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는 오지 않았고, 상자를 적은 사람이 왔다.
백마흔여섯째 오전, 조일은 손님을 문가 받침 앞에 세우지 않고 안쪽 탁자로 안내했다. 한 장만 세우기로 한 받침에는 여전히 자기 이름이 있었다. 수현은 손을 천 위에 놓고 둘이 앉을 자리를 비켰다. 오늘 첫 질문은 견습의 몫이었다.
성인은 전날 말한 전달 목록의 읽기용 사본을 꺼냈다. 원래 맡은 사람이 아침에 상자 안을 열어 보았다는 설명도 가져왔다. 칸막이 셋과 바닥에 묶인 짚깔개가 남아 있었다. 물건을 다 내린 뒤 적은 ‘빈 상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럼 목록에서 빈 자를 지우면 될까요?”
조일이 붓을 들다 멈췄다. 손님은 오늘 가져온 종이가 물건을 옮길 사람에게 읽힐 안내라고 답했다. 원래 거래의 수량을 바꿀 권한은 자신에게 없었다. 견습은 붓끝을 물에 씻고 먼저 따로 적었다. 고칠 종이와 설명할 종이가 달랐다.
수현은 무릎 위 손가락을 펴 보았다. 아침의 떨림이 손끝에 남았다. 칸막이는 무슨 나무인지 묻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오늘 받은 것은 무게 감정이 아니라 같은 단어를 서로 다르게 읽은 사람들의 말이었다.
손님은 상자를 되가져갈 운반인에게 빈 통의 품삯을 말해 두었다고 했다. 칸막이까지 붙은 지금 물건의 중량을 직접 재지는 않았다. 내용물 없는 상자라고 들었기에 한 사람이 들 수 있으리라 여겼다는 말이었다. 조일은 그 대목을 두 번 읽었다.
“한 사람으로 된다는 답은 누구에게 받으셨습니까?”
자기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자 견습은 헛기침했다. 손님은 받은 적 없다고 답했다. 조일은 그럼 그 줄은 안내에 넣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남의 손으로 들 물건을 종이에서 먼저 가볍게 만들 수는 없었다.
손님은 잠깐 표정을 굳혔다. 아침에 운반 품을 새로 물으면 배 자리를 놓칠 수 있다고 했다. 수현은 그 걱정이 단순한 성급함은 아니라고 느꼈다. 나루에서 때를 놓치면 창고에 하룻밤 둘 값이 붙었다. 그렇다고 오늘 그 값을 자기 입으로 없애 줄 수도 없었다.
조일은 현재 물건을 맡은 사람과 운반인이 만나 읽을 설명을 나눠 주겠다고 했다. 상자는 가게로 보내지 않았다. 칸막이가 남았다는 현재 답, 무게와 들 사람은 현장에서 다시 정해야 한다는 줄을 나란히 놓았다. 손님은 그 줄이 너무 길다고 말했다.
견습은 두 줄로 갈랐다. 수현이 시키기 전에 종이를 한 번 접었다 펴고 문가까지 물러서 읽었다. ‘빈 상자’만 눈에 먼저 들어왔다. 그는 그 말을 큰 제목으로 남기는 대신 ‘내용물을 내린 상자’라고 옮기면 뜻이 달라지는지 물었다.
상대는 맞는 말이라고 했다. 안의 물건은 다 내렸고 칸막이는 상자에 속한 것이라고 들었다. 조일은 그렇다면 그 말의 출처를 함께 적겠다고 했다. 읽기 좋게 만드는 일이 말을 해 준 사람까지 지워 버리는 일이어서는 안 됐다.
손님은 자기 종이를 보다가 웃었다. 상자가 비었다는 말은 짧아서 좋아했는데 짧은 만큼 사람이 두 명 더 필요해졌다고 했다. 조일은 사람 수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바로잡았다. 그제야 자신도 웃었다. 농담 뒤에 숫자를 함부로 붙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수현은 물을 따르려다 잔을 탁자 안쪽에 두었다. 손이 작게 흔들려 물방울이 천에 닿았다. 조일이 말을 멈추자 그는 계속하라고 했다. 견습의 질문은 자기 물잔이 찼는지와 관계없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들은 먼저 현장 담당에게 물어볼 두 가지를 골랐다. 칸막이를 붙인 채 내보낼지, 따로 빼서 보관할지였다. 어느 쪽도 여기서 정하지 않았다. 손님은 자기가 오늘 직접 답을 받아 운반인에게 전하겠다고 했다. 읽기 종이는 그 답을 담을 자리부터 마련했다.
