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라는 말부터 지워요.”
윤단이 말했다. 고효선은 작업표 위에 손을 얹었다. 강이준이라는 이름을 가린 손등에는 작은 화상 자국이 있었다.
“나한테 따질 일이 아니야. 나도 저 글자가 바뀐 건 처음 봐.”
종이는 손 아래에서도 바싹 마른 소리를 냈다.
이준은 벽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여섯 시였다. 흰 선은 보였지만 금이나 글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야간 시야는 정말 정해진 시간에만 열리는 모양이었다.
“이 종이, 언제부터 가지고 계셨어요?”
“오빠가 사라진 다음 날. 작업복 주머니에 있었어. 옷만 돌아왔거든.”
효선은 상자 아래에서 접은 작업복을 꺼냈다. 낡은 회색 옷이었다. 왼쪽 팔꿈치에 파란 실로 기운 자국이 있었다.
“다들 그랬어. 그 나이에 다른 데 일하러 갔겠지, 연락하기 싫은 사정이 있겠지. 그런데 저 옷을 두고 갔을 리 없어.”
이준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효선이 먼저 말을 이었다.
“주머니 하나를 내가 안쪽에 더 달아 줬거든. 약 넣는 자리. 오빠는 약을 두고 밖에서 못 자.”
태오가 서류를 확인했다. 당시 인계 기록에는 자진 이탈이 아니라 교대 미종료라고 적혀 있었다. 같은 행을 누군가는 떠난 사람의 기록으로 읽었고, 누군가는 돌아오지 않은 사람의 기록으로 읽었다.
윤단은 효선에게 작업표를 빌려도 되는지 물었다. 원본 수령증을 적고, 사진과 복사본을 남겼다. 효선은 수령증보다 이준을 오래 봤다.
“교대하라는 말 들으면, 바로 대답하지 마.”
“그럴 생각 없습니다.”
“나도 오빠한테 그 말 했어.”
이준은 자신 있게 덧붙이려던 말을 삼켰다.
밤 열한 시까지 다섯 시간이 남았다. 윤단은 그중 세 시간을 이준의 휴식 시간으로 잡았다. 태오가 옛 별관 평면도를 찾는 동안 그는 센터 휴게실에 누웠다.
잠은 짧게 끊겼다. 그래도 일어나 앉았을 때 아침보다는 손에 힘이 돌아왔다. 흰 선 옆에 흐릿하게 떠 있던 사십이라는 숫자는 사라져 있었다.
그것이 채무 상환 표시인지는 확인이 필요했다.
이준은 수첩에 물음표를 남겼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적어 두면 언젠가 그 줄에 발이 걸릴 것 같았다.
휴게실 문 밖에서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이준은 눕기 전에 받은 사진을 다시 꺼냈다. 효선이 맡기면서 한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사진이 증거가 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사람이 기다린다는 표시는 된다고 했다.
그는 사진 속 선재의 손을 봤다. 엄지 관절이 크게 굽어 있었다. 오래 공구를 쥔 사람에게서 흔히 보이는 모양이었다. 정체 모를 세계에 갇힌 수리자라는 말보다 그 손이 먼저 이해됐다.
윤단이 문을 열고 들어와 물 한 병을 놓았다.
“구조는 신고한 상태야. 다만 위치가 확인돼야 실제 지원을 붙일 수 있어. 지금 우리가 하는 건 확인이야.”
“거기서 기다리라는 소리 듣고 돌아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둘이 가는 거야.”
반장은 접이식 의자에 잠깐 앉았다. 안전모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모습이 이상하게 평범했다. 모르는 문으로 들어가도 이 사람은 그 문에 대피 동선을 그릴 것 같았다.
“효선 씨한테는 뭐라고 했어요?”
“찾은 게 있는 만큼만 말하겠다고.”
“꼭 데려오겠다는 말은요?”
“못 지킬 수 있는 약속은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준은 사진을 파일에 넣었다. 그 말이 서운해서가 아니라, 서운하지 않다는 게 낯설어서 잠깐 말을 고르지 못했다.
그는 지난 밤 점검표에서 개인 시각 이상이라는 줄을 봤다. 오늘도 그 아래에 모르는 것을 적을 자리가 필요했다. 빈칸이 남아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안심이 됐다.
열 시 반, 태오가 도면을 펼쳤다.
