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묶었다는 말이에요?”
서린이 물었다.
도운은 고개를 저었다.
“석 달 전이요. 장비 철거하기 전에 임시로 선을 살려 달라고 해서요.”
파란 묶음띠는 설비함 문을 잠근 게 아니었다. 옆으로 늘어진 케이블을 손잡이에 고정해 놓은 것이었다. 끝을 두 번 접어 안쪽으로 넣은 모양이 조금 특이했다.
“손으로 만졌어요?”
“아직은요.”
“그럼 그대로 둬요.”
서린은 그 말을 한 뒤 도운을 봤다.
“잠깐. 잘못 물었네요. 이 매듭이 도운 씨가 묶은 거라는 걸 확실히 알아요?”
도운이 다시 설비함을 봤다.
“저렇게 묶는 버릇이 있어요. 하지만 제가 묶은 그 띠인지는 모르죠.”
그는 자기 대답을 고쳤다.
서린은 메모에도 같은 수정을 남겼다. 도운의 매듭 방식과 비슷함. 작성자가 동일하다는 증거는 아님.
“여기 들어왔던 건 맞고요?”
“맞아요. 회사 통해서 받은 일이었어요. 이쪽 카메라 선을 관리실까지 살렸죠. 지연 장치는 없었어요.”
서린은 설비함에 적힌 780을 다시 봤다.
숫자가 최근에 적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잉크는 이미 말라 있었고, 주변 먼지와 비교한다고 정확한 날짜를 알아낼 수도 없었다.
“일했던 기록 남아 있어요?”
“차에 작업일지 있어요. 의뢰 문자도요.”
“지우지 말고 보관해 주세요. 나중에 날짜만 먼저 맞춰 봐요.”
도운이 입술을 한 번 눌렀다. 뭔가 더 말하려던 것 같았지만, 서린은 재촉하지 않았다.
계단 위에서 정윤재가 불렀다.
“두 분, 관리실로 올라오세요. 여기 출입은 막겠습니다.”
서린은 설비함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윤재가 출입 제한 띠를 붙이기 전에 공간을 전체 촬영하고, 파일 시각을 종이 메모에 옮겨 적었다.
사진을 많이 찍는 것과 무엇을 찍었는지 아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1층에는 구급대원이 도착해 있었다. 백하은은 접이식 의자에 앉아 발목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봉투는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응급실 가실 수 있겠어요?”
서린이 묻자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이거만.”
하은이 봉투 속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서린에게 건네지 않고 양손으로 모서리를 잡아 보였다.
생활관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이었다. 흐린 날, 열댓 명이 화단 둘레에 서 있었다. 사람들 머리 위에는 지금과 다른 번호판이 붙어 있었다.
은담 3동.
“여기는 서관이 아니라 3동이었어요. 엄마가 살 때는요.”
“어머님이 여기 거주하셨나요?”
“네. 지금은 다른 곳에 계세요. 돌아가신 분들 이름도 있고, 살아 있는데 나간 날짜가 틀린 분들도 있어요.”
서린은 사진 속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허락받지 않은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자료는 원하시는 범위에서 관계기관에 제출하세요. 제가 다 받아야 하는 건 아니에요.”
하은의 손이 조금 내려갔다.
“그럼 누가 봐 줘요?”
“오늘은 갇힌 사실부터 기록될 거예요. 사진하고 명부 문제는, 본인이 설명할 수 있는 자리에서 따로요. 사본 만드실 때 원본은 갖고 계시고요.”
하은이 봉투를 닫았다.
서린은 회사 연락처와 자기 이름을 다시 적어 줬다. 업무시간 뒤에도 받을 수 있는 번호였다. 이번에는 누가 그 종이를 읽게 될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은은 연락처를 접지 않고 봉투에 넣었다. 주소가 인쇄된 고지서와 이름이 적힌 종이가 한곳에 들어갔다. 누군가에게는 잡동사니일 것이고, 하은에게는 돌아갈 길일 것이다.
“제가 잘못 들어와서 일이 커진 건 알아요.”
그녀가 구급대원을 기다리며 말했다.
“혼자 들어오신 건 위험했어요. 그래도 안에 있는 걸 알고도 밖에서 걸었다면, 그건 다른 사람의 일이에요.”
