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한 시 정각, 지하차도 벽에 금이 갔다.
강이준은 처음에 헤드라이트가 비친 줄 알았다. 노란 선이 타일을 타고 흘렀다.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선 끝이 조금씩 벌어졌다.
이준이 장갑 낀 손을 뻗었다. 벽은 멀쩡했다.
그런데 손끝 바로 위에 글자가 떠 있었다.
[예상 이탈까지 11분.]
“반장님.”
무전기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왜. 펌프 쪽 도착했어?”
“벽에 숫자가 보여요.”
“혈압부터 재.”
윤단의 대답은 빨랐다. 이준은 웃지 못했다. 숫자가 10분 59초로 바뀌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물 고임 민원 하나였다. 비는 두 시간 전에 그쳤고, 도로 가장자리에 발목 높이의 물이 남아 있었다. 야간 근무표에는 청소와 배수 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벽이 무너진다는 말은 없었다.
이준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화면에는 더러운 흰 타일만 나왔다. 눈을 돌리자 노란 금이 다시 보였다.
야근을 너무 했다.
그럴듯한 결론이었다. 오늘 점심도 차 안에서 먹었다. 연장 수당은 다음 달에 나온다고 했고, 집의 전등은 사흘째 깜빡였다. 자기 방 고장도 못 고치는 사람이 남의 도시를 고치고 있었다.
그는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예상 이탈까지 10분 31초.]
이번에는 금 아래에 작은 화살표가 생겼다. 배수 펌프 점검문을 가리켰다.
이준은 문에 귀를 댔다. 모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안쪽에서 뭔가 얇게 부딪쳤다. 딱. 딱. 물 위에 떠 있는 것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반장님, 현장 재확인 필요해요. 펌프실 소리 이상합니다.”
“그건 됐고, 확인한 거 말해.”
그는 손전등을 낮췄다. 문틈으로 새는 물이 도로 쪽이 아니라 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배수 방향과 반대였다.
“역류 흔적 있고요. 모터 작동음 없습니다. 도로 물은 계속 올라옵니다.”
“출입하지 마. 전기 담당 부를게. 일단 차부터 빼.”
숫자를 믿어 달라는 말은 필요 없었다. 눈앞의 물은 누구에게나 보였다.
이준은 차량 통제 요청을 넣고 차로 시작점으로 뛰었다. 물이 작업화 발등을 쳤다. 지하차도 입구의 전광판은 정상 통행이라는 글자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때 마지막 시내버스가 내리막으로 들어왔다.
이준이 경광봉을 크게 흔들었다. 기사가 속도를 줄였다. 차창이 열리자 짜증보다 먼저 지친 목소리가 나왔다.
“왜요? 위에는 그냥 가라던데.”
“통제 요청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정차 부탁드려요.”
버스가 멈췄다. 뒤의 승용차가 경적을 울렸다. 이준은 사과 대신 경광봉을 다시 들었다.
뒤편에서 철판 긁히는 소리가 났다.
버스 앞바퀴 옆 배수구 덮개가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노란 금이 벽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덮개 아래까지 이어졌다.
[예상 이탈까지 8분 02초.]
이준의 입안이 말랐다.
“기사님, 시동 유지하시고 승객부터 내려 주세요. 위쪽 보도로 이동합니다.”
“여기서 내리라고요?”
“네. 제가 앞에 설게요.”
차 문이 열렸다. 누군가 휴대폰을 들고 찍었다. 누군가는 내일 항의하겠다고 했다. 이준은 한 사람씩 발 디딜 자리를 비춰 줬다. 마지막으로 내려온 노인은 접이식 장바구니를 끌고 있었다.
“이거 바퀴가 자꾸 걸리네.”
“제가 들겠습니다.”
장바구니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무와 양파 사이로 약 봉투가 보였다. 아무 일도 아닌 저녁들이 버스 안에 가득 타고 있었던 셈이었다.
계단 위에서 윤단이 달려왔다. 반장은 사람 수부터 셌다.
“기사 포함 열넷. 맞죠?”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은 그제야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너도 나와.”
“저 덮개 아래로 선이 들어가요.”
“무슨 선.”
윤단이 그의 시선을 따라 바닥을 봤다. 아무것도 못 본 얼굴이었다.
이준은 대답을 바꿨다.
“덮개 받침이 내려앉았어요. 지금 버스 움직이면 바퀴가 빠질 수 있습니다.”