“0층은 없어요. 그런데 지하와 일층 사이에 설비 통로가 있어요. 옛날 도면에만 나옵니다.”
별관은 언덕에 지어졌다. 뒤편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앞쪽 기준으로는 반 층 아래에 있었다. 이상한 공간에도 실제 벽과 문은 있었다.
윤단이 통로의 출입 허가와 현장 안전 확인을 잡았다. 밤의 명단을 설명할 수는 없어도, 오래된 설비 점검이라는 실제 이유는 있었다. 태오는 입구 밖에서 통신과 기록을 맡기로 했다.
“내가 안 보이면 바로 부르세요.”
이준이 말했다.
윤단은 안전모 끈을 조였다.
“네가 안 보이는 데를 내가 따라갈지는 보고 정해.”
열한 시가 되자 세탁소의 작업표에 노란 선이 생겼다. 표의 접수번호에서 이준의 손목까지 가느다란 빛이 이어졌다.
이번엔 다른 글자도 보였다.
[미종료 작업의 열람 권한.]
[인계 의무 없음.]
이준이 그 문구를 읽어 줬다. 윤단은 휴대폰 녹음에 같은 말을 남겼다. 종이와 표식, 둘 다 가져온 이유가 생겼다.
설비 통로 끝에는 잠긴 문이 있었다. 문 옆 작은 압력계 바늘이 흔들리고 있었다. 담당 시설원이 낮에 사용 중지 조치를 해 둔 곳이었다.
이준의 눈에는 문틀을 감싼 노란 금이 보였다.
그는 손대지 않고 먼저 뒤로 물러났다. 어젯밤 한 번 됐다고 오늘도 맨손부터 들이밀면 안 됐다.
“바람이 안쪽으로 가요.”
윤단이 가볍게 접은 종이를 문틈에 댔다. 종이가 문 안쪽으로 당겨졌다. 통로 환기 장치와 현관 개폐를 점검하던 담당자가 덕트 쪽 댐퍼 고장을 확인했다.
이준은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작업표의 글자가 흐려졌다. 고선재라는 이름의 마지막 획이 종이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것 같았다.
그는 손을 꽉 쥐었다. 서두르고 싶은 마음이 실제 안전 확인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담당자가 정비와 환기 확인을 마친 뒤에야 윤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서가 말한 순서 그대로였다. 실제 원인, 실제 조치, 그다음 이음.
이준은 장갑을 벗고 문틀에 손을 댔다.
[대가: 다음 수면 40분.]
그는 윤단에게 조건을 읽어 줬다.
“이 건은 제가 선택합니다.”
선이 손바닥 안에서 당겨졌다. 두 번째라 쉬울 줄 알았다. 오히려 어디가 아플지 알고 있어서 겁이 났다. 그는 이를 악물지 않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문틀의 빛이 줄어들었다.
금속 문이 열리자 저편에 형광등 창구가 나타났다. 미서가 이번에는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분이군요.”
윤단은 복도를 보더니 이준을 돌아봤다. 농담을 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장의 눈에도 창구가 보이는 것 같았다.
미서가 문 위의 표시를 확인했다.
“등록 표식의 임시 진입 경로가 열렸습니다. 동행자는 경로가 유지되는 동안만 체류 가능합니다.”
“먼저 출구 조건부터요.”
이준이 말했다.
“같은 문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다섯 시 전에. 통신은 통로에 따라 불안정할 수 있습니다.”
윤단이 문턱에 서서 태오에게 위치와 시각을 전했다. 밖에서 태오가 대답했다. 아직은 또렷했다.
미서는 작업표를 받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이걸 어디서.”
“찾는 사람이 갖고 있었어요.”
이준은 대체 작업자 항목을 가리켰다.
“이거 공식입니까?”
미서가 장부를 펼쳤다. 종이를 넘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손끝이 한 번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이런 인계 조건은 없습니다. 본인 채무를 타인에게 넘길 수 없으니까요.”
“그럼 가짜예요?”
“문서 표식은 진본입니다. 내용은 등록 장부와 다릅니다.”
윤단이 짧게 물었다.
“누가 내용을 바꿀 수 있죠?”
미서는 대답 대신 장부를 돌렸다. 고선재의 행에 작은 붉은 네모가 찍혀 있었다.
중앙 연결구. 관리 권한으로 잠금.
그 아래로 수리 완료 기록이 이어졌다. 오늘 새벽. 어제 새벽. 그제 새벽. 선재의 작업은 계속 기록되고 있었다.
