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약속보다 먼저 와 있었다. 서린은 휴일 오전, 정한 실내 자리의 창 앞에서 우산 끝을 털었다. 바닥에 물이 번지지 않게 꽂아 두고 가방의 파일부터 확인했다. 종이는 젖지 않았다. 도운은 아직 오지 않았고 그녀는 창문을 등지는 자리에 앉았다. 오늘 보고 싶은 것이 그림인지 사람인지 하나만 고를 필요는 없었다.
도운은 조금 뒤 들어와 신발의 물기를 닦았다. 서린이 늦지 않았다고 하자 그는 자기 시계로도 그렇다고 답했다. 둘은 웃었다. 오래된 화면 시각을 서로의 도착에 대입하지 않았다. 도운은 접은 종이를 가방에서 꺼내지 않고 먼저 차를 주문했다. 그녀도 파일의 지퍼를 다시 닫았다. 앉자마자 과제를 시작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창밖의 사람들은 가림막 아래를 지나갔다. 같은 비인데도 우산을 접는 곳은 조금씩 달랐다. 서린은 한 사람이 젖은 손으로 가방을 열려다가 포기하는 것을 봤다. 자신도 파일이 없었다면 종이를 계속 움켜쥐고 있었을 것 같았다. 도운은 무엇을 보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우산을 접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그가 오늘은 일을 하지 않는 눈이냐고 했다.
그 말이 조금 걸렸다. 서린은 보는 습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지금 본 사람의 다음 동선을 맞힐 필요는 없었다. 도운은 자기도 지나가는 차의 후미등을 자꾸 본다고 답했다. 둘 다 직업을 문 앞에 완전히 벗어 두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만나는 시간까지 전부 업무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차가 오자 자기 컵을 먼저 보았다.
도운의 종이는 오래 접어 둔 자국이 있었다. 서린이 지금 봐도 되느냐고 묻자 그는 꺼내서 탁자에 놓았다. 그림에는 의자가 하나 있었다. 등받이가 유난히 높고 다리는 서로 길이가 달랐다. 그는 비슷하게 그리려다 자꾸 의자가 뒤로 넘어지는 모양이 됐다고 말했다. 서린은 실제 의자도 그런지 물었다. 그가 그랬으면 여기에 앉아 있지 못했을 거라고 답했다.
그녀는 웃으며 의자의 빈 자리를 봤다.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좌판의 한쪽이 조금 진했다. 그가 거기에 놓인 외투를 그리다가 지운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서린은 지운 자국을 손으로 문지르지 않고 눈으로 따라갔다. 도운은 외투까지 그리면 너무 복잡해 보여서 뺐다고 했다. 빈 의자가 처음부터 혼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린은 자기 그림을 꺼냈다. 접시의 빈 면 옆에 열쇠의 짧은 선이 놓였다. 그는 물건 이름을 맞히려는 사람처럼 바로 답하지 않았다. 잠깐 보고 접시가 조금 들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실제 접시는 탁자에 평평하게 놓였다고 답했다. 도운은 그럼 자기 눈이나 그녀 선의 문제겠다고 했다. 서린은 그림의 그림자가 부족한 탓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부분을 고쳐 주겠다고 손을 내밀지 않았다. 서린도 잘못된 선을 숨기지 않았다. 자기 눈에는 멀쩡했던 접시가 상대 앞에서는 살짝 떠 있었다. 그 말을 들으니 자기 눈에도 오른쪽 끝이 조금 높아 보였다. 그녀는 여기서 바로 고치면 그가 처음 본 모양이 사라질 것 같다고 말했다. 도운은 사진을 찍어 두라고 하지 않고 지금은 그냥 봐도 되지 않느냐고 답했다.
“잘 그렸다고 해 줄 줄 알았어요?”
그가 물었다. 서린은 그런 말도 듣고 싶었다고 솔직히 답했다. 도운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보이는지도 알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원하면 답하는 사람이 어려울 수 있었다. 그가 조금 들려 보여서 재미있다는 말은 할 수 있다고 했다. 서린은 그 답을 받았다. 칭찬의 모양을 미리 정해 둘 필요는 없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의자를 보았다. 다리가 짧은 쪽으로 자꾸 눈이 갔다. 그런데 그 때문에 의자에 가까이 가 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서린은 그 말을 그대로 했다. 도운은 넘어질지 확인하려고 가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어쩌면 앉으면 어떨지 궁금해서일 수도 있다고 답했다. 자기 직업의 결론보다 작은 호기심을 말하는 일이 오늘은 조금 쉬웠다.