“다들 제가 또 왔다고 할 것 같아서요.”
“오늘은 '또 왔다'하고 '갇혔다'를 따로 적어 달라고 하세요.”
서린은 하은의 얼굴에 잠깐 나타난 표정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안도라고 쓰기에는 아직 경계가 많았고, 고마움이라고 붙이기에는 자신이 한 일이 작았다. 누군가의 표정을 보고 그의 생각까지 대신 정하지 않는 것. 그것도 오늘 지켜야 할 순서였다.
구급대가 하은을 데리고 나가자 건물 안이 갑자기 넓어졌다.
사람 하나가 나간 자리가 방 하나보다 크게 느껴졌다.
관리실 모니터에서는 여전히 하은이 벽에 앉아 있었다.
화면 시각 18:59.
서린의 휴대전화는 19:12였다.
살아 있는 사람이 떠난 뒤에도, 화면 속 사람은 아직 구조되지 않았다.
남기준은 모니터와 출입문을 번갈아 봤다.
“저거 꺼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요?”
“기분이 이상해서.”
서린도 이상했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이유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끄고 싶지는 않았다.
“구조 장면이 나올 때까지 그대로 두세요. 그리고 현장대원께 보여 드리죠.”
윤재가 관리실에 들어왔다. 그는 화면 시각과 휴대전화를 나란히 촬영하고, 전원을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추가 현장 인력에게 인계할 때 지연 상태를 함께 전달하겠다고 했다.
“지연 시간을 시험하려면 저 안에 다시 들어가야 하죠?”
서린이 물었다.
“혼자 들어가는 건 안 됩니다. 문 앞까지는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둘은 연결부 계단참으로 돌아갔다. 서린은 준비해 온 종이에 '확인 19:14'라고 썼다. 윤재가 휴대전화 시각을 보고 초가 바뀌는 순간을 알려 줬다.
서린은 카메라를 향해 종이를 들었다.
열 초.
그다음 손전등을 세 번 켰다. 끝나는 시각도 기록했다. 시험은 단순해야 나중에 다른 사람이 똑같이 이해할 수 있었다.
관리실로 돌아오자 도운이 의자에 앉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작업일지 가져와도 됩니까?”
윤재가 차 위치를 확인하고 동행할 직원에게 부탁했다. 도운은 열쇠를 손에 쥐었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혼자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서린은 관리실 벽에 붙은 장비 배치표를 봤다.
1번 동관 입구.
2번 정문.
3번 창고.
4번 서관 214호 앞.
종이 아래쪽에는 다른 종이를 떼어낸 테이프 자국이 있었다. 오래된 배치표를 바꾸지 않았든, 일부러 옛것을 붙여 뒀든 결과는 같았다. 관리실 사람은 다른 방을 214호로 믿게 됐다.
서린은 기준에게 배치표를 누가 붙였는지 물었다.
“전부터 있었어요.”
“석 달 전에도요?”
“그때는 잘 모르겠는데.”
“원래 3동이라고 불렀죠, 이쪽?”
기준이 서린을 봤다.
“누가 그래요?”
“예전 사진에 그렇게 적혀 있었어요.”
“이름만 바뀐 거예요. 다들 서관이라고 불러서.”
서린은 배치표를 떼지 않고 촬영했다. 이름이 바뀌면 기록이 사라지기 쉬웠다. 3동에 살던 사람을 서관 명부에서 찾으면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 모니터 속 파란 문이 열렸다.
손전등 빛이 천장을 훑었다. 서린 자신의 손이 화면 아래로 들어왔다. 하은이 일어나다 주저앉았고, 도운이 바깥에서 손을 내밀었다.
화면 시각 19:09.
현재 시각 19:22.
관리실에 네 사람이 있었다. 모두 같은 장면을 보았다.
서린은 자신이 하은에게 했던 말을 기억했다.
무리하지 마세요.
소리 없는 화면에서는 그 말이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장면만 보고서는 하은이 왜 다시 앉았는지, 도운이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걸 보고 도망쳤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네요.”
서린이 낮게 말했다.
윤재가 메모를 하다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진술하고 현장을 같이 보는 거죠.”
