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에 붙인 수리비 표 아래로 비가 들이쳤다.
조일은 종이를 떼다가 멈췄다. 맨 아래 외상 항목이 젖어 번져 있었다. 수현은 새 표를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다. 먼저 문 안쪽으로 옮겨 말리게 했다.
종이에 적은 값이 지워져도 숯장수에게 갚을 돈은 남았다. 어제 끓인 무국도 아침까지 먹고 나니 솥바닥만 보였다.
수현은 작은 돈함을 열었다. 윤초의 선금 잔액은 별도 보자기에 묶여 있었다. 새 끈을 사는 데조차 그 돈을 먼저 쓸 수는 없었다. 감정 의뢰의 돈이지 가게를 버티게 할 돈이 아니었다.
“닷새.”
조일이 말했다.
수현이 고개를 들자 견습은 손가락을 접었다. 남은 쌀, 숯, 약값과 빌린 문지기 품삯. 오늘부터 아무 일도 못 받으면 닷새였다. 손 상처가 아문다고 해서 손님이 같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내 품삯은 빼고 센 거야?”
“네. 제가 여기서 밥 먹으니까.”
수현은 돈함을 닫았다.
“다시 세자.”
조일의 얼굴이 굳었다. 수현은 견습의 품삯을 먼저 적었다. 같이 밥 먹는다고 노동까지 공짜가 되면, 상단이 자기한테 하던 말과 다를 게 없었다.
숫자는 닷새에서 사흘로 줄었다.
둘은 잠깐 그 사흘을 보았다. 조일은 무섭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빈 수리걸이 가운데 하나를 빼서 창가에 옮겼다. 물건이 줄어든 자리를 보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수현은 창가 의자에 앉아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적었다. 칼날 열처리와 강한 망치질은 못 했다. 손바닥에 힘을 싣는 모든 일이 빠졌다. 남은 목록은 자루 균형 확인, 부품 맞춤 관찰, 기록 대조와 사용 중지 판단이었다.
조일이 어깨 너머로 봤다.
“이거 전부 그동안 공짜로 해 주던 거네요.”
“그러네.”
“그래서 손님들이 고치지 말라 하면 그냥 갔나 봐요.”
수현은 오래전 손님 하나를 떠올렸다. 깨진 갈고리를 들고 와 덧붙여 달라고 했다가, 그물 당기는 데 쓰면 위험하다는 설명을 듣고 돌아간 어부였다. 수현은 그날 아무 일도 못 했다고 장부에 빈칸을 남겼다.
갈고리가 왜 깨졌는지 보고, 어디에 쓰는지 듣고, 못 쓸 것을 가려 돌려보냈다. 그 시간에도 화로는 식고 밥은 줄었다. 그러나 물건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기 일도 없었다고 여겼다.
문밖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곽두가 작은 나무 바퀴를 들고 서 있었다. 나루에서 쓰는 도르래였다. 바퀴 가장자리에 금이 갔고 축을 물린 쇠테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수리 맡기는 거라면 다른 공방을 알려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온 거요. 고쳐도 될 물건인지 봐 달라고.”
수현은 곽두의 얼굴을 보았다. 나루 책임자는 젖은 겉옷을 털지 않고 문밖에 벗어 걸었다. 제 가게처럼 들어와 위로할 생각은 없는 얼굴이었다.
“배를 짜는 목수에게 먼저 보여야 하지 않습니까?”
“목수가 저 금은 안다고 했소. 쇠테가 왜 틀어졌는지 모르겠다고 해서. 둘 다 보고 안 되면 새로 사야지.”
수현은 바퀴를 받지 않고 마른 작업대 위에 놓아 달라고 했다. 무거운 것을 쥐지 못해도 눈을 가까이 댈 수는 있었다.
마모된 축 구멍 한쪽만 검었다. 윤활 기름 때문인지, 쇠가 쓸린 가루 때문인지 먼저 닦아 볼 수 있는 물건인지 물었다. 사건 증거가 아닌 운용 장비였고 곽두가 현재 소유와 사용 경위를 설명했다.
수현은 기록을 남긴 다음 조일에게 바깥 먼지만 걷게 했다. 금 안쪽을 긁거나 뜨겁게 달구지는 않았다. 손상 원인을 모를 때 어디까지 만질지 정하는 버릇은 평범한 도르래에도 필요했다.
