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재선은 세 줄이었지만, 서명한 종이는 한 장이 아니었다.
11월 7일 오전, 서린은 회사 자료실에서 네 장의 사본을 차례로 펼쳤다. 전날 표지만 보았던 폐기·잔재 처리 첨부였다. 발주 운영 담당이 허가한 열람 범위에는 이름 대신 직무와 결재 일자가 남았다. 누가 무엇을 승인했는지 확인하는 데 먼저 필요한 것은 얼굴이 아니라 각 면의 문장이었다.
첫 장에는 일반 철거 잔재의 처리가 있었다. 둘째에는 개인 보관품을 구별하라는 조건이 있었다. 셋째는 수탁업체의 시행표였고, 마지막은 현장 반출 확인이었다.
도운이 둘째 장을 돌려 놓았다.
“같은 도장이네요.”
“어느 결재의 도장인지 봐요.”
서린이 종이 모서리에 붙은 문서 번호를 읽었다. 첫 장과 둘째는 같은 승인 묶음이었다. 시행표에는 다른 번호가 붙었다. 폐기 승인이 내려왔다는 현장 설명만 들었다면, 둘 사이에 떨어져 나간 문장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보관 주체 미확인 물품은 별도 분류 후 담당 회신까지 반출 대기.
서린은 그 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아래에는 요청한 분류표를 제출하라는 말도 있었다. 회신을 기다리라는 조건이 있었고, 기다릴 상대도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시행표에는 보관품 일괄 잔재 처리라고 적혀 있었다.
“조건을 뺀 쪽이 따로 있네요.”
도운이 말했다.
“그 시행표를 누가 만들고 누가 확인했는지 더 봐야 합니다.”
서린은 접수 담당에게 해당 조건이 업체에 전달됐는지 물었다. 담당자는 발송 목록을 보냈다. 네 면 가운데 첫 두 면이 같은 묶음으로 수탁업체의 업무 창구에 도착한 이력이 있었다. 현장 작업자에게 어느 면까지 전달됐는지는 그 목록에 없었다.
모은경이 전화로 참여했다. 오늘 통화는 회사 보관 담당과 열람 접수 담당에게도 고지돼 있었다. 서린은 상대에게 둘째 장의 문장을 읽고 받았는지부터 물었다.
“당시 자료가 많이 왔습니다. 보관품은 관리인께서 반환을 마친 것으로 보고받았고요.”
“그 보고와 조건부 승인 원문을 같이 확인하셨나요?”
“담당 검토를 거쳤습니다.”
“그 담당의 검토 자료를 요청합니다. 시행표의 일괄 처리와 별도 분류 조건이 다릅니다.”
은경은 잠깐 말을 멈췄다. 서린은 침묵을 녹음 밖의 인정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답을 받지 못한 질문에 표시를 붙이고 다음 면을 보았다.
발주 운영 담당의 확인란에도 문제가 있었다.
업체가 낸 결과표에는 분류 완료라고 적혀 있었는데 첨부 분류표는 접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운영 담당은 다음 작업 단계로 넘겼다. 사본 뒤의 업무 회신에는 일정 지연을 막기 위해 잔재 처리를 우선 진행하라는 문장이 있었다.
“이쪽도 기다리라고 해 놓고 안 기다렸군요.”
도운이 말했다.
서린은 그 말을 그대로 쓰지 않았다. 누가 어떤 자료를 받기 전 무엇을 허용했는지 세 칸으로 나누었다. 최초 승인은 조건부였다. 업체 시행표는 조건을 빠뜨렸다. 발주 운영 담당은 분류표가 없는 결과를 받고도 작업을 다음으로 넘겼다.
조건을 쓴 것만으로 뒤의 확인 책임이 끝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첫 결재에 이름을 올린 모든 사람이 보관품 반출을 알고 시켰다고 적을 수도 없었다. 서린은 수신 이력과 해당 직무의 확인 권한을 다시 요청했다. 오늘 받은 네 장이 책임의 높이를 보여 주었지만, 높이에 따라 똑같은 죄를 나눌 수는 없었다.