차를 마시다 도운이 자기 의자는 처음부터 아는 물건이라 대충 봤다고 말했다. 몸을 기대던 높이를 손이 대신 그릴 줄 알았다는 설명이었다. 서린은 실제로 눈을 두고 보니 어땠느냐고 물었다. 그는 좌판이 생각보다 좁았고 등받이가 비스듬했다고 했다. 그림에서는 기억 속 편한 의자를 자꾸 곧게 세웠다. 그녀는 종이에 남은 비뚤어진 다리가 오히려 직접 본 흔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생각을 바로 정답처럼 말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그림에서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물었다. 도운은 다리를 전부 고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처음으로 오래 앉아 그린 종이라는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린은 자기 접시도 조금 떠 있는 채로 두겠다고 말했다. 둘은 그림의 오류를 사랑하자는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이 두 장을 여기서 더 손대지 않기로 골랐다.
비가 조금 굵어져 창의 바깥이 흐려졌다. 도운이 산책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서린은 처음부터 실내 자리도 정해 두어 다행이라고 했다. 그가 미안한 얼굴로 하늘을 보자 그녀는 비를 예약했느냐고 물었다. 도운은 취소가 안 된다고 답했다. 짧은 농담이 탁자 위를 지나갔다. 만남의 계획이 하나 바뀌어도 둘이 이곳에 온 사실은 남아 있었다.
서린은 그에게 오늘 그림 말고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물었다. 도운은 조금 더 같이 앉아 있고 싶다고 했다. 특별한 장소를 더 가야 할 줄 알았느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녀도 비슷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보고 싶어서 만난 사람 앞에서 계속 다음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둘은 차를 한 잔 더 시키고 종이를 파일에 넣었다.
그가 파일을 받아 들겠다고 하자 서린은 자기 가방에 들어간다고 답했다. 작은 물건을 들어주는 일이 거절당했다고 그의 손이 오래 떠 있지는 않았다. 도운은 알겠다고 하고 자기 의자 그림을 접었다. 그녀는 접힌 선이 그림 가운데를 지나가는 것을 봤다. 그가 이미 있던 접힌 자리라고 말했다. 서린은 그 선도 다리처럼 보인다고 했다. 종이 한 장이 여섯 다리 의자가 됐다.
도운은 웃다가 문득 자기 그림에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서린이 그리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사람을 그리면 그 사람이 어떻게 볼지 먼저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그녀는 물건을 그려도 비슷한 마음은 든다고 답했다. 오늘 접시를 꺼내기 전에 두 번 다시 봤다. 그래도 상대가 무엇을 볼지 전부 정해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들고 온 종이가 자기 것이었다.
그는 다음에 그녀를 그려 봐도 되느냐고 물었다. 서린은 처음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 얼굴을 그리는지 손이나 앉은 자세를 보는지도 아직 정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녀는 오늘 바로 그려야 하느냐고 물었다. 도운은 아니라고 했다. 지금은 해 보고 싶은 마음을 말한 것이었다. 서린은 앉아 있는 옆모습 정도라면 나중에 같이 정해 보고 싶다고 답했다.
서린은 예쁜 사람으로 고쳐 그려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떤 결과든 무조건 좋아하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았다. 실제 그리는 날 편한 범위와 시간을 다시 말하면 됐다. 도운은 자기 의자보다 어렵겠다고 웃었다. 그녀는 의자보다 다리는 적다고 답했다. 그가 방금 여섯 다리가 된 자기 종이를 봤다. 둘은 웃음을 잠깐 멈추지 못했다.
