 살피는 것이 가능한지부터 물어야 했다.
유리는 초안의 범위를 동그랗게 묶었다. 머물 마음이 생겼다고 전부 맡아도 되는 것은 아니었다. 탁자 맞은편에 다온이 앉았고, 조금 뒤 세온이 들어왔다.
그녀가 펜을 들었다.
“남는다면, 먼저 이 한 줄을 나누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