보관 담당자가 사본 한 면을 다시 인쇄했다. 아래쪽이 잘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린은 쓰레기통으로 가려는 첫 출력물을 불렀다가 말끝을 멈췄다. 새로 출력한 열람 사본이었다. 원본이나 유일한 기록은 아니었다.
“잘린 사본은 사용하지 않도록 구분해 주세요. 제가 메모한 쪽은 보존하겠습니다.”
담당자는 사본 번호를 붙여 분리했다. 모든 종이를 붙들어야 기록이 남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종이에 어떤 판단을 했는지 잃지 않으면 됐다.
잠시 뒤 회사 전화가 울렸다. 은담 현장의 물품 반환 대기자가 출입구에 와 있다는 연락이었다. 당일 반출을 허가받았다고 알고 왔지만 운영 안내에는 외부 창구 예약이 필요했다. 서린은 자기가 곧 가서 해결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현재 현장 운영 담당에게 먼저 연결했다.
전화 너머의 남자는 자기 공구가 폐기될까 봐 일을 빠지고 왔다고 했다.
“오늘 못 받으면 내일 못 나갑니다.”
그 목소리가 스피커 밖으로 작게 새었다. 서린은 방금 읽은 일괄 잔재 처리라는 글자를 보았다. 저 문장은 누군가의 내일 출근까지 쓰레기와 함께 묶을 수 있었다.
담당자는 남자의 물품 문의 부호를 대조하고 현재 보관 상태를 확인했다. 제한 구역에 혼자 들어가게 하지는 않았다. 안전하게 확인된 반환 대상인지, 별도 동의가 필요한 공동 물건인지 검토한 뒤 안내하겠다고 했다. 남자는 왜 같은 설명을 또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서린도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열쇠를 받아 당장 꺼내 주는 답은 없었다.
그녀는 회사가 이미 가진 문의 자료를 다시 요구하지 않도록 현장 창구에 보존 번호를 연결했다. 남자는 자기 이름을 처음부터 다시 쓰지 않아도 됐다. 현재 보관 담당에게서 물건이 폐기되지 않았다는 회신을 받고서야 전화 목소리가 조금 내려갔다.
“그럼 제가 여기 있다는 건 적어 주세요.”
서린은 방문 목적과 안내 경로를 운영 담당이 남긴다고 확인했다. 자료실의 종이 밖에서도 지금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통화가 끝나자 도운이 창을 조금 열었다. 복도에서 난방기 냄새가 들어오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종이 모서리를 들자 그는 창을 다시 좁혔다.
“먼지보다 종이가 먼저 나가겠네요.”
“오늘은 둘 다 안 나가게요.”
서린은 받침 위에 사본을 고정했다. 잠깐 웃은 뒤 팔을 폈다. 목 뒤가 굳어 있었다. 결재선을 위로 따라갈수록 누군가를 곧장 찾아가 따지고 싶은 마음도 올라갔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있는 이름을 찾는 일이 답이 되면, 실제로 물건을 싣고 문을 닫은 사람은 또 표 밖으로 빠졌다.
휴식이 끝나기 전, 서린은 표지의 가린 이름을 다시 보았다. 도운이 그 이름도 요청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서린은 담당자에게 정식 조사 창구에는 전체 결재 이력이 제출되는지 확인했다. 민간 열람본의 가림을 자신이 벗겨야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모르는 이름으로 끝나면요?”
“누가 답할 직무인지와 자료가 어디로 갔는지는 확인합니다. 가려졌다고 책임까지 없는 건 아니에요.”
담당자는 전체 이력을 받을 창구와 현재 제출 상태를 안내했다. 서린은 아직 보내지 않은 자료를 제출 완료로 표시하지 않고 다음 회신 항목으로 남겼다. 그 차이를 지킬 때마다 종이는 느려졌다. 대신 누군가 어디선가 했겠지라는 말이 한 칸 줄었다.
그녀는 자기 표의 공란 하나도 고쳤다. 분류표 미접수라는 말을 분류표 없음으로 줄여 놓았다. 보내지 않은 것인지, 잃어버린 것인지, 처음부터 만들지 않은 것인지는 아직 달랐다. 도운이 그 수정을 보고 자기 메모의 같은 문장에도 줄을 그었다.
