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아흔이레째 저녁, 생활관의 다른 방에는 작은 창이 두 개 있었다. 이준은 지난번 방으로 가려다가 입구의 프로그램 이름을 보고 멈췄다. 낮 점검 때 직원이 더한 바로 그 이름이었다. 그는 다른 출구의 위치까지 읽고 새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자신도 오래 알던 길보다 새 종이를 먼저 봐야 하는 사람이 됐다.
가방에서 꺼낸 장갑을 탁자 위에 놓자 맞은편 사람이 손을 잃어버렸느냐고 물었다. 이준은 오늘은 손을 빼고 가져왔다고 답했다. 상대는 감자 같은 나무토막을 또 놓았다. 지난번보다 작은 부분을 깎았다고 했다. 이준은 그럼 감자도 나이를 먹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맛은 보증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새 방에서도 지난 웃음 하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진행자는 오늘 물건의 안쪽을 그려 보자고 했다. 반드시 뒤집거나 자르라는 뜻은 아니었다. 겉에서 알 수 없는 곳은 모르는 모양으로 두어도 됐다. 이준은 장갑의 입구를 조금 벌렸다. 안쪽은 어둡고 손가락 끝까지 보이지 않았다. 손을 넣으면 모양을 만들 수 있겠지만 그 순간 탁자 위의 빈 장갑과는 다른 물건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넣지 않은 채 접힌 입구를 그렸다. 다섯 손가락을 다 넣으려 하니 종이 아래가 모자랐다. 맞은편 사람은 반만 그려도 장갑으로 보이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준은 잘린 것처럼 보일까 봐 그랬다고 답했다. 상대가 그럼 종이 끝을 조금 비워 두라고 했다. 그는 장갑 전체를 붙잡으려던 선을 줄이고 입구를 가운데 놓았다.
비어 있는 안쪽에 선을 더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늘 손이 들어가는 물건이라 안의 길을 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것은 엄지 앞의 구김과 입구 가까운 한 면뿐이었다. 이준은 실제로 볼 수 있는 안쪽만 어둡게 했다. 나머지를 상상으로 채운 그림도 그릴 수 있겠지만, 오늘 자기가 보고 싶었던 것은 지금 이렇게 놓여 있는 장갑이었다.
진행자가 손이 들어 있지 않아서 어떤 기분이 드느냐고 물었다. 그는 일을 마친 것 같다고 답했다가 아침에 처음 꺼낸 장갑도 비어 있다고 덧붙였다. 상대는 그럼 두 장면이 다 가능하겠다고 했다. 이준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빈 장갑이 언제나 지친 노동자를 뜻할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 쓸 손을 기다리는 물건일 수도 있었다.
옆 사람은 자기는 손을 넣기 싫은 날의 장갑처럼 보인다고 했다. 이준은 그런 날도 있다고 말했다. 상대는 오늘은 자신이 가져온 찻잔도 마시기 싫은 잔이라고 했다. 뚜껑을 잃어버린 잔이었지만 여전히 잔이었다. 이준은 그림으로도 마시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고 답했다. 일상 물건의 속뜻을 매번 성실하게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쉬는 시간에 한 사람이 생활관 벽은 다 고쳐졌느냐고 물었다. 이준은 현재 통행할 복도는 열렸고 창고 안쪽은 아직 제한돼 있다고 답했다. 젖은 기록을 처리하는 일도 따로 남았다. 그는 자기 손목의 선이나 밤의 작업은 말하지 않았다. 지금 모임 사람이 알아야 하는 것은 어느 길로 가고 어느 문을 열지 말아야 하는지였다. 그것은 현재 직원의 안내와 맞아야 했다.
상대는 그럼 새 안내 그림을 모임에서 그려 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준은 잠깐 장갑을 봤다. 자기도 낮에 비슷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길을 안내하는 그림은 실제 문과 방이 바뀔 때 누가 고칠지까지 정해야 했다. 오늘 자기 장갑 그림을 고치는 일보다 다른 책임이었다. 그는 모임 그림으로 곧바로 쓰기에는 먼저 물을 것이 많다고 답했다.
말이 길어지기 전에 진행자가 안내는 운영 담당과 따로 맞추고 오늘은 각자 그림을 그리자고 했다. 제안한 사람은 그냥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했을 뿐이라며 웃었다. 이준은 그런 뜻으로 들었다고 답했다. 거절한 뒤 상대의 마음까지 나쁘게 정할 필요는 없었다. 방 안의 연필 소리는 다시 제각기 다른 속도로 돌아왔다. 장갑은 아직 탁자 한가운데 있었다.