윤단이 기사를 붙잡았다. 후진은 통제 차량이 온 뒤 유도하기로 했다. 그사이 도로 아래에서 둔탁한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물 위에 작은 거품이 솟았다.
반장은 무전으로 배수 담당의 도착 위치를 물었다. 이준은 점검문 손잡이 옆의 낡은 스티커를 봤다. 지난달 교체 예정. 그 위에 검은 펜으로 보류라고 적혀 있었다.
펜 자국 사이에서 노란 빛이 흘렀다.
[접수 원인: 연결 해제.]
[임시 봉합 조건: 실제 원인 확인.]
이번에는 문장이었다.
이준이 뒷걸음질 쳤다. 무릎이 버스 범퍼에 닿았다. 피로라면 이렇게 친절할 이유가 없었다.
“여기 누가 있어요?”
대답은 없었다. 벽 위의 숫자만 줄었다.
윤단이 돌아봤다.
“누구랑 얘기해?”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나랑 해. 지금 뭘 봤어?”
이준은 스티커를 가리켰다. 윤단이 사진을 찍어 센터에 보냈다. 잠깐 뒤 기록 담당 임태오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렸다.
“그 교체 건, 완료 처리돼 있는데요.”
“보류라고 써 있어.”
“잠깐만요. 원본 보고 올게요.”
기다리는 몇 초가 길었다. 물은 종아리까지 찼다. 전광판이 뒤늦게 진입 금지로 바뀌었다. 입구가 막히자 지하차도가 갑자기 텅 빈 방처럼 조용해졌다.
이준은 태오가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들었다.
“완료가 아니에요. 연결부 부품 미도착. 다음 교대 인계. 그런데 다음 교대 이름이 비어 있어요.”
윤단의 턱이 굳었다.
“접수번호 보내.”
그때 전문 장비를 실은 배수 차량이 도착했다. 윤단은 이준을 끌어내 통제선 바깥에 세웠다. 담당자들이 안전 확인을 마친 뒤 펌프실에 들어갔다. 이준은 문이 열리는 순간 틈 너머를 보았다.
금속 연결부 하나가 풀린 채 매달려 있었다.
노란 선이 거기서 끊어져 있었다.
교체할 부품이 없어서 임시 고정을 해 둔 자리였다. 고정은 수명이 다했고, 인계는 서류 속 빈칸에서 끝났다.
사람 하나가 게을러서 생긴 고장이 아니었다. 서로가 다음 사람이 하겠다고 믿은 자리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담당자가 연결부를 점검하는 사이 윤단은 버스를 후진시켰다. 바퀴가 기운 덮개를 벗어났다. 덮개가 곧장 아래로 떨어졌다.
커다란 물소리가 울렸다.
이준은 귀를 막았다. 누가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 박자 늦게 들어왔다.
그런데 숫자는 멈추지 않았다.
[예상 이탈까지 2분 14초.]
물리적인 임시 조치는 끝나 가는데 벽의 금은 더 넓어졌다. 그는 손전등을 움켜쥐었다. 원인 확인. 연결. 다음 교대.
그 말들이 머릿속에서 한 줄로 이어졌다.
“반장님. 완료 말고 임시 조치로 남겨 주세요.”
“그럴 거야.”
“다음 확인 담당도 지금 정하고요.”
윤단이 그를 보았다. 이번에는 이상한 소리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내 이름 넣어. 아침 조에 직접 넘길게.”
노란 금의 가장자리가 조금 좁아졌다.
이준은 통제선 안쪽, 전기와 물의 위험이 확인되어 해제된 벽 앞으로 갔다. 윤단이 손목을 잡았다.
“뭘 하려고.”
그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수리라기엔 나사가 없었다. 기도라기엔 바랄 대상도 없었다.
다만 손목 안쪽이 뜨거웠다.
“딱 한 번 확인해 볼게요. 위험한 데 안 들어갑니다.”
윤단은 벽면을 확인한 뒤 손을 놓았다. 대신 그의 바로 옆에 섰다.
이준은 젖은 장갑을 벗었다. 노란 선 양쪽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차가운 타일 사이에서 실 같은 것이 잡혔다. 실제로 움켜쥔 것은 없는데 손가락은 거친 밧줄을 당기는 것처럼 아팠다.
[대가: 다음 수면 40분.]