축을 직접 돌리는 일은 곽두가 했다. 조일이 반대쪽에서 나무 조각으로 높이를 맞췄다. 수현은 기울어진 쪽의 틈을 자로 보고 축의 휨을 살폈다.
“쇠테만 다시 박으면 바퀴는 버팁니까?” 곽두가 물었다.
“그건 목수가 답해야 합니다. 저는 축이 한쪽으로 끌린 흔적이 있다는 것까지만 말씀드립니다.”
수현은 나루에서 본 저울 기둥을 떠올렸다. 무게가 올라갈 때마다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 도르래도 짐이 내려가는 쪽에서만 오래 눌렸을 수 있었다.
그는 그 가능성을 종이에 그렸다. 옆에는 축을 바꿔도 받침이 틀어져 있으면 같은 일이 되풀이될 수 있다고 적었다. 받침을 실제 보지 않았으므로 확정하지는 않았다.
곽두는 그림을 받아 천천히 살폈다.
“이걸로 나루 목수와 다시 말할 수 있겠네. 수리할 것은 바퀴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얼마요?”
수현은 입을 열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망치 한 번 값부터 떠올랐다. 망치질을 안 했으니 값이 없는 셈이었다. 창가에서 조일이 새 종이를 들고 있었다. 오늘 가능한 일의 목록이었다.
수현은 살펴본 시간과 기록을 쓴 값을 말했다. 자기 입으로 말하고 나서도 높게 부른 기분이 들었다.
곽두는 값을 깎지 않았다. 대신 그 돈으로 받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물었다. 수현은 사용해도 된다는 보증이 아니라, 본 흔적과 확인할 지점을 적은 의견이라고 설명했다. 결과를 더 알고 싶으면 받침을 보러 가는 비용은 별도였다.
“안전을 사고 싶은 사람은 싫어하겠군.”
“제가 팔 수 없는 겁니다.”
곽두는 동전을 셌다. 조일은 영수증에 수리 완료라고 쓰려다가 멈췄다. 새 항목을 만들었다. 장비 상태 확인과 의견 기록.
동전 소리가 돈함 안에서 났다. 적은 돈이었다. 하지만 선금 보자기를 풀지 않고 들어온 돈이었다.
곽두가 돌아간 뒤 수현은 새 표를 쓰기 시작했다. 상처 때문에 큰 글씨는 조일이 맡았다. 수리비와 검사비를 따로 적되 손님이 같은 일을 두 번 계산당하지 않게 했다. 검사 뒤 수리로 이어지면 이미 확인한 부분의 품삯은 다시 받지 않기로 했다.
“고칠 수 없다고 해도 돈 내야 하냐고 할 텐데요.”
“보기 전에 설명해야지.”
“보고 나서 안 내면요?”
“그래서 짧게 볼 범위와 자세히 볼 범위를 먼저 정하자.”
둘은 값만 쓰지 않았다. 의뢰인이 듣게 될 질문, 견적을 넘길 때 다시 허락받는 일, 물건을 어디까지 만질지도 작은 글씨로 적었다. 조일은 너무 길면 손님이 쌀 한 되 사 오는 동안 다 못 읽겠다고 했다.
수현은 종이를 반으로 나눴다. 문에는 짧은 안내만 붙이고, 세부 조건은 작업대에서 읽어 주기로 했다. 글을 모르는 손님에게도 같은 말을 해야 했다.
서린이 오후에 왔다. 새 표를 읽고 바로 허락한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합의회 공식 감정 자격과 개인 기술 의견을 구분해 쓰십시오.”
수현은 독립 검사라는 글자 아래 개인 수리공의 관찰 의견이라고 덧붙였다. 사건 물건과 이해관계가 있는 감정은 별도 입회가 필요하다는 줄도 넣었다. 자기 이름이 올라간 검사표를 자기가 깨끗하게 만들겠다고 돈 받을 생각은 없었다.
서린은 오늘도 상단 자료가 오지 않았다고 알렸다. 대행 인계료의 근거 요청은 남아 있었다. 수현은 모루 밑 쇠자가 스승 유품이라는 점과, 언제 어떤 경위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른다는 점을 나눠 진술했다.
진술을 마치자 문 앞에서 손님이 둘이나 돌아섰다. 새 표를 보고 고치지 않는 데 돈 내는 집이 됐냐며 웃는 소리가 났다. 수현은 밖으로 나가 붙잡지 않았다. 조일은 붓끝을 너무 세게 눌러 털이 벌어졌다.