웃고 나니 조금 조용해졌다. 서린은 도운을 보고 싶었다는 말을 오늘 아직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약속을 확인하고 장소를 골랐으며 파일을 준비했다. 그 모든 동작이 마음을 대신 말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 말하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녀는 차를 내려놓고 그가 와서 좋다고 했다. 도운은 자기도 그렇다고 답했다. 그 뒤에 이유를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상대의 과거 선로 책임을 오늘의 대답으로 덜어 주지 않았다. 그 사실은 회사와 정한 절차의 자리에서 남아 있었다. 동시에 그를 만나는 자기 마음까지 매번 심사받는 것처럼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도운은 현재 필요한 설명은 자기 쪽에서 계속 하겠다고 짧게 말했다. 서린은 알겠다고 답하고 이번 차가 처음 것보다 덜 뜨겁다고 말했다. 대화가 다시 현재의 탁자로 돌아왔다.
점심은 가까운 실내 통로로 이어진 작은 식사 자리에서 먹었다. 둘은 같은 음식을 고르지 않았다. 도운은 자신이 양을 잘못 고르면 남길 수 있다고 했다. 서린은 덜어 줄 계획부터 세우지는 않겠다고 답했다. 그가 웃으며 알아서 먹겠다고 했다. 오래된 책임을 얘기할 때보다 식사 양을 고르는 말이 훨씬 가벼웠다. 그녀는 그 차이를 편하게 느꼈다.
비가 잦아들자 창가에는 바깥 빛이 조금 돌아왔다. 서린은 잠깐 걸어도 좋겠다고 말했다. 도운은 지금도 바닥이 미끄러울 수 있으니 큰 길로 가자고 했다. 두 사람은 우산을 각각 폈다. 한 우산 아래 붙어 걸어야 만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좁은 처마 아래를 지날 때 그가 조금 기다려 주는 동작은 보였다. 그녀도 보폭을 맞췄다.
길모퉁이에서 그는 자기 집으로 가는 방향과 그녀 방향을 물었다. 서린은 버스 정류장까지 조금 더 걷겠다고 했다. 같이 가자는 말을 하자 도운이 좋다고 답했다. 오늘 보여 준 종이는 각자의 가방에 있었다. 누군가 그림을 선물하겠다고 꺼내지 않았다. 서로의 종이를 봤다는 기억만으로도 가져갈 것이 있었다. 서린은 젖은 보도에 비친 두 우산의 간격을 잠깐 보았다.
정류장에서 도운이 손을 내밀었다. 서린은 우산을 반대 손으로 옮기고 짧게 잡았다. 물기가 조금 남은 손바닥은 서늘했다. 그녀는 그 손의 떨림으로 어떤 마음을 판정하지 않았다. 지금 서로 잡았다는 사실과 자기 손이 놓기 아쉽다는 느낌은 알 수 있었다. 버스가 오자 먼저 손을 풀었다. 그는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한 걸음 뒤로 섰다.
집에 돌아와서는 파일을 꺼내 말렸다. 종이가 젖은 것은 아니었지만 가방 겉의 물기를 먼저 닦고 싶었다. 서린은 그림을 탁자에 놓고 접시를 다시 봤다. 오늘은 오른쪽이 조금 떠 있는 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게 자기에게 꼭 결함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누군가 실제로 한 말을 기억하게 하는 선이 생겼다. 그녀는 그림 아래에 만난 날짜를 작게 남겼다.
도운은 자기 의자를 집에서 다시 봤다고 알렸다. 실제 다리는 넷이라는 짧은 답이었다. 서린은 그림에는 여섯이니 여분이 있다고 답했다. 그가 다음에 고칠 때 필요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더 그리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그 종이가 그의 방 어디에 놓였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같은 날의 끝이 서로 다른 방에 놓일 수 있었다.
저녁에는 다음 근무의 가방을 준비했다. 업무 자료는 지정된 경로에 있었고 개인 파일은 따로 넣었다. 현물 대조에 필요한 질문은 이미 네 줄로 정리돼 있었다. 그녀가 휴일 동안 더 오래 의심해야 바닥의 금속물이 더 분명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실제로 만났고 종이를 보여 줬으며 함께 웃었다. 그 시간은 조사에 실패한 빈칸이 아니었다.
잠들기 전 창밖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서린은 화면의 초침 대신 그 불규칙한 간격을 잠깐 들었다. 내일은 다시 누가 무엇을 직접 봤는지 물어야 했다. 오늘 본 도운의 의자와 자기 접시는 사본의 증거가 아니라 함께 놓았던 두 장의 그림이었다. 그녀는 파일을 닫고 불을 껐다. 밝은 자리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각자의 저녁으로 돌아온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