[수락하시겠습니까?]
“잠을요?”
윤단이 눈썹을 올렸다.
“지금 자고 싶다고?”
“아뇨. 그건 원래 그렇고요.”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처음 보는 현상에 자신을 맡기는 건 어리석었다. 그럼에도 손바닥 너머의 진동은, 놓으면 아직 끝나지 않은 고장이 다시 벌어진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준은 숫자를 봤다. 41초.
“이번 한 건만.”
노란 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는 두 손을 모았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물 냄새가 뚝 끊겼다. 벽의 선이 가느다란 점선이 됐다가 사라졌다.
동시에 온몸의 힘이 빠졌다.
윤단이 어깨를 받쳤다. 그가 타일에 기대 주저앉는 동안 펌프가 낮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이 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뭐야. 어디 다쳤어?”
“졸려요.”
“혈압 재랬지.”
이준은 웃으려다 실패했다. 손목에 흰 선 하나가 생겼다. 손톱으로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센터로 돌아가기 전, 윤단은 현장 사진을 한 장씩 다시 찍었다. 이준이 누른 벽에는 손바닥 자국만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중에 말 바꾸지 않게 적어.”
반장이 빈 점검표를 내밀었다. 이준은 볼펜을 받았다. 노란 선이 보였다고 쓰자니 손이 멈췄다. 본 것과 확인한 것을 어떻게 나눠야 할지 몰랐다.
윤단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첫 칸에 배수 역류, 둘째 칸에 연결부 이탈, 셋째 칸에 인계 담당 누락이라고 적었다. 마지막 빈칸에는 잠깐 망설인 뒤 글자 여덟 개를 더했다.
개인 시각 이상 발생.
“그건 별도 확인. 오늘 운전 금지.”
윤단은 웃지 않았다. 덕분에 이준도 자신을 억지로 웃길 필요가 없었다.
태오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원본 접수표의 다음 교대 칸 아래에 작은 도장이 하나 찍혀 있다고 했다.
“처음 보는 도장이에요. 반납이라는 글자 같은데.”
“어디로 반납했다는 건데?”
“그게 없어요. 문서에 받는 곳이 없어요.”
윤단이 그 종이도 보관해 두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뒤 반장은 보류 스티커가 붙은 문을 오래 바라봤다.
“내일 아침에 물만 빠졌다고 완료 누르면 또 똑같아져.”
이준은 점검표의 임시 조치 옆에 네모를 그렸다. 다음 확인 시간도 적었다. 조금 전 벽에서 사라진 선을 종이 위에 다시 이어 놓는 기분이었다.
그의 손목이 한 차례 더 욱신거렸다. 흰 선 아래로 아주 작은 숫자가 나타났다가 흐려졌다. 사십. 그가 팔을 내리자 윤단이 캔을 가져다 댔다.
“차가운 거면 좀 낫나?”
“이거 따뜻한 건데요.”
“그럼 따뜻해서 낫겠지.”
이준은 이번에는 제대로 웃었다.
두 시가 조금 넘어 현장이 정리됐다. 윤단은 이준을 운전석에서 쫓아냈고, 센터까지 직접 차를 몰았다. 그는 조수석에서 눈을 감을 때마다 방금 내린 승객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장바구니를 놓고 돌아온 노인이 따뜻한 캔 하나를 주고 갔다. 마시려다 보니 바닥에 작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종이는 젖지 않았다.
[야간 정산소. 구청 별관. 0층.]
뒷면에는 오늘 날짜와 접수번호가 있었다. 방금 태오가 읽어 준 번호였다.
이준이 종이를 뒤집었다. 아래쪽에 이름 일곱 개가 인쇄돼 있었다. 여섯은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마지막은 자기 이름이었다.
강이준.
그 옆에는 출근 시각도 퇴근 시각도 없었다.
딱 한 줄이 있었다.
교대 종료 예정: 오늘 05:00.
이준은 앞유리 너머의 시계를 봤다. 02:17.
“반장님.”
“이번엔 또 뭐.”
“제가 오늘 다섯 시에 뭘 끝내기로 했는지 아세요?”
윤단이 그쪽을 돌아봤다.
“오늘 넌 다섯 시까지 자라고 했는데.”
종이의 끝이 저절로 접혔다.
접힌 안쪽에서 다른 글자가 드러났다.
이전 작업자 미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