그는 사적인 취미를 지키는 말이 언제나 일을 싫어한다는 뜻으로 들릴까 봐 걱정했던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지금 제안을 한 사람은 자기 찻잔 그림을 보느라 바빴다. 이준의 선택을 오래 평가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 얼굴을 보고 자기 불편함의 일부가 자기 쪽에서 먼저 늘어난 것임을 느꼈다. 모든 질문 뒤에 시험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는 물건을 다른 방향에서 보았다. 장갑의 입구를 창 쪽으로 돌리자 안이 조금 더 밝아졌다. 동시에 엄지의 짙은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는 앞서 그린 그림을 지우지 않고 새 종이에 짧게 옮겼다. 빛이 달라진 장갑을 같은 순간의 두 면처럼 합치면 다시 존재하지 않았던 물건이 됐다. 사적인 종이여도 오늘 자신이 고른 관찰은 지켜 보고 싶었다.
맞은편 사람은 나무토막을 뒤집었다가 아까의 감자가 더 낫다고 했다. 이준이 왜냐고 묻자 아래쪽에 손이 닿던 자국이 마음에 안 든다고 답했다. 그는 그 자국이 물건의 안쪽을 조금 말해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상대는 그래도 오늘은 그리기 싫다고 했다. 이준은 그렇겠다고 답했다.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남도 그려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을 하고 나니 장갑 안의 어두움이 달라 보였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모르는 곳을 끝없이 밝혀 내는 일이 아니라 오늘 무엇을 보고 싶은지 고르는 일이기도 했다. 시설의 실제 안전을 확인할 때와 종이 한 장 앞에서의 책임은 같지 않았다. 그는 장갑 입구를 더 벌리려던 손을 거뒀다. 지금 보인 만큼의 그림이 한 장 있었다.
진행자는 마지막에 원하는 사람만 그림을 놓고 같이 보자고 했다. 이준은 두 장 중 처음 그린 쪽을 골랐다. 손가락이 종이 밖으로 다 나가지 않았고 안쪽도 반쯤만 보이는 그림이었다. 누군가 자루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장갑이 들으면 섭섭하겠다고 답했다. 이어서 다른 사람이 입구가 조금 웃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이번에는 고치지 않고 그 말을 들었다.
옆 사람이 왜 두 번째를 고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두 번째가 더 잘 보인다는 말이었다. 이준은 처음 것은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어서 좋다고 답했다. 실제 장갑 안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았지만 종이 안쪽은 더 많은 모양이 될 수 있었다. 사물의 상태와 그림을 보는 마음은 다른 답을 내놓았다. 그는 그 둘을 한 문장으로 맞추려고 애쓰지 않았다.
맞은편 사람은 문 그림도 여전히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준은 집에 있다고 답했다. 다음에 가져오라는 말은 없었다. 대신 오늘 장갑과 문을 나란히 보면 사람이 들어갈 자리 같겠다는 감상이 왔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여태 다섯 손가락을 정확히 그리려던 종이에 자기 손이 들어갈 빈 자리가 있었다. 그것은 진행자가 미리 정해 준 오늘의 교훈은 아니었다.
모임이 끝난 뒤 각자 의자를 넣었다. 진행자는 장갑을 놓고 가지 말라고 말했다. 이준은 손을 빼고 왔으니 이제 장갑은 가져가야 한다고 답했다. 작은 물건을 가방에 넣는 일이 묘하게 만족스러웠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인수했다는 표를 받지 않아도 됐다. 오늘 자기 물건은 자기 가방에, 다른 사람들의 종이는 각자의 손에 돌아갔다.
복도에서는 관리 담당이 현재 통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이준을 보자 아침 이후 새 이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고맙다고 답하고 지금은 모임을 마친 길이라고 덧붙였다. 담당은 알았다며 자기 점검 종이를 접었다. 이준이 매번 이 건물을 떠날 때 현장 경과를 인수해야 하는 사람으로 남을 필요는 없었다. 현재 일을 맡은 사람이 끝까지 건물 안에 있었다.