“바로 잘되진 않겠네.”
수현이 말했다.
“그건 돈함이 먼저 말해 줬어요.”
조일은 붓을 씻고 다시 모았다. 수현은 그동안 이웃 공방에 넘길 수리 목록을 정리했다. 고객이 동의한 물건만 보냈고, 운반값을 숨겨 수리비에 더하지 않았다. 협력한 공방에서 부품 기록을 정리해 주는 일은 따로 품삯을 받기로 협의했다.
그 일만으로 사흘이 한 달이 되지는 않았다. 오늘 번 돈, 내일 받을 약속, 아직 없는 일감을 다른 칸에 적었다. 조일은 약속받은 돈으로 쌀을 사는 셈은 하지 않았다.
표를 쓰고 남은 종이를 정리하다가 수현은 숙부가 쓰던 짧은 붓을 발견했다. 낡은 붓대 한쪽에는 이로 누른 자국이 있었다. 숙부는 계산이 안 맞으면 붓을 물고 천장만 봤다. 그때마다 수현은 손기술이 좋으면 셈은 나중에 해도 되는 줄 알았다.
그가 붓을 내려놓자 조일이 물었다.
“숙부님은 검사값을 따로 받았어요?”
“받으신 때도 있고, 다음 물건 맡기면 같이 받겠다고 한 때도 있어.”
“다음 물건은 왔어요?”
수현은 기억을 더듬었다. 물건이 왔던 것은 기억났다. 지난번 값까지 받았는지는 몰랐다. 빈칸 많은 장부를 스승의 너그러움으로만 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건 확인해야 해. 지금 아는 건 우리가 그렇게는 못 버틴다는 거고.”
조일은 사흘이라고 적은 종이를 뒤집지 않았다. 그 위에 오늘 들어온 동전을 더했다. 수현은 견습이 고른 큰 숫자를 보았다. 빚을 없애 주는 숫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오늘 둘이 한 일을 가려 버리지는 않았다.
부엌에서는 아침에 남겨 둔 쌀뜨물이 끓었다. 조일이 저녁은 죽으로 먹자고 했다. 둘은 내일 품삯을 오늘 써 버리지 않기 위해 묽은 밥을 골랐다. 수현은 물을 붓는 일이 이토록 구체적인 선택인 줄 처음 알았다.
저녁 가까이 작은 손님이 왔다. 시장에서 짐을 나르는 여자가 허리 높이의 운반틀을 끌고 왔다. 멀쩡해 보이는 연결 고리를 천으로 감아 놓았다.
“이거 고칠 필요 없으면 없다고 말해 줘요.”
수현은 먼저 얼마까지 살펴볼지 설명했다. 여자는 비용을 듣고 끄덕였다. 대단한 감정은 아니었다. 하중을 받지 않는 장식 고리와 실제 짐을 받는 고리를 구분하고, 흔들리는 부분을 보여 주는 일이었다.
고장 난 것은 금속이 아니라 짧아진 가죽끈이었다. 수현은 자기가 고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말하고 가죽 일하는 집을 알려 줬다. 여자는 의견 기록 한 장과 함께 운반틀을 가져갔다.
“내일 금속 고치러 또 오지 않아도 되네.”
그녀가 남긴 말에 수현은 오늘 처음으로 작업대를 오래 바라봤다. 물건을 망치지 않고 보내는 일도 일이라면, 이 가게가 지금부터 배울 것이 있었다.
문을 닫기 전 관아 연락소의 쪽지가 왔다. 윤초가 면담을 요청했다. 칠목표국 동료가 연락을 해 왔고, 검이 운반되기 전 누구 손에 있었는지 말할 사람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서린은 만남 장소와 조건을 관아에 확인하겠다고 했다. 윤초가 마음대로 나루를 돌아다니게 된 것은 아니었다. 수현은 내일 감정표를 챙길 물건 목록에 빈 종이 한 묶음을 더했다.
쪽지 아래에는 윤초가 직접 부탁했다는 문장 하나가 있었다.
‘내 말을 대신 믿어 달라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본 것을 따로 들어 줘.’
수현은 새 수리비 표를 안쪽으로 조금 더 당겼다. 빗물은 문턱까지만 닿았다. 오늘 생긴 두 줄의 수입이 아직 마르지 않은 먹빛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조일에게 말했다.
“내일은 검의 주인과, 검을 옮긴 사람부터 따로 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