“위치 확인 안 됐다면서요.”
이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미서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볼 수 있는 일반 장부에는 없었습니다. 오늘 가져오신 원본으로 잠금 항목이 열렸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했어야죠. 없다고 말하면 찾는 사람은 어디로 갑니까.”
미서는 변명하지 않았다. 장부 귀퉁이에 정정 사유를 적었다. 이준은 그 손을 보고서야 더 말하려던 것을 멈췄다. 화를 내는 동안에도 찾아야 할 사람은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 연결구로 가는 길은 창구 뒤의 문이었다. 미서는 문을 열 권한이 있으나 잠금 내부를 조작할 권한은 없다고 말했다. 윤단은 그 차이를 두 번 확인했다.
“들어갈 수 있고, 고칠 수는 없다는 거죠.”
“네.”
“우린 위치 확인부터 합니다. 사람을 보더라도 장비나 통로 확인 없이 끌어내지 않습니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 뒤에는 좁은 계단이 있었다. 내려갈수록 도시의 소리가 들렸다. 차가 도로 이음매를 밟는 소리, 엘리베이터 모터, 환풍기 진동. 서로 다른 소리가 한곳에서 웅웅거렸다.
벽에는 작은 작업표들이 꽂혀 있었다. 이름 대신 접수번호가 적힌 것도 있었다. 이준은 손전등으로 비추다가, 한 종이에 익숙한 글자를 발견했다.
동하 지하차도.
어젯밤 자신의 접수였다.
그 옆에는 어린이집 보일러, 노인정 승강기, 새벽 배송장 조명이라는 이름들이 달려 있었다. 평범한 아침을 위해 누군가 밤마다 확인해야 할 것들이었다.
계단 아래에서 기침이 났다.
“누구세요?”
이준이 불렀다.
기침이 멎었다. 잠시 뒤 느린 목소리가 올라왔다.
“새 부품 왔나.”
윤단이 먼저 손전등을 낮췄다. 빛에 눈이 부시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난간 안쪽, 배관이 모이는 자리에서 늙은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회색 작업복의 왼쪽 팔꿈치가 헤져 있었다.
파란 실이 몇 가닥 남아 있었다.
“고선재 씨입니까?”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어?”
이준은 안주머니에서 효선이 맡긴 작은 사진을 꺼냈다. 세탁소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지금보다 젊은 남자가 효선 옆에서 눈을 감고 웃고 있었다.
선재는 사진을 보자 한 걸음 나왔다.
바닥에서 금속 끌리는 소리가 났다.
이준은 그제야 남자의 발목을 봤다. 쇠사슬은 없었다. 수십 장의 종이가 가느다란 노란 선에 꿰여 있었다. 그 선들이 배관 아래로 들어갔다.
작업표 가장자리마다 사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준이 움직이려 하자 윤단이 팔을 잡았다.
“바닥부터 봐.”
두 사람과 선재 사이의 바닥에 긴 금이 벌어져 있었다. 이번엔 실제 균열도 보였다. 오래된 점검 덮개가 한쪽 지지대를 잃고 기울어 있었다.
이준은 미서에게 물었다.
“저분한테 연결된 건 뭡니까?”
미서가 종이 하나를 보려다가 손을 거뒀다.
“이건 수리자 정산이 아닙니다. 시민 채무 장부예요.”
선재가 고개를 저었다.
“설명은 나가서 해. 그 문 오래 못 버텨.”
그가 들어온 쪽을 가리켰다. 이준이 돌아보자 계단 위 문의 사각형이 조금씩 좁아지고 있었다. 태오의 목소리도 끊겼다 이어졌다.
아직 열두 시도 안 됐는데.
이준은 손목을 봤다. 첫 번째 봉합의 대가 사십이 희게 떠 있었다. 아직 한 번 더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에게 붙은 것을 잘못 건드리면 무엇이 끊어질지 몰랐다.
그때 선재가 낮고 또렷하게 말했다.
“나부터 꺼내려고 하지 마.”
이준이 사진을 쥔 손을 내렸다.
“출구부터 고쳐. 여기선 들어오는 사람 수만 세고, 나가는 사람은 안 세거든.”
벽에 꽂혀 있던 작업표들이 동시에 뒤집혔다.
맨 위 종이에 새로운 숫자가 찍혔다.
현재 미귀환 작업자: 3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