바깥에서는 비가 오지 않았다. 그는 우산을 펴려다가 다시 넣었다. 지난번 나왔을 때의 빗소리가 몸에 먼저 남아 있었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의 웅덩이는 작아져 있었지만 전부 마르지는 않았다. 그는 물을 피해 걸었다. 오늘 봉합을 새로 하지 않아도 되는지 확인하려 시간을 세지 않았다. 아직 밤 열한 시도 아니었고 새 접수도 없었다.
버스 안에서 태오에게 장갑 그림을 보냈다. 친구는 이제 손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이준은 손을 넣으면 다음 그림이 될 거라고 말했다. 태오는 오늘 그림은 오늘 장갑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런 것 같다고 답했다. 일을 마친 손인지 일을 시작할 손인지 못 골랐다는 말도 보냈다. 친구는 자기는 퇴근한 손으로 보겠다고 했다.
센터에서는 생활관의 다른 행사 자료 대조가 끝났다는 짧은 경과가 왔다. 같은 발표회의 사진 일부가 별도 묶음에 있었지만 손상된 모든 인화물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담당이 원래 자료와 새로 찾은 자료의 관계를 맞춰 보관하기로 했다. 이준은 반가운 소식을 읽고도 지워진 얼굴이 다 돌아왔다는 문장을 쓰지 않았다. 찾아낸 만큼의 실제 사진이 있었다.
집에 도착해 가방을 열자 깨끗한 장갑 한 짝이 나왔다. 짝은 원래 서랍에 있었다. 그는 둘을 나란히 놓았다가 오늘 그린 한 짝만 책상 위에 뒀다. 내일부터 자기 실제 작업에 쓸 장갑과 취미의 모델로 남길 장갑을 꼭 다른 물건으로 나눠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었다. 지금은 손이 젖지 않게 두는 실제 용도를 잊지만 않으면 됐다.
늦은 저녁을 먹은 뒤에는 문 그림 옆에 장갑 그림을 놓았다. 같은 빈 곳이라고 부를 수 있어도 문은 사람 한 명이 들어갈 크기였고 장갑은 손 하나가 들어갈 크기였다. 종이에서는 그 크기가 뒤바뀌었다. 이준은 장갑을 크게 그린 이유를 처음 알았다. 맨날 자기 손 안에 접혀 있던 물건을 오늘은 자기 눈보다 크게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는 그 감상을 그림 뒤에 짧게 썼다. 누군가에게 보내지 않고 자기 문장으로 남겼다. 문 그림을 처음 그렸을 때는 바깥에만 붙은 손잡이를 고쳐야 할 것 같았는데, 지금은 뒤에 한 줄을 더해도 앞의 선을 바꾸지 않을 수 있었다. 잘못된 안내를 그대로 두는 것과는 달랐다. 이 종이는 건물의 실제 출구가 아니라 자기 방의 탁자 위에 놓일 그림이었다.
그림 모임의 다음 안내에는 날이 괜찮으면 건물 밖의 물건을 그려 보겠다는 제안이 있었다. 장소와 시간은 다음에 정한다고 했다. 이준은 곧바로 생활관 점검표를 열지 않았다. 야외의 어떤 물건을 보고 싶은지 먼저 생각했다. 버스 정류장의 빈 의자와 세탁소 앞의 낮은 화분이 떠올랐다. 그 어느 것도 오늘 그가 고쳐야 한다는 요청은 아니었다.
효선에게는 다음에 가면 가게 앞 의자를 잠깐 그려도 되느냐고 직접 물을 생각이었다. 아직 묻지 않았으므로 그림의 장소를 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준은 빈 종이 한 장을 가방에 넣었다. 이번에는 이미 그린 문을 보여 줄지 망설이는 봉투가 아니라, 아직 보지 않은 것을 만나기 위한 종이였다. 무엇이 담길지는 실제 거기 앉아 봐야 알 일이었다.
밤에 미서는 새 접수가 없다고 확인했다. 이준은 오늘 사용 영 건과 미상환 영 건을 맞췄다. 숫자가 적다고 이틀의 밤이 서로 같은 밤은 아니었다. 전날에는 젖은 사진을 덧그리지 않는 답을 골랐고 오늘은 빈 장갑 안쪽을 그렸다. 그는 불을 끄기 전에 연필을 가방 옆에 뒀다. 다음에 사람의 발을 위해 일할 때와 자기 눈을 위해 앉을 때, 같은 손으로도 다른 것을 고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