잠시 후 추가 직원이 도착했다. 윤재는 현장 상황과 구조 완료를 인계했다. 서린은 다시 시간을 봤다. 종이를 들었던 시각에서 열세 분이 지나기까지 아직 몇 분이 남아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기준은 출입대장을 정리하려 했다.
서린이 손바닥을 들었다.
“그대로 두시기로 했어요.”
“정리만 하는 겁니다.”
“오늘 페이지도 안 접어 주세요.”
기준은 손을 뗐다. 표정은 불쾌했지만 대장을 가져가지는 않았다.
19:27.
화면 속에 종이가 나타났다.
확인 19:14.
이어 손전등이 세 번 켜졌다.
서린은 정확히 열세 분이라는 결과를 적었다. 적어도 지금, 이 채널은 현재의 빛을 780초 뒤에 보여 줬다. 우연히 잘못 맞춘 화면 시계로 설명할 수 없었다.
연결부에 남아 있던 직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열쇠를 가진 기준과 함께 설비함을 열었고, 내부에 중계 장치가 있다는 말이었다. 장치의 작은 표시창은 외부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지연 780초.
설정 변경 오늘 17:56.
사진이 전송됐다. 서린은 원본 보존 여부를 확인하고 자기 메모와 시각을 맞췄다. 도운이 일했던 석 달 전이 아니었다. 서린이 오기 마흔여섯 분 전, 누군가 장치를 바꿨다.
“저 표시만으로 누가 바꿨는지는 모르죠.”
윤재의 인계를 받은 직원이 말했다.
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인에게 날짜를 묻는 일과 관리인을 범인으로 쓰는 일은 달랐다. 장치 시계 자체가 정확한지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변경 시각은 표시값이라고 메모하고, 실제 표준시와 비교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모든 숫자가 하나의 시계를 쓰는 것처럼 다루면, 열세 분을 찾아낸 의미가 사라졌다.
직원은 장치 전원을 유지한 채 현장 상태를 보존하겠다고 했다. 다른 채널에 미치는 영향과 원본 저장 위치는 담당 조사에서 확인할 일이었다. 서린은 그 옆에 자신이 다시 해야 할 일을 적었다. 제출받은 도면과 실제 벽 길이의 차이. 그 부분은 누가 장치를 만졌든 달라지지 않았다.
“그 시간에 관리실에는 누구 계셨어요?”
서린이 물었다.
기준은 대답 대신 벽시계를 봤다.
그 시계는 여전히 두 분 느렸다.
도운이 돌아와 작업일지를 책상에 올렸다. 서린은 손대지 않고 겉장의 날짜만 읽었다. 석 달 전의 날짜, 의뢰 업체명, 장비 두 대의 관리 번호.
그중 하나가 전송된 사진 속 장치 번호와 같았다.
“중계기는 달았어요. 지연은 꺼 둔 상태였고.”
도운이 말했다.
“아까는 지연 장치가 없었다고 했죠.”
서린의 목소리는 평평했다.
“그 기능까지 있는 건 몰랐어요.”
“그럼 모른다고 적을게요.”
도운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서린은 대장을 향해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오늘 페이지를 촬영해도 되는지 현장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이 옆에서 확인했다.
오늘 날짜. 세 사람의 이름. 오후 정리 업체 인원은 둘로 적혀 있었다.
그녀는 다음 장 모서리에 비치는 검은 자국을 봤다.
종이가 얇아 뒷장의 글씨가 비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뒤집힌 글자가 아니었다. 다음 장 아래에 놓인 다른 종이의 인쇄였다.
직원이 기준에게 페이지를 넘기도록 요청했다.
다음 날 날짜가 나타났다.
10월 27일.
작업명, 최종 안전 확인.
확인자, 이서린.
서린은 자기 이름 옆을 오래 바라봤다.
서명 둘레에는 희미한 사각 테두리가 남아 있었다. 종이에 펜이 눌린 자국은 없었다. 미래에서 손이 넘어온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과거의 서명을 가져와 내일의 칸에 놓았다. 그 평범한 방법이 서린을 더 서늘하게 했다.
거기에는 아직 하지 않은 서명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