그러다 목록의 맨 끝에 같은 상자 이름이 다시 나왔다. 조일은 두 번째 물건인지 물었다. 손님은 되가져갈 한 상자의 도착 칸을 뒤에 또 적은 것이라고 답했다. 견습은 소리 내 세지 않았다. 줄은 둘이었고 물건은 하나라는 설명을 확인했다.
“종이는 상자를 두 번 나를 수 있군요.”
수현이 말했다. 조일은 그러면 두 번 받을 품삯이 있느냐고 물었다. 손님이 웃으며 이번에는 한 번만 나른다고 답했다. 가벼워진 공기 속에서 붓이 다시 움직였다. 견습은 출발 쪽과 도착 쪽을 선으로 잇되 원래 번호를 덮지 않았다.
종이를 완성하기 전에 읽기용 값과 맡는 범위를 다시 들려줬다. 손님은 원본 정정이나 실제 인수가 끝났다고 보증해 달라는 부탁이 아니라고 답했다. 조일은 그 답을 듣고 마지막 글씨를 썼다. 수현의 이름을 빌려 제목 위에 올리지 않았다.
손님은 받아 든 종이를 자기 보자기 위에 놓았다. 다시 접어 넣으려다 접힌 선이 두 질문 사이를 가른다는 것을 봤다. 그는 현장에서 한쪽만 펴 볼 수 있겠다고 했다. 조일은 종이 크기를 늘리는 대신 핵심 질문을 같은 면으로 옮겼다. 상대의 보자기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정한 시간의 끝에 둘은 실제 받은 설명과 남은 질문을 읽었다. 조일은 대금을 받고 가게 몫과 자기 기록 몫을 나눴다. 아직 현장 답은 없었지만 오늘 자기가 한 일에는 끝이 있었다. 손님은 오후에 돌아와 설명해도 되는지 물었고 견습은 접수 가능한 때를 알려 줬다.
문이 닫힌 뒤 조일은 수현을 봤다. 처음부터 상자를 한 번 가져와 보라고 하고 싶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수현은 그랬다고 답했다. 손으로 만지지 않아도 모양만 보면 답이 나올 것 같은 물건은 여전히 자신을 불렀다. 오늘은 그 부름에 가게 문을 다 열지 않았다.
견습은 자기도 종이를 빨리 고쳐 끝내고 싶었다고 했다. 손님이 돈 걱정을 하니 기다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싫어질 것 같았다는 것이다. 수현은 상대가 싫어할 가능성과 틀린 말을 써도 되는지는 따로 보자고 말했다. 그 말이 조일에게 쉽지는 않을 것을 알았다.
낮에는 귀가 예민해져 안쪽 문을 반쯤 닫았다. 나루의 큰 수레가 돌바닥을 지날 때 쇠테가 길게 울렸다. 조일은 받침을 옮겨 문을 전부 열지 않아도 글씨가 보이게 했다. 손님을 부르는 이름이 바람을 맞고 조금 흔들렸다.
수현은 안쪽에서 짧게 쉬었다. 선반의 돌은 여전히 납작했다. 어제 윤초에게 보낸 편지는 아직 답이 없었다. 그는 돌을 편지의 답처럼 쥐어 보지 않았다. 누군가와 가까워진 뒤에도 기다리는 오후는 그 사람 대신 자기 밥과 물로 채워야 했다.
조일은 점심에 무를 넣은 밥을 해 봤다고 말했다. 쉬는 날이 아닌 오늘은 남은 무를 가게 밥에 조금 얹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수현은 먹고 나서 무가 자기 감정을 거절했다고 했다. 견습이 그럼 소금을 더 달라는 뜻으로 알아듣겠다고 웃었다.
밥을 먹은 뒤 수현은 조일에게 오늘 질문에서 가장 어려웠던 말을 물었다. 견습은 한 사람이 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고 답했다. 자기는 사람을 본 적도 상자를 본 적도 없는데 그 말만 대답하면 손님 얼굴이 풀릴 것 같았다고 했다. 수현은 자기도 그 얼굴 때문에 틀린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지난 실수를 교훈으로 길게 펼치지 않았다. 오늘 조일이 멈춘 곳을 다시 읽었다. 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부를 자리를 남겼다는 점이었다. 견습은 빈칸을 너무 많이 남긴 것 같았는데 실제 사람을 부를 칸도 있었느냐고 중얼거렸다.