점심 뒤 발주부서가 관련 질문에 서면으로 답했다. 일정 우선 진행 회신은 해당 운영 담당의 승인 아래 발송됐다. 다만 그 회신에서 개인 물품까지 폐기해도 된다고 판단한 근거는 추가 확인 중이었다. 최초 승인 담당과 실행 결과 확인 담당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서린은 직무별 표를 다시 갈랐다. 최초 승인, 업체 시행 작성과 제출, 결과 검토, 현장 실행. 비어 있는 칸에는 사람 이름 대신 요청할 자료가 들어갔다.
은경은 다시 통화했다.
“발주 쪽에서 진행하라는 회신이 있었습니다. 저희만 일정을 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 회신은 제출하신 시행표 뒤에 왔습니다. 그 전에 누가 일괄 처리라고 썼는지도 답해 주세요.”
“현장에서 더 세부적으로 나눴을 수 있어요.”
“그 분류표도 요청하겠습니다. 현재 제출 묶음에는 없습니다.”
서린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네 장을 순서대로 놓은 덕분에 상대의 답이 어느 앞뒤를 건너뛰는지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발주가 진행하라고 한 책임과, 그 전에 업체가 무엇을 완료라고 올린 책임이 같은 줄로 합쳐지지 않았다.
은경은 자기 결재가 시행표 제출 승인에 있다고 확인했다. 작성자와 현장 실행자는 추가 자료로 설명하겠다고 했다. 서린은 그 확인을 받고 곧바로 위조 승인까지 인정했다고 쓰지 않았다. 서명 전용과 지연 설정은 별도의 문서 경로를 더 따라가야 했다.
밖에서는 공구를 찾으러 온 남자의 연락이 다시 왔다. 현재 보관을 확인한 물품 가운데 개인 수공구 한 묶음은 지정 담당이 외부 반환 자리까지 옮겼다고 했다. 사진과 표찰을 대조한 뒤 본인이 인수했다. 공동 장비 하나는 소유 확인이 남아 오늘 받지 못했다.
남자는 모두 돌려받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일 쓸 건 왔습니다.”
서린은 그 말을 듣고서야 손에 쥔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 찾은 결재선은 지나간 책임을 묻는 길이었고, 그 길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물건 하나는 자기 주인에게 갔다. 둘을 같은 완료로 닫을 필요는 없었다.
윤재는 현장 제한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회신했다. 구조 재점검은 담당자가 따로 진행 중이었고 주민 재진입은 허용되지 않았다. 서린은 폐기 문서의 문제를 찾았다고 안전 위험도 해결된 것으로 보고하지 않았다.
오후 네 시가 지나 기관에서 연락이 왔다. 허정우가 법률 조력자와 함께 다음 날 자료를 제출하겠다고 결정했다는 말이었다. 제출물은 본인이 보유한 관련 작업 로그의 사본이었다. 서린에게는 자기 회사 업무와 연결되는 부분만 설명할 예정이었다.
“원래 장치의 디스크인가요?”
서린은 먼저 구분했다.
“아닙니다. 본인이 작업 확인을 위해 보관한 출력·내보내기 자료입니다. 취득 경위와 원본 보관처를 담당 창구에 설명하기로 했습니다.”
서린은 장비창고에서 인수된 두 봉인물 옆에 다른 자료 번호를 만들었다. 정우가 갖고 온다고 그 안의 영상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숫자를 입력한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남긴 경로가 생길 수 있었다.
도운은 내일 질문을 한 줄 썼다. 누가 시켰는가.
서린은 그 옆에 두 줄을 더했다.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 그때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도운이 종이를 보고 첫 질문 뒤에 물음표를 붙였다.
“긴 진술이 되겠네요.”
“말할 범위는 본인이 정합니다.”
서린은 상담실 예약 시각만 확인하고 자료실을 나왔다. 복도 불이 한 구역씩 꺼지고 있었다. 그녀가 통로를 벗어날 때까지 뒤쪽 불은 남았다.
퇴근 직전 조력자를 통해 정우의 짧은 말이 도착했다.
내가 누른 것은 하나지만, 보낸 확인서는 두 번입니다.
서린은 내일 질문지에서 입력이라는 단어 아래, 전송이라는 새 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