오후의 손님은 약속한 시간에 돌아왔다. 상자는 여전히 없었다. 대신 운반인과 현장 담당이 함께 정한 설명을 가져왔다. 칸막이는 상자와 함께 돌아가고, 담당이 현재 저울에서 잰 수와 밑바닥 상태를 운반인에게 직접 알렸다고 했다. 가게가 그 수를 대신 보증하지는 않았다.
운반인은 혼자 들지 않고 자기 동료와 바퀴 받침을 쓰기로 했다고 했다. 새 품삯은 당사자들이 정했고 손님은 창고에 하룻밤 둘 값과 비교한 뒤 오늘 옮기기로 답했다. 수현은 그 결과를 듣고 상자가 정말로 가벼워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손이 늘어난 쪽이었다.
조일은 오전 종이의 빈칸을 마음대로 채우지 않았다. 현재 받은 설명을 별도 뒷면에 적고 누가 말했는지 붙였다. 운반 완료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손님이 바로 나루로 가야 한다고 하자 견습은 종이를 접어 보자기와 같은 방향으로 건넸다.
“내일 빈 상자로 돌아오면 다시 읽어야겠소?”
손님이 물었다. 조일은 무엇이 남았는지 아는 사람이 함께 읽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상대는 칸막이를 남기지 말라는 뜻이냐고 웃었다. 견습도 웃으며 남겨도 되지만 이름만 먼저 비우지 말자는 뜻이라고 했다.
그가 떠난 뒤 수현은 오늘 끝난 읽기와 아직 안 끝난 운반을 다른 줄로 봤다. 접수대 위 종이에는 빈칸이 하나 남아 있었다. 조일은 그 칸이 거슬려 붓을 들었다 내려놨다. 수현은 채우지 않은 손을 칭찬하는 대신 내일 누구에게 물을지 물었다.
견습은 실제 인수하는 사람의 답을 기다린다고 했다. 보자기를 들고 온 손님도 현장 설명의 전달자였고, 도착을 보지 않았다면 그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조일은 자기 기록에도 같은 끝을 남겼다. 한 장의 종이가 여러 손을 지나도 모두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조일은 문가 받침에서 자기 이름을 한 번 더 읽었다. “오전에는 이 이름이 저를 찾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제가 하지 않은 말도 그 길로 돌아올 수 있네요.” 그가 수현을 보고 말했다. “잠깐은 이름을 지우고 싶었어요.”
수현은 그를 대신해 받침을 돌려놓지 않았다. 견습이 스스로 한 장을 바로 세웠다. 맡지 않은 무게를 받겠다는 말은 없었고, 자기 글을 물으러 온 사람을 피하겠다는 말도 없었다. 작은 나무는 하루 전과 같은 면적의 탁자에 놓였다.
가게 밖에서는 물동이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조일은 그 소리가 끝난 뒤 장운의 말을 다시 받아 썼다. 누구나 알아듣게 고친 설명이 누구의 이름으로 움직였는지, 오늘은 그 무게까지 함께 읽을 차례였다.
해질 무렵 장운이 문앞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목공은 조일의 이름을 불렀다. 반듯한 받침을 하나 더 만들자는 제안은 아니었다. 나루의 운반인이 상자 밑에 넣을 얇은 나무판을 물었는데, 그가 자기 작업장의 짜투리판을 당장 쓰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러 왔다고 했다.
판에는 오래된 갈라짐이 있었다. 장운은 그 상태로 무게를 받게 할 수 없다고 답했고 다른 자재를 찾는 일은 운반인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누군가 ‘백가에서 읽은 빈 상자’이니 괜찮지 않겠느냐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수현은 안쪽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조일의 종이에 없던 말이 물건의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장운을 앉히고 누구의 말이 어디까지 전해졌는지 먼저 들었다. 검을 들 일은 없었다. 오늘 지킨 빈칸이 다른 사람의 손에서 위험한 답으로 채워지기 전에, 자기 이름으로 읽은 말의 끝을 다시 찾아야 했다.